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사/독립운동사

[독립민수] - 안중근의 삶과 독립운동, 하얼빈 의거와 대한의군 참모중장이라 주장한 이유.

by Timemapcatographer 2022. 12. 21.
반응형

안중근(安重根), 1879년 9월 2일~1910년 3월 26일

안중근은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로, 대한의 독립을 위하여 일생을 바친 독립운동가다.


1. 독립운동 투신 이전

안중근(安重根) 선생은 어릴적부터 골격이 튼튼하고, 사격에 능하여 무골로 불렸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황해도에 이주하여 거주하였는데, 안중근도 황해도에서 출생하여 활동하였다. 안태훈과 동학농민운동 당시의 일로 친분이 있던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안중근에 대해 총을 잘 쏘는 청년으로 묘사하였다. 당시 김구는 안중근보다 3살이 많았으며, 동학의 접주로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하였고, 안중근은 동학군에 반하는 자경단을 이끌어 박석골 전투 등에서 활약하였다. 

 

일찍이 천주교에 영향으로 진남포에서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하는 등 교육사업에 투신하였으나, 1907년 8월 서울에서 대한제국 군대해산 이후 일어난 남대문 전투와 군대를 잃은 나라의 참상을 목격하고는 곧장 국외로 망명길에 올랐다. 8월 16일 북간도 용정에 도착한 안중근은 두달을 천주교인 남씨의 집에서 머물면서 북간도의 교육기관 서전서숙에 출입하며 용정 등지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러나 용정에는 이미 통감부의 간도 파출소가 있었고, 안중근 역시 활동에 제약을 받아 연해주로 이동한다.


2. 무장독립운동의 시작 - 동의회 의병

러시아령인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한 안중근은 이곳에서 대한제국 군대를 대신할 무장독립운동을 준비한다. 당시 연해주는 한인사회가 형성되어 있고, 국내와 가깝다는 입지 덕분에 독립운동의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었다. 연해주의 한인사회는 1863년에 처음 형성되었고, 국내에서 유입되는 인구로 인해 한인사회는 점차 성장하고 있었다. 여기에 최재형이라는 경제적 후원이 있었고, 1907년 정미7조약과 군대 해산을 계기로 국내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인력들이 모여들며 새로운 독립운동 거점이 되어가고 있었다. 여기에 안중근이 망명하면서 연해주 무장독립운동에 불씨가 지펴졌다. 

최재형 선생

연해주에는 크게 두 계열의 의병조직이 있었다. 기존의 러시아 한인사회내에서 조직된 의병과, 국내에서 활동하다가 연해주로 넘어와 활동하는 의병으로 나뉘어진다. 전자의 중심에는 연해주 한인사회의 구심점인 최재형 선생이 있었다. 후자에는 자신의 사포대인 충의대를 이끌고 연해주로 망명한 전 간도관리사 이범윤선생이 있었다. 이 두 세력은 서로 연합하여 연해주 의병을 형성하였다. 연해주 의병이 있기 위해서는 이 두명이 있어야 했고, 이들은 양대 축을 형성하며 연해주 의병의 연합작전을 진두지휘 했다.

 

연해주 의병은 이들의 연합 전까지는 단일부대로 편제되지 않았고 넓은 연해주에 산재되어 있었다. 의병장의 휘하에 편제된 군인들이 유기적으로 결합하였기에 편제나 계통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연해주 의병이 통합되면서 이들은 동의회와 창의회로 통합, 편제되었다.

이범윤 선생

동의회(同義會), 또는 동의회의병은 1908년 5월 연해주 연추에서 결성되었고, 표면적인 단체 목적은 한인의 결속 도모였으나 결국은 항일 의병을 위한 결사단체의 성격이 강했다. 창의회는 이범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안중근은 동의회의 결성에서부터 깊숙히 관여하고 있었다. 동의회의 평의원으로 실제 업무를 담당하는 간부 중의 한명이었다. 

 

안중근은 연해주 의병의 대규모 국내진공작전에 직접 참여하였다. 1908년 7월에 전개된 진공작전은 의병장 전제익 이하 안중근, 엄인섭이 인솔하는 200명에서 300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작전이었다. 이들은 두만강 대안에서 강을 건너 경흥군 홍의동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안중근은 동의회의 우영장으로 부대를 거느리고 지휘관으로 활약하였다. 안중근 부대는 홍의동에서 경흥에서 온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하는 전과를 올렸다. 뒤이어 북상하여 신아산에서 헌병분견대를 습격하여 승리한다. 이러한 승리 이후 안중근은 포로로 잡힌 일본군을 풀어주었는데 이는 갈등의 빌미가 된다. 포로로 잡힌 일본군을 풀어주는 안중근의 행동은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행한 것이지만, 항일전을 수행하던 의병 사이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 나오게 되었고, 일부 병력이 이탈하는 상황이 일어나게 되었고, 엄인섭 부대는 연해주로 귀환하기도 했다.


3. 국내진공작전의 실패와 영산전투

연해주 의병이 국내까지 진격해 들어오자 한국 주차군 수비구사령관 마루이 마사쓰구 소장은 이들을 공격할 작전을 지휘한다. 신아산에서의 전투 승리 다음날인 11일 청진 수비대 70여명이 웅기로, 회령으로 부터 수비대 1개 중대가 신아산으로 파견되었다. 경성에서도 1개 중대가 급파되어 초토화 작전을 진행하였다. 

 

일본군의 집중적인 견제가 이루어지자, 연해주 의병들은 13일동안 30여 차례에 달하는 교전을 벌여야했다. 회군을 주장한 엄인섭의 의견에 따라 안중근 휘하 의병들까지 대부분 철수하였고, 안중근은 우덕순과 합진하여 작전을 전개했다. 7월 11일 300여명의 의병은 경원읍 외곽의 융동으로 진출하고 경원을 위협하였고, 12일에도 회령에서 파견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서 승전하기도 한다. 그러나 영산에서 있었던 전투에서 일본군은 의병을 완벽하게 격파한다. 안중근이 기록하길 영산 전투에서 각각의 대가 나누어져 흩어질 정도라 하였다. 이를 통해 영산전투는 의병의 참패로 끝났음을 알 수 있다. 전투 직후 안중근은 국내를 탈출하여 연해주로 복귀하였다. 


4. 복귀와 독립을 위한 새로운 길 - 동의단지회

국내진공작전이 영산전투에서 패배를 당하면서 실패하고, 연추로 풍찬노숙을 견디며 복귀한 안중근은 강한 충격을 받는다. 안중근은 극심한 고초속에서 고통에 대해서 서술하였다. 일본군의 군사력, 조직력, 장비와 의병들의 단합력, 보급문제 등의 대한 이야기는 쓰여있지 않았지만, 이러한 격차에 많은 충격을 받은 듯 하다. 그 이듬해인 1909년 2월 안중근을 포함하여 동의단지회를 결성하여 활동한다. 안중근은 10월 21일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방문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이를 저격할 계획을 짠다.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등과 이토를 저격할 계획을 가지는데, 안중근은 일본인으로 위장하여 하얼빈역에 잠입하였다. 

안중근은 이토가 하얼빈역에 도착하여 군중의 환영을 받으며 손을 흔들자 그에게 권총을 발사했다. 안중근은 청과 러시아 호위병들에게 그자리에서 체포되었고, 끝까지 코레아 후라를 외쳤다. 이토히로부미는 즉시 기차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20분만에 사망하였다. 안중근이 저격에 사용한 총은 FN M1900이다. 

FN M1900


5. 대한의군 참모총장 안중근과 순국

안중근은 러시아 헌병대와 청나라 경찰에게 체포되어 조사 받다가, 저녁에 하얼빈 일본총영사관을 거쳐서 일본식민지인 뤼순감옥으로 이송되어 수감되었다. 안중근은 검사의 신문당시 이토의 죄목을 말하였는데 기록으로 남아있다. 

검사 미조부치 다카오(溝淵孝雄)의 심문을 받을 때 제시한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

하나. 일천팔백육십칠년, 대일본 명치천황 폐하 부친 태황제 폐하를 시살(弑殺)한 대역부도의 죄.

둘. 일천팔백구십오년, 자객들을 황궁에 돌입시켜 대한 황후 폐하를 시살한 죄.

셋. 일천구백영오년, 병사들을 개입시켜 대한 황실 황제 폐하를 위협해 강제로 다섯 조약을 맺게 한 죄.

넷. 일천구백영칠년, 다시금 병사들을 이용해 칼을 뽑아들고 위협하여 강제로 일곱 조약을 맺게 한 후 대한 황실 황제 폐하를 폐위시킨 죄.

다섯. 한국내 산림과 하천 광산 철도 어업, 농, 상, 공업 등을 일일이 늑탈(勒奪)한 죄.

여섯. 소위 제일 은행권을 강제하여 한국 내의 땅들을 억지로 팔게 만든 죄.

일곱. 국채 일천 삼백만 원을 한국에 강제로 지게 한 죄.

여덟. 한국 학교 내의 서책을 압수하여 불사르고, 내외국의 신문을 인민들에게 전달하는 것을 막은 죄.

아홉. 나라의 주권을 되찾고자 하는 수많은 의사들의 봉기를 폭도라며 쏴죽이거나 효수하고 심지어 의사들의 가족까지 십수만인을 살육한 죄.

열. 한국 청년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한 죄.

열하나. 소위 한국 정부의 대관이라는 오적, 칠적 등 일진회 놈들을 통해 일본의 보호라는 헛소리를 운운한 죄.

열둘. 일천구백영구년 또 다시 거짓으로 5가지 늑약을 맺게 한 죄. 열셋. 한국 삼천 리 강산을 욕심내어 일본의 것이라 선언한 죄.

열넷. 이천만 생령의 살육의 곡소리가 하늘에 끊이질 않고 포성과 총알이 비 오듯 쏟아져 숨쉴 틈 없는 와중에도 한국이 무사태평한 것처럼 명치천황을 속인 죄.

열다섯. 동양 평화의 영위를 파괴하여 수많은 인종의 멸망을 면치 못하게 한 죄.

한국사 데이터 베이스 - 주한 일본 공사관 기록 통감부 문서 7권

 

안중근은 뤼순감옥 관동도독부 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910년 3월 26일 순국했다. 

김구는 해방 후 효창공원에 가묘를 설치하고 안중근의 유해를 국내로 들여오려 했으나 현재까지 유해를 찾지 못하였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