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독립군 이야기로 돌아왔습니다.
독립군들은 대한의 독립을 꿈꾸면서 만주와 간도에서
무기를 들고 젊음을 불태우셨죠.
독립군들은 다양한 종류의 소총을 사용했습니다. 국가와 같은 중앙 군수물자 공급체계가 없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겠죠. 그래서 독립군은 각 단체마다 다른 다양한 루트를 통해서 소총을 입수했고 사용했습니다. 독립군들이 사용한 소총을 알아보겠습니다.
러시아제 모신-나강 소총
독립운동가들이 사용한 소총들 중 상당수의 소총은 모신나강 소총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모신나강은 러시아의 총기제작자 모신과 벨기에 총기제작자 나강의 이름을 딴 소총입니다. 러시아 제국이 1891년 육군 제식 총기로 채택한 볼트액션 소총입니다.
러시아 제국은 1905년 러일전쟁과 세계 1차대전에 참전함에 따라 막대한 양의 모신나강 소총을 생산하였는데, 러시아의 공업기술력이 이 수요를 감당하지 못하자 타국에서 위탁생산까지 진행을 합니다. 그중에는 미국의 레밍턴과 웨스팅 하우스 두 회사가 제정 러시아의 주문을 받아 160만정에 가까운 모신나강을 생산합니다.
제정 러시아가 혁명으로 무너지면서 이 미국제 모신나강 소총들은 미국 정부가 일부 물량을 흡수했습니다. 그리고 그 소총들은 체코군단에게 넘겨지거나 블라디보스토크로 파견된 미군들에게 지급되었습니다. 체코군단이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들어오고, 모신나강을 장비한 미군이 들어오면서 막대한 양의 미국제 모신나강이 적백내전으로 혼란스러운 연해주에 풀리기 시작합니다.
적백내전으로 러시아 내부가 혼란스럽자 러시아 제식무기였던 모신나강은 암암리에 판매되어 독립군들에게 장비되기 시작했고, 특히 체코군단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유럽으로 귀환하면서 가지고 있던 장비를 독립군들에게 싼 값으로 불하하면서 대량의 미국제 모신나강이 독립군에게 들어오게 됩니다.
얼마나 많은 모신나강이 풀렸는지는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그 일부를 일제기록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1919년 7월 18일 조선인의 총기운송 및 장정모집 헌병대 사령부 간도 파견원의 보고에 따르면 조선인 게우삐찌게는 러시아 과격파에게서 총기 3,500정을 얻어 삼원보로 운송을 마쳤다고 하며, 1919년 12월 10일 하얼빈 총영사는 독립운동가 이동휘의 독립군이 러시아와 일본의 총기를 모두 합쳐 2만 5천여정을 갖고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독일제 마우저 소총
독립군들은 독일제 마우저 M1871 소총도 사용했습니다. 독립군이 사용하기 이전인 대한제국 때도 마우저 소총은 사용되었습니다. 대한제국 군대가 있던 때에는 러시아제 무기가 대한제국 무기체제를 독점하다시피 하자 독일에서 수입해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대한제국이 세워지기 전 조선에서도 쓰인 우리과 관련이 깊은 총이지요.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에 관군이 사용한 기록도 남아있습니다.
마우저 소총은 당시 전세계로 수출된 베스트셀러로 중국과 러시아, 일본에 대규모로 물량이 풀려있었고, 이 무기들은 다시 독립군의 수중으로 들어와 독립을 위한 무기가 되어주었습니다
일본제 아리사카 소총 30식, 38식
일본의 제식 소총인 아리사카 소총은 1897년에 제조된 30식과 이를 개량한 1905년의 38식 소총으로 나뉩니다. 30식은 유럽의 무기를 모방하여 제작하여 러일전쟁에 사용하였습니다. 또한 이를 개량하여 38식 소총이 제식병기로 채택되어 사용되었습니다. 두 무기 모두 군대해산과 고종 강제퇴위로 인한 항일 의병투쟁을 탄압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에 맞서는 독립군이 사용하는 무기가 일본제 무기라는 사실이 아이러닉합니다. 만성적 무기부족에 시달렸던 독립군들은 대량의 일본제 무기를 사용합니다. 어떻게 이런일이 있었을까요?
세계 1차대전 당시 러시아는 무기부족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러시아의 고질적인 공업력 부족과 수많은 무장대상에 지친 러시아는 자체무장을 포기하고 결국 무기를 수입하게 됩니다. 러시아는 전 세계에서 무기를 사들이기 시작하는데 그 대상에는 일본이 있었습니다. 75만정에 달하는 러시아 아리사카 30식과 38식 소총이 러시아에 대량으로 수입되었습니다.
거기에 러시아에서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적백내전이 발생하자 백군이 대량의 아리사카 소총을 수입하였습니다. 이렇게 러시아에 풀려버린 아리사카 소총은 노획이나 구입을 통해 독립군의 수중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청산리 전투 직전 일제 보고에 따르면 독립군들은 각 단체마다 차이는 있으나 일정부분을 아리사카 소총을 운용하고 있었습니다. 무기명이 식별되는 최소단위로 집계해도 1920년 8월 대한군정서는 11정, 독군부는 41정을 활용하고 있었습니다.
대한제국 군대해산에 반발했던 남대문 전투에서 일본제국군이 대한제국군을 향해 발사하던 아리사카 소총이 다시 독립군의 수중에 들어와 일본군의 턱을 노리고 있었다는 사실은 역사와 전쟁이 얼마나 아이러니한지 보여줍니다.
오스트리아제 슈타이어 소총
독립군이 사용한 무기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제식소총인 슈타이어 소총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슈타이어 소총이 독립군에게 입수된 경위를 알려면 먼저 체코군단에 대해서 알아보아야합니다.
체코군단은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들로 이루어진 부대입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체코와 슬로바키아에서 군대를 동원하여 러시아와 동부전선에서 전투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제국으로부터 체코 지역을, 헝가리 지역으로부터 슬로바키아를 독립시키고자 하는 일부 군인들은 러시아로 망명하였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체코군단의 수는 약 10만여명에 달했습니다. 이렇게 오스트리아 제국군 제식장비를 가지고 오스트리아 제국에 대항하는 군대가 탄생했고, 이들은 연합국측에서 수많은 전투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가 무너지고 볼셰비키 정부가 오스트리아 제국, 독일 등 동맹국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협정(휴전협정)을 맺으면서 그들과 싸우던 체코군단의 입지가 위태로워졌습니다. 이들은 러시아의 휴전에 반발하며 자신들의 무장력을 바탕으로 서유럽으로 이동해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을 위해 싸우려고 헀습니다. 그러나 서쪽으로 가는 길은 독일이 점령해 이동할 수 없었고, 체코군단은 동쪽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해 배를 통해 서부전선으로 이동하려합니다.
시베리아 철도를 활용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체코군단은 1918년 7월 6일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고 1920년까지 머물려 차례차례 유럽을 향해 떠났습니다. 그들은 떠나면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무기를 독립군에게 판매했는데, 여기에 오스트리아 제국에서부터 지구를 반바퀴 돌아 온 슈타이어 소총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체코군단이 독립군에게 넘긴 슈타이어 소총에는 독립의 염원과 독립을 위해 싸우는 독립군에 대한 동병상련이 담겨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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