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사] - 흉노 선우들의 대립과 2차 분열
호한야 선우와 그의 형 질지의 분열을 흉노의 1차 분열로 본다면 한번 더 분열하게 된다. 이를 흉노의 2차 분열이라고 한다. 앞선 1차 분열에서는 호한야 선우를 동흉노, 그의 형 질지를 서흉노로 분류한다면 2차 분열에서는 남과 북으로 나뉘어 분열하게 된다.
기원전후를 전후해 한나라의 왕망정권이 곧 무너지고 나서 곧바로 후한이 들어서게된다. 한나라의 정권 교체기를 틈타 흉노는 한나라의 북쪽 변경을 공격하고 이를 통해 군사적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이에 국가가 성립한지 얼마 되지 않은 후한은 군사를 일으킬 여력이 없었으므로 되도록이면 흉노와의 화친을 통해서 그들이 원하는 경제적으로 이득을 주고 군사적인 갈등을 문제를 해결코자 했다. 그러나 흉노는 지속적으로 군사를 보내어 후한의 변경을 공격하였다. 후한은 흉노의 군사적 공격에 수비군으로 막아내는 소극적인 방어책을 시행하였다. 그러던 와중에 흉노가 2차 분열을 하며 상황이 변하였다.
이번에도 흉노가 분열하게 된 원인은 흉노의 지도자인 선우자리를 놓고 벌어지는 계승전쟁이었다. 기원전 31년 호한야가 사망한 뒤 그의 두 부인에게서 출생한 자식들이 차례로 계승하다가 ‘여’라는 인물이 '호도이시도고 선우'가 되어 무려 28년간 통치하였다. 그 다음 계승자는 선우의 동생이자 왕소군의 아들인 ‘지아사’에게 왕위가 돌아가야 했지만 호도이시도고 선우는 이러한 계승 순위를 깨버리고 자신의 이복동생을 살해했다. 그 후 후계자로 자신의 아들을 세웠다.
흉노에서 70년 이상 지속된 형제 계승을 선우가 깨버리자, 그 다음 세대의 연장자였던 일축왕 비가 선우의 조치에 반발하였다. 일축왕은 48년 휘하의 병사 4만을 이끌고 중국에 투항하여 흉노의 지도를 바쳤다. 지도를 바친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이는 후한과 흉노의 관계를 급변하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했다.
일축왕은 자신의 할아버지인 호한야가 일찍이 한에 신하를 칭했으니 자신도 조부를 따르고자 한다며 스스로 호한야 선우를 칭했다. 그렇게 흉노는 2차로 분열하여 호도이시도고 선우의 북흉노와 일축왕(2대 호한야 선우)의 남흉노로 나뉘어졌다. 북 흉노에는 호도이시도고 선우가 남 흉노에는 호한야 선우가 들어서게 되었다.
남 흉노는 처음에는 오원 서부의 변경 밖 80리 되는 곳에 자신들의 근거지를 마련하였으나 북 흉노의 계속되는 위협에 곧 현재 내몽골 준거얼치에 해당하는 서하 미직으로 호한야 선우의 근거지를 옮겼다. 그렇게 남흉노의 부민들은 서로는 삭방에서 동으로는 대군까지 동서 1000여리에 걸쳐 분포하게 되었다.
남흉노는 한나라의 국경안에 들어와 생활하면서 신하를 칭하고 공물과 질자를 보내는등 한나라에 완전히 속한것 처럼 보였다. 그러나 한나라의 풍습을 따르기 보다는 여전히 부족연맹체적 성격을 지녔다. 게다가 흉노 고유의 관제도 보존하고 있었다. 따라서 남흉노는 한나라에 편입되었다기 보다는 관제와 습속을 유지한 속국의 형태로 존속한 것으로 보인다.
남흉노는 21대 호주천선우까지 대를 이어 유지하다가 후한 말기인 3세기 초 조조는 남흉노의 커져가는 세력을 제어하기 위해서 남흉노를 5부로 나누어서 분치하며 직할지로 편입되어 왕조는 사라진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흉노가 북중국에 자리잡고 세력을 넓혀가는 신호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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