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한국사65 [조선사] -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치와 이양선 출몰, 조선의 개항 서세동점의 시기인 19세기, 조선은 위기를 맞고 있었다. 조선은 내부적으로는 세도 정치의 폐단으로 조세제도가 흔들리며 삼정의 문란이 일어나고, 무능한 지배세력으로 대표되는 양반에 대항하여 농민의 봉기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때 이미 중국은 아편전쟁에서 패배하고 개항된 상태였으며, 아시아의 무력적 정도를 알게 된 서구 열강 세력이 동쪽으로 눈을 돌려 조선에 접근해오기 시작했다. 이때 집권하기 시작한 흥선대원군은 격변기를 헤쳐나가야 할 정치적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조대비와 일부 척족 세력의 지지를 기반으로 고종의 즉위와 함께 수렴청정을 통해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정권을 장악한 뒤 고종을 위해 실추된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적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만의 개혁정치를 실시하였다. 흥선대원군.. 2023. 2. 8. [조선사] - 조선의 성리학 이념과 붕당 정치의 시작 [조선사] - 조선의 성리학 이념과 붕당 정치의 시작 조선은 신진사대부들의 백성을 위한다는 위민 정치라는 성리학 이념 아래 건국되었다. 하지만 조선 초기 정치는 사뭇 달랐다. 조선초의 정치는 실용적인 것을 중시하는 훈구파 공훈세력이 주도하였기 때문이다. 사림세력은 조선의 건국에 회의적이었던 고려의 온건개혁파들이 고향으로 내려가 은둔하면서 지낸 세력이다. 훈구 공신 세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특권 세력화 되었고, 조선 성종은 이들을 견제하고 성리학적 이상 사회를 건립하고자 사림 세력을 등용하였다. 고려의 온건개혁파의 후예인 사림은 향촌의 중소 지주라는 경제적 기반과 상대적으로 우월한 도덕성을 기반으로 훈구파를 비롯한 기존 기득권 세력을 비판하였는데 이러한 갈등으로 인하여 사림들이 대거 정계에서 숙청당하는 사건.. 2023. 2. 7. [조선사] - 세도정치의 등장과 흥선대원군의 개혁 [조선사] - 세도정치의 등장과 흥선대원군의 개혁 조선은 성리학을 기반으로 세워졌다. 성리학에서 말하는 세도정치(世道)란 학식과 덕망이 있는 사람이 세상의 올바른 도를 책임지는 정치를 말한다. 그러나 사회의 모순이 반복해 쌓인 19세기 조선의 상황에서는 뜻이 달리 쓰인다. 정조의 둘째인 이공이 11세의 어린나이로 23대 군주로 즉위하는 1800년부터, 헌종 ~ 철종대까지 약 60년에 걸쳐 시행된 세도정치는 부정하게 세력을 휘둘렀다는 의미에서 기세 勢를 사용하여 세도정치(勢道)라고 부른다. 정조가 갑작스레 승하하면서 순조는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아야했고, 이는 외척과 세도 가문이 정계를 장악하는 시발점이 된다. 이 시기의 세도 정치는 안동김씨와 풍양 조씨 등 노론 출신의 외척 가문들 정치를 주도하고 여기.. 2023. 2. 6. [조선사] -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만주족의 흥기와 조선의 시련 [조선사] -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만주족의 흥기와 조선의 시련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조선과 명이 전쟁에 국력을 쏟아 붓는 사이 만주에 위치한 여진족은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본디 만주지역은 명의 관리하에 있었는데 명은 산해관 너머 여진에 대한 통제를 풀 수 밖에 없었고, 조선 역시도 전쟁으로 인한 여파로 내부수습이 급해 여진족에 신경쓸 수 없었다. 건주여진의 추장인 누르하치가 여진 세력을 통일하고 금나라를 이어받는다는 뜻에서 후금을 건국했다. 후금은 1115년에 있었던 완안부 아골타의 금나라의 후계를 잇는 다는 명분으로 붙인 국호였다. 명은 후금이 건국되자 즉시 견제를 시작하였다. 만주로 병력을 출병시켰고 여진족을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인 조선에게도 출병을 요청했다. 그러나 조선의 임금 광해군은 상황.. 2023. 2. 5. [조선사] -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조선의 의병들 [조선사] -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조선의 의병들 조선이 건국되고 약 200년동안 동북아시아의 정세는 평화로웠다. 조선 건국 초기에 명과 북원이 대치하던 상황은 명이 중원을 차지하면서 명의 승리로 끝났다. 15세기에 비교적 평화롭게 교류하던 조선과 일본은 16세기에 들어 갈등이 심화되었다. 일본은 조선에 더 많은 무역을 요구하였고, 조선은 이를 거절하고 무역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던 것이다. 이에 일본인들은 무역을 요구하며 삼포왜란, 을묘 왜변과 같은 변란을 일으켰다. 일본의 요구에 조선은 비변사를 설치하며 일본의 정세를 살폈다. 동시에 국방을 강화하자는 10만 양병설 등이 주장되었으나 이는 붕당간의 견해차이와 예산 등의 문제로 실현되지는 않았다. 한편 일본에서는 전국시대가 종료되었다. 100년간의 전국시.. 2023. 2. 4. [조선사] - 세종대의 영토 개척, 4군 6진과 쓰시마 정벌 조선 건국 초기 동아시아 정세는 급변하고 있었다. 명은 원을 중원에서 몰아냈지만, 여전히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고, 북원은 몽골 초원에서 강대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조선은 건국과 동시에 피폐해진 군사력을 재건하여 수많은 침략으로 무너진 방어선을 구축하고자 했다. 다행히 원과 명의 갈등으로 조선 북쪽의 땅에 대해서는 영향력이 미치지 않았기에 조선은 이 땅의 여진족을 회유 또는 공격하였다. 조선은 북쪽으로는 4군과 6진을 개척하였다. 국경선이 강을 기준으로 할때 외적의 침입을 가장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기에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의 경계로 삼고자 북진해 요새이자 근거지를 조성한 것이다. 조선 태조인 이성계는 동북면 출신으로 고려말부터 동북면의 여진족을 평정하여 두만강 하류지역을 조선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2023. 2. 3. [조선사] - 조선 건국과 1, 2차 왕자의 난, 태종 이방원의 즉위 [조선사] - 조선 건국과 1, 2차 왕자의 난, 태종 이방원의 즉위 이성계는 우왕이 지시한 요동 정벌을 수행하기 위해 출정하다 압록강의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려 개경을 향해 진격했다. 이성계가 개경을 점령하고 군권과 정권을 장악한 뒤 권문세족의 경제기반인 토지를 박탈하기 위해 과전법을 실시하였다. 급진적 토지개혁으로 인해서 고려 왕조의 기득권 세력은 경제기반을 잃고 실각했고, 그 과정에서 혁명에 반대하던 정몽주와 온건 개혁파도 숙청되었다. 1392년 7월 17일 이성계는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으로부터 왕위를 선양 받았다. 이성계는 즉위 사실을 명에 알리고 제도를 공표했다. 명으로부터 화신과 조선 중 어떤 것을 국호로 할지 물은 뒤 국호를 조선으로 하여 태조 2년에 반포하였다. 3년에는 한양을 새로운 .. 2023. 2. 2. [고려사] - 고려의 멸망과 위화도 회군, 역성혁명과 이성계 [고려사] - 고려의 멸망과 위화도 회군, 역성혁명과 이성계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하고 반원정책을 추진하던 공민왕이 신돈의 실각 이후 환관에 의해 시해되었다. 고려 조정은 큰 혼란에 빠졌으나, 정계의 실력자인 이인임은 재빨리 우왕을 즉위시키고 고려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공민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우왕은 당시 10세에 즉위한 실권이 없는 어린 왕에 불과했다. 실질적인 권력과 국정운영은 최영, 경복흥 등 홍건적과 왜구를 물리친 무장세력에 의해 진행되었다. 이들이 무신정권 때 처럼 권력을 휘두른 것은 아니나 조정의 신흥세력으로 떠올랐고, 당시 공민왕의 발탁으로 권문세족의 대항마로 떠오르던 신진사대부들은 이들이 집권하는 것을 좌시하지 않았다. 이인임은 그동안 공민왕이 추진해 오던 친명 외교정책을 버리고 단절.. 2023. 2. 1. [고려사] - 고려 공민왕의 반원정책과 홍건적, 왜구의 침략 [고려사] - 고려 공민왕의 반원정책과 홍건적, 왜구의 침략 몽골의 부마국이 된 고려는 사회적으로 누적되어 온 모순에 휩싸여 있었다. 이를 개혁으로 바로잡고자 했지만 고려 국왕이 자신의 위치에서 개혁을 통해 사회와 정치를 바로잡으려고 하면 원이 압력을 행사하여 그 노력을 무위로 되돌렸다. 충자로 시작하던 고려의 국왕들 다음 즉위한 공민왕은 원이 고려의 국정에 직접적으로 간섭하는 것을 배제하기 위해서 정치개혁을 서둘렀다. 공민왕은 자주성을 회복하고 권문세족을 위시한 부원세력을 축출하기 위해 본격적인 반원정책을 취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반원정책이 추진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우선 몽골이 약해진 것이 첫번째 이유이다. 14세기에 들어서며 마니불교에 심취한 원이 국력이 쇠약해지고 한족들이 원에 대해 저항을 시작하.. 2023. 1. 31. [고려사] - 고려와 부원세력 권문세족, 일본정벌 [한국사] - 고려와 부원세력 권문세족, 일본정벌 1270년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천도한 고려는 원의 부마국이 되었다. 무신정권을 끝낸 국왕은 스스로 국정을 운영하였다. 원이 직접적으로 고려를 통치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다루가치를 보내어 고려에 간섭하였고, 원은 필요할 때마다 고려왕을 교체할 수 있었다. 또한 고려의 국왕은 어릴 때 원에서 자라야했고, 원 황실의 공주와 결혼해야했다. 이로써 원이 영위하는 국제질서에 고려는 편입되었고, 부마국의 위치에서 그 질서에 순응하였다. 충렬왕에서 공민왕에 이르기까지 총 일곱명의 고려왕이 원간섭기에 즉위하고 폐위되었다. 원 간섭기에 고려 왕실의 호칭과 관제도 모두 원나라식으로 바뀌었다. 고려 국왕의 묘호에는 조종의 예를 올리지 못했고, 첫자는 충성할 충자를 써서 원에 .. 2023. 1. 30. [고려사] - 삼별초의 대몽항쟁과 제주도 항전 [고려사] - 삼별초의 대몽항쟁과 제주도 항전 삼별초는 진도에서 여몽연합군을 맞아 용장성에서 패배하였다. 상징으로 내세운 승화후 왕온은 물론 삼별초의 지휘관 배중손도 진도에서 전사하였다. 김통정은 살아남은 병력을 수습하여 제주도로 향하였다. 제주도는 삼별초군이 진도에 들어온 해인 고려 원종 11년인 1270년 11월 개경에서 파견된 관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해 확보한 지역이다. 진도에서 들어온 삼별초군은 김통정의 지휘아래 제주의 방어시설을 구축하면서 잃어버린 제해권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고려사 권 27에는 삼별초가 제주에 들어가 내성과 외성을 쌓은 뒤, 그 성을 믿고 더욱 창궐하여 수시로 나와 노략질 한다고 서술해두었다. 삼별초는 진도를 잃고 제주도를 최후 거점 삼아 여몽연합군에 대항하려 했던 것으로 .. 2023. 1. 27. [고려사] - 삼별초의 대몽항쟁과 진도 용장성 전투 [고려사] - 삼별초의 대몽항쟁과 진도, 제주에서의 전투 마지막 무신정권의 권력자였던 임유무가 몽골의 군사적 지원을 받은 고려 원종에 의해 살해되면서 고려 조정은 개경으로의 환도를 준비한다. 그러나 강화도 대몽항쟁의 주역이었던 삼별초들은 몽골에게 보복 받을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 개경으로의 환도를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삼별초는 본디 좌별초, 우별초로 구성된 야별초에 신의군이 더해져 3개의 별초로 구성된 군대로 최우 집권기에 나타나 대몽항쟁의 선두에서 활약하였다. 최항 집권기에 창설된 신의군은 몽골에 붙잡혔다 돌아온 이들로 구성된 부대였다. 삼별초는 반몽적 성격이 강했으며 당시 고려의 가장 최선봉에 있는 정예부대였다. 이들의 명부가 왕에게 압수당한 상황에서 몽골군에 넘어간다면 보복을 감수해야만 했다. .. 2023. 1. 26. 이전 1 2 3 4 5 6 다음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