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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사38

[러시아사] - 키예프 루시의 전성기를 이끈 블라디미르와 야로슬라프, Ярослав Владимирович Мудрый 키예프 루시의 전성기를 이끈 블라디미르와 야로슬라프 키예프의 4대 대공 스뱌토슬라프가 원정 도중 드네프르강 급류에서 페네체크족에 의해서 살해당하자 키예프에는 새로운 지도자가 필요했다. 스바토슬라프의 세 형제중 장자 야로폴크가 정권을 잡았으나 곧 막내인 블라디미르가 정권을 잡고 키예프를 통치했다. 980년경 부터 키예프를 통치하기 시작한 블라디미르는 전임자들과 같은 방향으로 키예프 루시를 이끌었다. 블라디미르는 1015년까지 키예프 루시를 통치하였는데 그 기간 동안 중요한 발전 몇 가지를 이루었다. 첫째로 블라디미르는 후계자 내전으로 혼란에 빠진 키예프 루시를 재정비하여 국내 질서를 바로잡았다. 이어서 키예프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동 슬라브족을 다시 굴복시켜 영향력 하에 넣었다. 또한 키예프 루시의 영토를.. 2023. 11. 27.
러시아사 연표 (2023.11.18. 제작) [러시아사] 서론 - 러시아 이전의 러시아에 대하여 [러시아사] - 러시아 이전의 러시아 - 선사시대와 이민족의 침입 [러시아사] - 하자르국 (하자르왕국) [러시아사]- 동슬라브족 (10세기 전후) [러시아사] - 키예프루시의 등장(10세기) [러시아사] - 키예프루시의 확립(10세기-스뱌토슬라프) [러시아사] - 키예프루시의 전성기와 블라디미르 [러시아사] - 키예프의 쇠퇴와 몰락 [러시아사] - 분령시기: 타타르의 멍에 [러시아사] - 분령시기 노브고로드공국 [러시아사] - 모스크바의 등장 [러시아사] - 이반 사후와 쿨리코보 전투 [러시아사] - 몽골의 반격과 러시아의 독립 [러시아사] - 이반 3세와 러시아의 통일 [러시아사] - 러시아 통합이후 대외정벌과 차르 [러시아사] - 이반 3세의 러시.. 2023. 11. 18.
[러시아사] - 민족주의와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공화국의 시대 [러시아사] - 민족주의와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공화국의 시대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에도 각지에서 일어나는 민족주의적 독립투쟁과 경제정책 파행으로 소비에트 내부의 상황은 파국을 향하고 있었다. 고르바초프 집권 초기의 낙관론과 희망적인 메세지는 모두 사라진 상태였고, 대중의 열광이 난국을 타개할 것이라는 고르바초프의 희망이 무색하게 상황은 악화되었다. 러시아의 경제상황은 악화일로를 걷고있었다. 소비에트 시민은 물질문명적 측면에서 매우 궁핍해졌다. 1990년 무렵에는 산업쇠퇴와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경제가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소비품 부족사태로 인해 상점에는 긴 줄이 생겼고, 기근에 대한 우려까지 불거졌다. 1990년 봄, 우랄과 시베리아, 우크라이나 광부들이 파업을 일으켰다. 그들은 물질적인 .. 2023. 4. 22.
[러시아사] - 고르바초프의 등장과 소비에트, 러시아의 개혁과 쿠테타 [러시아사] - 고르바초프의 등장과 소비에트, 러시아의 개혁과 쿠테타 1985년 소비에트의 지도자로 등장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소비에트가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당시 소비에트와 동유럽에서 전개되던 사건들은 소비에트 지도부는 물론이고 모든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를 실망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소비에트 경제의 낮은 경제성장률은 비판론과 결부되어 그에게 사회 개혁의 의무를 수행하게 만들었다. 고르바초프는 서기장에 임명되었을 때 우선 소비에트 내외에 산적한 문제들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면서 위기에 대응하고자 했다. 소비에트에 산적한 문제는 우선 낮은 경제성장률, 생활수준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 암울한 농업 상황, 제조업의 질 하략, 과학 기술분야에서 세계의 발전 수준에 뒤떨어지기 시작한 것, 국.. 2023. 4. 22.
[러시아사] - 프라하의 봄과 아프가니스탄 침공, 소비에트의 폭력적 대응 2 [러시아사] - 프라하의 봄과 아프가니스탄 침공, 소비에트의 폭력적 대응 2 동유럽의 문제는 끊임없이 불거져나왔다. 헝가리 혁명을 진압한 후 12년간 소비에트는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제도적 다양성과 이데올로기적 다양성을 가진 공산주의 다원주의를 용인하려했다. 그러나 이는 동유럽 여러 국가들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현상을 포괄하지는 못했다. 1968년 프라하에서는 “프라하의 봄"이라 불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체코,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은 경기침체에 시달리고 있었다. 프라하의 봄은 이러한 경제침체를 해결할 것을 요구하는 개혁요구, 민주화 요구 운동이었다. 프라하의 봄에 의해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권력독점을 포기한다고 말했고, 경제 수정주의와 민주주의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동.. 2023. 4. 21.
[러시아사] - 폴란드와 헝가리의 혁명, 소비에트의 폭력적 대응 [러시아사] - 폴란드와 헝가리의 혁명, 소비에트의 폭력적 대응 1956년은 소비에트에게 있어 놀란만한 해였다. 스탈린 치하에서는 허용되지 않았던 티토와 유고슬라비아의 노선은 오류를 낳았고, 스탈린의 후임자인 후르쇼프와 불가닌은 이 오류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위해 베오그라드를 방문했다. 이러한 부드러운 정책에 반대했던 외교장관 몰로토프는 셰필로프로 교체되었다. 흐루쇼프의 베오그라드 방문과 더불어 그가 했던 1956년의 2월 연설은 동유럽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모스크바가 스탈린의 오류와 범죄를 인정한 것은 체제 개혁을 위한 요구를 허락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동시에 폴란드와 헝가리에서 변혁을 요구하는 시위가 격렬하게 터져나왔다. 폴란드에선 1956년 6월 하순경에 노동자들이 포즈난 시의 거리로 쏟아져.. 2023. 4. 17.
[러시아사] - 스탈린 사후 소비에트의 대외관계와 냉전: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창설 [러시아사] - 스탈린 사후 소비에트의 대외관계와 냉전: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창설 스탈리의 사망 이후 그의 후계자들이 소비에트를 맡으면서 대외정책은 훨씬 더 미묘하고 복잡해졌다. 스탈린 당시의 관점인 세계가 노동자의 적으로 가득 찼다고 보는 관점은 점차 “차이점의 연속체(a continuum of difference)"이라는 개념으로 대체되었다. 각 국가간의 사이의 이해관계와 입장이 폭넓게 다르다는 점을 인정할 뿐 아니라, 일부의 차이점은 소비에트 이익에 반하지 않으면 이를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어느정도 인정의 한계를 지녔지만, 소비에트 블록내에서 견해의 차이를 관용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는 자본주의와 소비에트가 공존할 수 있고, 전쟁 없이 이 차이점을 해결할 수 있다는 미래를 제시했다. 물론 .. 2023. 4. 15.
[러시아사] - 흐루쇼프의 실각과 새로운 통치자 브레즈네프 [러시아사] - 흐루쇼프의 실각과 새로운 통치자 브레즈네프 여러모로 짧았던 흐루쇼프의 통치기간은 오랜 혁명 정치사의 정점이었다 흐루쇼프는 국내외적으로 자신의 통치 방향을 ‘사회주의 사회 건설'로 잡았고, 그의 후계자들은 그와는 다른 정치적 방향성을 보여주었다. 흐루쇼프가 개혁과 변덕스러운 캠페인을 보여주었다면 후계자들은 혁명이 아닌 질서를 바라며 통치했다. 1964년 새롭게 구성된 소비에트의 집단지도부는 브레즈네즈를 필두로 구성되었으며, 1917년 이후 성년이 된 최초의 세대였다. 이들은 혁명 당시에는 어린아이였고, 대부분 기술교육을 받았다. 모든 지도자들은 대숙청을 통해 당의 고위직으로 진입했고 빠르게 승진했다. 대체적으로 그들은 안정된 권력과 효율적인 경제 발전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실용적인 인물들이.. 2023. 4. 12.
[러시아사] - 스탈린 이후의 소련, 스탈린의 죽음과 흐루쇼프의 등장, 크렘린의 권력투쟁 [러시아사] - 스탈린 이후의 소련, 스탈린의 죽음과 흐루쇼프의 등장, 크렘린의 권력투쟁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은 1953년 3월 5일 사망하였다. 그의 공식적인 사망원인은 뇌졸중이었다. 스탈린의 죽음 이후에 크렘린은 3일간 침묵을 지켰으며, 결국 독재자의 서거를 발표하였을 때 새로운 지도부는 인민들의 통합과 단결을 강조하며 자신들이 국가를 통치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선언했다. 여기서 말렌코프가 등장하여 가장 중요한 직책인 당 서기장직과 수장자리를 겸임하였다. 말렌코프 다음으로는 베리야와 몰로토프가 그 다음 순서를 차지하여 독재자가 죽고 난뒤 소련의 삼두체제를 구성했다. 그러나 이러한 삼두체제는 오래가지 않았다. 3월 준순이 되자 말렌코프는 당의 최고위층이긴 하지만, 당 서기장식을 사임한다고 발표하였다. 당.. 2023. 4. 11.
[러시아사] - 소비에트 러시아의 전후 경제 재건과 변화 [러시아사] - 소비에트 러시아의 전후 경제 재건과 변화 제 2차 세계대전의 피해를 복구하고 소비에트의 경제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스탈린과 당국자들은 다시 5개년 계획이라는 카드를 꺼내들었다. 4차 5개년 계획은 앞선 5개년 계획들과 비슷한 형식으로 짜여졌다. 총투자 금액의 85%를 중공업에 투자하고 특히나 석탄과 전력, 철, 강재, 목재, 시멘트 등에 투자되었다. 독일인들이 황폐화 시키고 떠난 러시아 땅에 다시 복구 작업이 개시되었다. 4차 5개년 계획은 독일과 추축국에게서 얻은 배상금으로 진행되었다. 1947년의 경우 소비에트 러시아로 들어온 많은 수입품들은 동유럽과 러시아 관할 독일 지역에서 들여왔다. 이들은 자원은 물론이고 점령지에 존재하던 공장마저 해체하여 소비에트 러시아로 들여왔고, 그.. 2023. 1. 28.
[러시아사] - 제 2차 세계대전과 소비에트 러시아의 피해 [러시아사] - 제 2차 세계대전과 소비에트 러시아의 피해 소비에트 러시아는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엄청난 인명 손실과 물질적인 피해를 입었다. 러시아 전역에서 적군 수백만명이 사망했을 뿐 아니라, 수백만명의 민간인 역시 이리저리 바뀌는 전선과 독일군의 연이은 침공에 희생되었다. 러시아의 희생자 수는 계속해서 추산되고 있는데 최근의 수치는 약 2,500만명에 달했다. 소비에트의 시민들은 노동자로, 전쟁 포로로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서 죽어갔다. 나치는 동부전선에서 영토 합병을 위한 전멸작전을 펼쳤기에 대량 총살과 집단 처형장으로 주민을 보내는 일은 흔하게 일어났다. 게다가 그 모든 시련을 겪고 살아났다 하더라도 생존자들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입었다. 전쟁은 러시아에 있어 비극적인 인적 손실이었다... 2023. 1. 23.
[러시아사] - 소비에트 연방과 제 2차 세계대전: 소비에트 적군의 반격과 베를린 진격 [러시아사] - 소비에트 연방과 제 2차 세계대전: 소비에트 적군의 반격과 베를린 진격 1943년 여름 독일군의 공격이 소강상태에 들어서자 소비에트 적군은 다시 반격을 시작했다. 적군은 세력을 규합해서 침입자들을 영토에서 몰아내고 결국에는 부다페스트, 빈, 프라하, 베를린까지 진격했다. 적군의 진격은 수도 베를린을 점령하고 전쟁이 끝날때까지 이루어졌다. 적군의 압도적인 승리는 독일군의 전력이 모두 소진되었기에 가능했다. 독일군의 탄약과 물자는 사실상 소진되었고 인력구성 역시 독일인이 아닌 루마니아 인이 크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지휘권을 가져간 히틀러는 계속해서 실수를 저질렀다. 너무 늦은 시기까지 후퇴를 허락하지 않았고 제때 지휘가 전선에 도착하지 않았다. 소비에트 적군은 여전히 막대한 손실을 입으면서 .. 2023.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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