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 신군부와 전두환의 정권 장악과 몰락, 6월항쟁과 민주화
육사 11기 출신 전두환은 5.16 쿠테타 당시 국가혁명위원회에 가담하고 자신의 후배인 육사생도들의 쿠테타 지지 퍼레이드를 조직하여 박정희의 눈에 들었다. 그는 박정희의 비호아래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에 참여하여 그 지도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전두환은 박정희의 군사독재에 적극 협력한 인사로 1976년에는 대통령경호실 작전차장보, 1979년에는 육군본부 보안사령관으로 재직했다. 거기에 10.26사태 직후에는 합동수사본부장이 되어 김재규를 구속하고 수사를 주도하였다. 그리고 육군참모총장을 김재규의 협력자라는 구실로 체포한 12.12사태까지 일으키면서 군부를 장악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그는 박정희의 비호아래 커온 군부독재정부의 그림자였으며 자신의 권력을 이어나가기 위해 쿠테타를 일으킨 반민주적 행위자라는 것이다.
전두환의 군부장악에 1980년 봄 대학생들의 민주화 요구시위가 빗발쳤다. 이를 서울의 봄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서울에서 있었던 대학생들의 민주화 요구는 전두환 및 군부세력이 발령한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로 인하여 무참히 짓밟혔다. 광주에서도 민주화 요구 시위가 있었으나 군부는 공수부대를 동원하여 계엄군을 조직해 광주 시민을 무참히 학살하였다. 광주에서 있었던 계엄군의 시민학살은 지금도 여전히 상처로 남아있으며 1년 후인 81년에 전두환 정부는 국풍 81과 같은 문화행사를 기획하며 광주 민주화 운동의 상흔을 국민에게서 지우려는시도를 하였다.
광주 민주화 항쟁을 공수부대의 군화발로 짓밟은 신군부는 정권 장악과 집권을 위한 과정을 차례로 밟아나갔다. 먼저 전두환을 위원장으로 하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전두환을 전면에 내세우고 정치적 반대세력을 제거하였다. 또한 사회정화를 구실로 삼청교육대 등을 활용해 집권에 장애가 되는 요인들을 모두 제거했다. 이어서 설치된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는 대통령 선거를 선거인단의 간접선거로 하고 사회와 노동, 언론 법을 개정하여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을 탄압하였다. 헌법이 개정됨에 따라 전두환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제 5공화국이 설립되었다.
5공화국은 전반적으로 사회전체를 억압하였다. 강압적인 통제와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 만들어진 어려 법률은 정권에 저항하는 세력을 억누르는 도구로 활용되었다. 동시에 사람들의 관심을 다른데로 돌리는 우민화 정책도 추진되었다. 이른바 3S 정책으로 불리는데, 대중의 이목을 정치가 아닌 다른곳으로 돌려서 집권에 유리하도록 하는 방식이었고, 1981년에는 여의도에서 국풍81이라는 대규모 대중 예술제를 열고, 컬러 텔레비전을 방송하고 미스 유니버시아드 대회를 유치한 것이 바로 우민화 정책의 일환이었다.
동시에 프로 스포츠도 도입하였고, 국민의 일상생활과 관련된 규제도 완화했다. 야간통행 금지가 해제되고 학생들의 머리모양과 교복이 자율화 되었다. 해외여행 자유화도 이때였다. 이러한 조치는 정권의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해서였으나 결과적으로는 국민들의 일상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국민을 탄압한다는 기조는 유지되었기 때문에 1987년 1월 4일 일어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에 의해 군부 독재는 점점 끝을 보이기 시작한다.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1987년의 6월 항쟁은 그간 억눌렸던 민주화에 대한 요구이자 거부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다. 결국 1987년 6월 29일 민주화 선언을 발표하여 대통령 직선제 실시를 약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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