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 청을 일으키려했던 무술개혁과 새로운 시련, 의화단운동
중국이 자강운동을 일으키며 혁신을 꾀할때, 일본 역시 메이지 유신을 통해서 국력을 키우기 시작하면서 청과 일본은 점차 긴장을 더해가고 있었다. 긴장 속의 중일 관계는 마침내 청일전쟁으로 폭발하였다. 청일전쟁은 사실 청나라 전체의 국력이 투사된 전쟁은 아니었다. 당시 북양대신 이홍장 소속 북양군대와 일본의 총동원령에 의해 모인 군대가 맞붙은 군대였다. 이 전쟁에서 참패를 당한 청조는 일본과의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배상금을 물어내야 했다. 은 2억냥과 조선에서의 영향력, 대만을 일본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당시 청 군대의 패배는 청의 관료와 사대부들은 믿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아시아의 호랑이가 위성국인 일본에게 패하고, 동시에 유럽열강이 중국의 땅에 들어오면서 망국의 위기가 코 앞에 닥치게 된 것이었다.
상황이 절박해지자 청조에서는 위로부터의 변혁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려는 개혁론이 대두되었다. 이것을 정치운동으로 발전시킨 사람은 강유위였다. 그는 1895년 4월 과거를 위해 북경에 모인 수험생을 이끌어 개혁을 주청하였다. 그는 유교를 재해석하여 공자를 그 중심에 위치시키고, 기독교처럼 종교화하려는 개혁론을 펼쳤다. 그의 개혁론은 부국강병과, 인재 등용, 의원개설 등을 주장하면서 황제권력에 의존해 국정을 쇄신하고 관려, 신사층을 지지세력으로 동원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는 양계초 등 동료와 함께 학회설립과 신문, 잡지등을 발행해 사상과 언론활동에 집중하였다.
이러한 개혁운동은 1898년 광서제가 강유위의 주장에 따라 시행한 것이 바로 변법자강운동이다. 무술개혁, 백일개혁으로도 불린다. 광서제의 백일개혁은 실업진흥, 군제개혁, 과거개혁, 학당설립 등을 목표로 삼았으나 개혁파가 주도권을 잡은 호남성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보수파와 실권자인 서태후의 존재는 개혁이 진행되는데 큰 걸림돌이 되었다. 광서제는 이러한 서태후를 견제하기 위해서 위안 스카이에게 친위군을 창설하여 맡기고자 하였으나, 위안 스카이는 이를 보수파 서태후에게 밀고하였다. 결국 변법반대 쿠테타가 일어나게 되고 변법자강운동은 좌절되었다. 이러한 개혁파와 보수파의 대립은 이후 서태후가 광서제를 유폐시키는 무술정변으로 귀결되었다. 개혁파의 거두 강유위와 양계초는 일본으로 망명했고 무술 6군자 처형에서 볼 수 있듯이 개혁파는 격한 탄압을 받았다.
한편 중국과의 조약에서 얻은 특권을 바탕으로 서구열강의 침략은 더욱 거세져갔다. 특히 기독교는 적극적인 선교활동으로 신자 수를 확보해나갔다. 그러나 일부 개종한 기독교도와 일반 비신도사이의 종교적 문화적 차이는 필연적으로 심각한 적대 의식과 충돌을 낳기 시작했다.
이런 배경에서 19세기 말엽 강화된 열강의 이권 획득 경쟁은 청의 하층민으로부터 모든 불행의 원인은 서양의 진출에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1900년의 의화단 운동은 민중의 반서양 기조가 나타난 것이다. 의화단은 대체로 화북 농촌의 하층 민중에 의해 조직된 향촌 자위집단인 권회에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의화단은 반기독교운동을 계기로 청조를 도와 서양 귀신을 몰아내자는 부청멸양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이들은 마을의 교회를 습격하고 선교사와 교민을 공격했다. 또한 철도나 학교 등 서양에서 들어온 모든 것들을 파괴하는 활동을 벌였다. 이들은 자신들은 비밀결사이며 법술을 통해 자신들이 도검과 총포에도 부상을 입지 않는다는 무모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산동성에서 시작된 의화단 운동은 물론 청조의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이것은 결과적으로 의화단 운동을 중국 북부지역에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00년 봄과 여름에는 의화단 운동이 절정을 맞이하였다. 의화단은 중국 북부지역 천진과 북경으로 진출하였다. 보수파 권력자였던 서태후는 의화단의 반서양 감정을 이용하여 열강에 맞서려하였다. 서태후는 이들을 믿고 열강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러나 열강은 즉시 8개국 연합군을 꾸려 천진에 상륙하였다. 결국 8개국 연합군은 북경을 공격하여 점령하였고, 서태후는 광서제를 끌고 서안으로 도피하였다. 전쟁의 시작과 동시에 의화단은 8개국 연합군에 쓸려나가듯 사라졌다. 의화단은 칼과 창으로 무장한 조직되지 않은 민병대에 불과했다. 그에 반해 8개국 연합군은 잘 조직된 군대와 신식무기, 보급까지 받는 근대식 군대였다. 이들은 베이징을 점령하고 청의 문화재와 보물을 약탈하였다. 1901년 승리국인 8개국 연합은 청조와 신축조약을 체결했다. 청에게는 또다시 4억 5천만냥이라는 거액의 배상금이 부과되었다. 서태후의 어리석은 선택은 다시금 청을 구렁텅이로 몰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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