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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사/로마노프 왕조

[러시아사] - 러일전쟁과 니콜라이 2세의 러시아

by Timemapcatographer 2022.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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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사] - 러일전쟁과 니콜라이 2세의 러시아

러시아는 극동에서 공격적이고 모험적인 팽창을 계속해서 진행해왔다. 여기에는 1891년부터 1903년에 부설된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대표적이다. 만주와 중국, 한국을 연결하고 간접적으로 일본까지 러시아의 영향력을 미쳤던 철도는 극동지방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예였다. 

일본이 요동 반도를 반환한다는 회담록, 1895년 11월 8일

이에 만주로의 진출을 염두에 두고 있던 일본은 이러한 러시아의 영향력 확대를 가만히 좌시하지 않았다. 당시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통한 근대화 성공으로 1894년에 있었던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동북아시아에서 자신의 패권을 위시했다. 청일전쟁의 마무리를 짓는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일본이 만주 진출을 염두에 두고 랴오둥 반도를 조차하려 하자, 러시아는 앞서서 프랑스, 독일과 함께 이러한 일본의 야욕을 저지했다. 이를 삼국간섭이라고 한다. 그리고 러시아는 삼국간섭의 대가로 중국과 비밀조약을 체결해 만주를 통해 연해로 이르는 철도 부설권을 얻어냈다. 이는 사실상 북만주에서 러시아의 세력권이 확립되는 걸 의미했다. 

 

만주에서의 영향력 확대에 대한 갈등의 결과로 러시아 내 일본에 대한 이미지는 격히 나빴다. 가판대에서 팔리던 언론지에서는 일본인들을 노란 원숭이로 격하하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얕보던 일본에 의해 급작스러운 공격을 당해야했다. 

 

1904년 2월 8일 뤼순 항구의 외항에서 갑작스럽게 일본 함대가 러시아 함대를 공격했다. 이는 어떠한 선전포고 조차 없이 이루어진 것으로 나중에 있을 일본의 진주만 공습과 함께 생각해보면 일본은 선전포고 없이 전생을 시작하는 것을 매우 쉽게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이러한 기습은 성공을 거두었고, 러시아는 패퇴를 거듭했다. 당시의 상식으로는 러시아군이 더 우세할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실제로는 일본군이 더 잘 조직되어있었고 훨씬 더 근대적이었다. 게다가 러시아군은 국내의 정치적 혼란과 대중적 지지의 결여로 사기면에서도 크게 떨어져있었다.

당시 러시아는 외교적으로 고립되어있었고, 일본은 영국과 동맹을 맺고 세계의 여론까지 등에 업은 상태였다. 게다가 전장은 일본과 매우 가까운 여순이었고, 러시아 육군은 시베리아 단선 철도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뤼순 항구를 포위하여 점령했다.

 

그리고 선양 인근과 타 지역에서 전투를 벌여 러시아 주력군을 만주 북쪽으로 밀어냈다. 게다가 일본군은 발트해에서부터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보급도 제대로 받지 못한채 지구를 반바퀴 돌아온 러시아 함대를 쓰시마 해전에서 패배시켰고, 러시아 발트함대는 극동의 해협에서 궤멸되었다.

러시아 발트함대를 공격해 침몰시키는 일본군함

쓰시마 해전 직후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휴전이 성립되었다. 러시아는 수없이 많은 패배와 유럽 러시아에서의 정치적 혼란이라는 이중적 고통에 시달렸다. 또 일본은 일본 나름대로 재정의 고갈로 인해 전쟁을 끝까지 수행할 수 없었기에 둘의 이해가 맞아 떨어져 휴전이 성립되었다. 

 

미국의 루즈벨트는 1905년 8월 뉴햄프셔에 있는 포츠머스에서 강화회담을 주선했다. 러시아 대표단의 비테는 자신의 외교술을 통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러시아가 만족할만한 성과를 냈다. 러시아는 한국에서의 일본의 우선권을 승인했고, 랴오둥 반도의 조차권과 창춘 이남의 철도, 사할린 남부를 일본에 양도했다. 양국은 만주는 중국에 돌려주기로 합의했으며 일본의 강력한 주장에도 배상금에 대한 부과는 없었다. 

일리야 레핀 ,  1905년 10월 17일

러일전쟁이 마무리되던 1905년 무렵 러시아는 국내의 정치적 혼란이 극에 달해 결국 1905년 혁명이라는 사태로 정국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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