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사] - 차르 니콜라이 2세의 등장과 반개혁정치
알렉산드르 3세가 서거하자 그의 장남인 니콜라이 2세가 1894년 러시아의 차르로 즉위하였다. 그는 1868년생으로 최후의 차르로 불리우는데, 당시 니콜라이는 러시아를 둘러싸고 돌아가는 국제적인 정세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차르를 기반으로 한 전통적인 권력 개념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니콜라이는 자신, 즉 통치자는 신에의해서 축복 받고 있으며 자신의 국민들과 특별한 유대를 맺고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전통주의적 시대의 복식과 정치질서를 추구했다. 니콜라이는 러시아의 전통에 반하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회의적이었으며 반개혁적 정치질서를 가지고 통치를 진행했다.
니콜라이 3세는 부친의 반동적인 정책을 완화 시킬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는데 이러한 기대와 관련하여 그는 자신의 정치적인 견해를 서둘러서 밝혔다. 1895년 1월 귀족 대표들과 젬스트보 대표들, 도시 대표들을 모은 회동에서 그는 자신의 반개혁적인 견해를 밝혔다. 전제정치의 원칙을 유지 할 것이며 반동적 정치인물들을 유지했다. 정부는 아주 엄격하게 언론을 감시했고 젬스트보와 시 정부의 권한은 축소되었다.
이러한 보수주의적 가치와 긴밀히 결합된 러시아식 민족주의는 러시아 내부의 신민들에게는 압제이자 울타리였으나 비러시아 민족에게는 새로운 형태의 규제이자 학대였다. 언어와 행정, 교육에서 일부분 자유가 인정되기는 하였으나 이는 이들을 러시아 제국으로 끌어 안기위한 제도에 불과했고, 결국 종교적인 박해나 징집거부에 대한 공동체는 제국의 커다란 압박에 놓여야했다. 많은 이들이 유럽에서 캅카스나 중앙아시아로 추방당했다. 유대인들은 부동산 구입을 금지당하기도했으며 아르메니아 교회는 토지와 기금을 몰수당하기도 했다.
당시 니콜라이 2세의 통치에서 라스푸틴에 대한 이야기가 빠질 수 없으나 그의 이야기는 추후에 다루도록 한다.
러시아 차르가 대공국의 수장을 맡고있던 핀란드 대공국에서는 러시아의 가학적 통치가 더 잘 드러났다. 그 이전에 핀란드는 1809년에 러시아에 편입된 자치대공국으로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새로운 민족주의가 핀란드를 향했을 때 핀란드는 더 이상 러시아에 우호적인 지역이 아니었다. 1899년 핀란드인의 병역 의무에 대한 새로운 법령이 발표되며 하루 아침에 핀란드는 러시아에 매우 적대적인 지역으로 변했다.
1901년에 핀란드에서는 집회의 자유가 폐지되었으며, 이듬해인 1902년 핀란드의 보브리코프 총독은 핀란드인 관리와 재판관을 해임하고 러시아인들로 대체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또 1903년에 국가 안보와 공공질서 수호라는 명목으로 여러 특별 권한을 얻게 되는데 이에 대한 반발로 보브리코프는 1904년에 암살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어난 1905년 핀란드의 반정부 운동은 제국 전체로 확산되기 시작한 혁명의 일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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