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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사

[중앙아시아사] - 흉노 제국의 대 한나라 전쟁

by Timemapcatographer 2021.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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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사] - 흉노 제국의  대 한나라 전쟁

흉노와 한나라 무제가 참여한 흉노-한 전쟁은 중국 측의 일방적인 기록만이 남아 전하고 있다. 유목민족의 특성상 이러한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흉노는 전형적인 유목국가로 글로 역사를 남기는 일에 매우 미숙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오로지 중국측의 기록에만 의존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중국 사서를 기준으로 역사를 살펴볼 수 밖에 없는데, 이를 인식하지 않고 사료 그대로의 역사를 받아들이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한 고조 유방이 흉노 때문에 고생을 한 이후 한 무제는 흉노에 대하여 칼을 갈고있었다. 흉노를 공격하기 위해 무제는 기원전 139년 장건을 서역으로 파견한다. 이는 흉노의 후방을 공격할 세력을 찾는 이유이기도 했다. 동맹을 찾아 흉노의 후방을 공격케 하는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장건이 떠난 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기원전 133년 흉노의 선우를 함정에 빠트려 시해하고자 한다. 한무제는 마읍이라는 변경에 한나라 군 30만을 배치하고 흉노군주 선우를 유인하려하였다. 그러나 중간에 정보가 누설되었다. 이에 흉노선우는 분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장성 내부의 변경마을 상곡을 약탈하였다. 그러자 이에 무제는 군사를 일으켜서 기원전 129년 흉노에 대한 전면전을 개시하였다.

 

한 무제

한 무제는 장수들 중 이청과 이광을 출격시켰고 흉노 역시 군사를 동원하였다. 대군과 정양, 상군등에 각각 3만명의 기병을 동원하여 침략했다. 기원전 127년에 한나라의 위청은 운중에서 서쪽으로 진군하여 농서에서 흉노의 제후인 누번왕과 백양왕을 격파하여 군을 설치한다. 한이 그곳에 삭방군을 설치하고 곧바로 삭방성을 축조하기 시작하자 흉노의 우현왕이 이곳을 탈환하기 위하여 공격한다. 이에 한의 응원군인 위청이 기원전 124년 10만의 군세를 이끌고 우현왕을 급습한다. 이때 한은 상당히 큰 전과를 올렸으나, 이듬해인 기원전 123년의 출정에서는 군세가 불리하여 흉노에서 한나라로 항복해온 조신이 다시 흉노로 돌아가는 상황까지 일어나게된다. 

장건의 서역 원정

다시 흉노로 돌아간 조신은 한동안 한나라 안에서 생활하였으므로 한나라의 군사현황을 파악하여, 흉노의 선우에게 전략적 조언을 진언한다. 그 내용은 흉노의 거점을 고비사막의 북쪽으로 옮길 것이었다. 막북으로 근거지를 옮기면 한나라의 군대가 고비 사막 너머의 초원까지 진출하기에는 거리가 멀고 보병 중심의 기동력으로는 한계에 닿을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기원전 121년 위청과 곽거병은 다시 각각 5만의 군대를 이끌고 흉노를 공격한다. 한무제는 막북이라고 하여도, 만단위에 이르는 대군을 고비사막 너머까지 진출시켰다. 이들을 통해 흉노에게 군사적인 위협을 가했지만, 흉노 세력을 완전히 봉쇄하는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리고 한무제는 북쪽의 흉노뿐 아니라 서쪽으로도 군사를 보냈다. 그 이후 기원전 123년 이후로는 군사력 또한 보내어 군사적인 지배를 실시했다. 한나라의 곽거병은 농서와 연지산을 지나 약 천리를 행군하여 흉노의 지배층인 왕들을 공격하였으며 흉노 휴도왕의 옥새인 제천금인을 노획했다. 

흉노의 벨트버클 유물

그러나 한나라의 무력적 시도들은 흉노의 세력을 완벽하게 제거하지 못했다. 곧 무리한 전쟁으로 인해 한나라의 국력은 한계를 드러냈다. 흉노와 한의 전쟁은 기원전 89년 무제가 군사적 원정(외정)을 멈추고 내치에 힘쓰겠다는 ‘윤대의 조’를 내림으로써 결국 막을 내렸다. 흉노와의 굴욕적인 관계를 재정립하고자 했던 무제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흉노는 비록 거점을 옮기게 되어 고비 사막 이북으로 세력권이 후퇴하고 하서회랑 지역도 잃었지만, 결국에는 한의 피해가 더 막심하였다. 두 나라 모두 극심한 소모전에 의해 국력만 상실하였으며, 흉노와 한의 전쟁은 일방적인 패자도, 승자도 없는 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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