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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사

[이집트사] - 무하마드 알리 치세의 이집트

by Timemapcatographer 2025.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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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하마드 알리 치세의 이집트

무하마드 알리는 프랑스가 이집트를 철수한 후, 오스만 제국과 맘루크 세력 간의 갈등 속에서 총독으로써 이집트의 실권을 장악했다. 그는 맘루크 세력을 제거하려는 오스만 제국의 계획과 영국의 개입 속에서 권력을 강화해 나갔다. 이후 그는 이집트의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독자적인 개혁과 확장 정책을 추진하면서 이집트의 현대화를 이끌었다.

 

무하마드 알리는 맘루크와의 갈등을 끝내기 위해 직접 군사적 조치를 취했으며, 이후 아라비아 반도의 사우디 왕조를 정벌하기 위해 1811년 아들을 파견하여 메디나, 메카를 점령하고 사우디군을 격퇴했다. 그러나 아들 투순이 사망한 후, 그의 장남 이브라힘 파샤가 다시 사우디를 공격해 디리야를 함락시켰다.

 

내정 개혁 측면에서 무하마드 알리는 토지의 대부분을 국유화하고, 경제를 국가가 직접 통제하는 독점 체제를 수립했다. 그는 농업을 현대화하고 면화를 주요 수출 작물로 육성했으며, 공장을 설립하고 알렉산드리아와 나일강을 연결하는 마흐무디야 운하를 건설하는 등 인프라 개발에도 힘썼다. 교육과 의료 시스템을 개선하고 유럽의 상인들과 협력하여 무역을 활성화시키는 등 경제적 자립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군사적으로는 유럽식 군대와 해군을 창설하고, 유럽식 훈련을 받은 군대를 활용하여 그리스 독립 전쟁과 시리아 원정에 나섰다. 1831년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는 시리아, 다마스쿠스, 알레포를 점령하며 승리했지만, 유럽 열강의 개입으로 전쟁이 중단되었다. 결국 1841년, 이집트 총독직은 무하마드 알리 가문에게 세습되었지만, 오스만 제국의 속국 지위를 유지해야 했다.

 

말년에는 경제 위기와 자연재해, 건강 악화로 정치적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이후 그의 아들 이브라힘 파샤, 손자 아바스 1세, 사이드 파샤 등이 이집트를 통치했으나, 무하마드 알리가 추진했던 개혁은 점차 약화되었다. 특히 이스마일 파샤의 치세에 이르러 과도한 지출과 부채로 인해 이집트는 재정 파탄에 이르게 되었고, 결국 영국과 프랑스의 개입을 초래했다.

무하마드 알리는 이집트의 근대화를 위한 토대를 마련했으나, 그의 독점적이고 중앙집권적인 개혁 방식은 장기적으로 경제적 불안정과 외세 개입의 원인이 되었다.

무하마드 알리의 자손들은 외침의 지배에도 그들의 왕조를 약 150년간 존속시켰다. 이집트는 케디브 - 술탄 - 킹으로 호칭을 바꾸며 1952년까지 알라위야 왕조의 통치아래 있었다. 그러나 1953년 혁명가들이 이집트를 공화국으로 선언하며 1세기간 지속된 무하마드 알리의 후손, 알라위야 왕조의 통치를 종속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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