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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66

[독립민수] - 안중근의 삶과 독립운동, 하얼빈 의거와 대한의군 참모중장이라 주장한 이유. 안중근은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로, 대한의 독립을 위하여 일생을 바친 독립운동가다. 1. 독립운동 투신 이전 안중근(安重根) 선생은 어릴적부터 골격이 튼튼하고, 사격에 능하여 무골로 불렸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황해도에 이주하여 거주하였는데, 안중근도 황해도에서 출생하여 활동하였다. 안태훈과 동학농민운동 당시의 일로 친분이 있던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안중근에 대해 총을 잘 쏘는 청년으로 묘사하였다. 당시 김구는 안중근보다 3살이 많았으며, 동학의 접주로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하였고, 안중근은 동학군에 반하는 자경단을 이끌어 박석골 전투 등에서 활약하였다. 일찍이 천주교에 영향으로 진남포에서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하는 등 교육사업에 투신하였으나, 1907년 8월 서울에서 대.. 2022. 12. 21.
[독립민수] - 건국훈장과 독립운동가들 HTML 삽입 미리보기할 수 없는 소스 [독립민수] - 건국훈장과 독립운동가들 훈격 설명 3.1절이나 광복절에 독립유공자들에게 표창을 주는 장면 한번쯤 보셨을 겁니다. 여기서 언급되는 애국장? 애족장?이 무엇인지 알고 계신가요? 오늘은 독립유공자들께서 서훈받는 건국훈장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서훈을 주는 이유 3.1절과 광복절에 시상되는 훈장을 건국훈장이라고 합니다. 사실 건국훈장은 독립운동가만 받는 것은 아닌데요. 건국훈장은 대한민국의 건국에 공로가 뚜렷하거나, 국가의 기초를 공고히 하는 데에 이바지한 공적이 뚜렷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훈장입니다. 등급에 따라 5가지 훈격을 나누고 공로에 따라 1949년부터 시상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장, 대통령장, 독립장, 애국장, 애족장으로 나누어지는데 .. 2022. 12. 18.
[독립민수] - 독립군들이 대한의 독립을 위해 사용한 무기:소총 HTML 삽입 미리보기할 수 없는 소스 오늘은 독립군 이야기로 돌아왔습니다. 독립군들은 대한의 독립을 꿈꾸면서 만주와 간도에서 무기를 들고 젊음을 불태우셨죠. 독립군들은 다양한 종류의 소총을 사용했습니다. 국가와 같은 중앙 군수물자 공급체계가 없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겠죠. 그래서 독립군은 각 단체마다 다른 다양한 루트를 통해서 소총을 입수했고 사용했습니다. 독립군들이 사용한 소총을 알아보겠습니다. 러시아제 모신-나강 소총 독립운동가들이 사용한 소총들 중 상당수의 소총은 모신나강 소총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모신나강은 러시아의 총기제작자 모신과 벨기에 총기제작자 나강의 이름을 딴 소총입니다. 러시아 제국이 1891년 육군 제식 총기로 채택한 볼트액션 소총입니다. 러시아 제국은 1905년 러일전쟁과 세계 .. 2022. 12. 17.
[한국사] - 고구려 당나라 전쟁과 안시성 / 고당전쟁 / 수당전쟁 [한국사] - 고구려 당나라 전쟁과 안시성 / 고당전쟁 / 수당전쟁 고구려 정벌에 나라의 국운을 걸었던 수나라가 멸망하고 그 뒤를 이어서 당나라가 중원의 패자 등장했다. 당은 고조 이연이 618년 건국하였고, 그 이후 잠시동안 혼란해진 정국을 다스리고 내치에 신경을 쓰느라 동아시아에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고구려 역시 수와의 전쟁으로 소모한 막대한 국력을 회복하기 위해 당과의 친선관계에 돌입했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하다가 망한 걸 직접 목도한 당 역시 고구려를 무조건 적대시 한다는 것은 망국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당 태종이 즉위하면서 상황은 급변하였다. 당 내부에서 일어난 군사적인 움직임을 모두 평정한 당태종은 북에서 호시탐탐 중국을 노리는 동돌궐까지 복속시켰다. 또한 서.. 2022. 12. 14.
[한국사] - 고구려와 수나라 전쟁, 수의 멸망 / 고수전쟁 / 수당전쟁 [한국사] - 고구려와 수나라 전쟁, 수의 멸망 / 고수전쟁 / 수당전쟁 신라가 백제를 배신하고 한강유역을 차지하면서 한반도 남쪽에서는 고구려, 신라, 백제의 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그 사이 중국에서는 불열되어 있던 5호 16국의 시대가 끝나고 유목민의 후손인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였다. 수나라는 589년에 전국을 통일하고 군사력을 이용하여 대외적으로 팽창하기 시작하였다. 수나라는 고비사막 이북에서 중원을 향해 압박하던 돌궐을 여러차례 정벌하고 이간책까지 사용하여 돌궐을 동돌궐과 서돌궐로 분리시켜 약화시켰다. 강성하던 돌궐의 세력이 분열되며 약해지자 수나라는 이번에는 기수를 돌려 북쪽이 아닌 동쪽의 국가 고구려를 약화시키려 하였다. 중원을 차지한 패자가 중원 근처 거대세력을 정복하는 일은 매우 당연한.. 2022. 12. 8.
[조선사] - 광해군의 즉위와 인조반정, 폐모살제의 뜻 [조선사] - 광해군의 즉위와 인조반정, 폐모살제의 뜻 광해군은 1575년 선조와 후궁 공빈 김씨의 사이에서 둘째 서자로 탄생하였다. 선비의 정비인 의인왕후가 슬하에 자녀가 없었고, 장남이자 동복형인 임해군이 있었지만 그는 포악한 성정으로 인해서 왕이 될 재목이 되지 못했다. 또한 인빈 김씨의 소생인 의안군, 신성군 모두 일찍 요절하여 광해군의 왕위 계승서열을 능가하는 사람은 없었다. 선조의 적자 영창대군이 있었으나 그는 나이가 어렸고, 당시 임진왜란이라는 특수상황에서 분조 활동까지 거치며 산전수전을 다 겪은 광해의 왕위계승을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임진왜란 발발 이후 선조는 파천과 동시에 평양에서 광해를 세자에 책봉하였다. 그리고 선조와 함께 의주로 피난하다가 영변에서 갈라졌다. 광해는 평안도, 강원도.. 2022. 11. 28.
[한국사] - 신라의 발전과 부흥, 진흥왕의 영토확장 [한국사] - 신라의 발전과 부흥, 진흥왕의 영토확장 신라는 삼국시대를 이루는 고구려, 백제보다 전성기가 늦었다. 한반도 남쪽에 위치한 탓에 중국과의 교류가 적었고, 삼국 중 가장 발전이 뒤떨어졌던 신라는 6세기에 접어들면서 발전의 기반을 다져나갔다. 6세기 초 무렵 지증왕 때에는 우경을 실시하며 농업생산이 크게 늘어났다. 농기구가 개량되고, 소를 농사에 사용하는 우경이 본격화 되면서 생산량이 증대되었고, 또한 귀족들의 무분별한 순장을 금지하면서 노동력의 무의미한 손실이 적어졌다. 또한 지증왕대에 국호 신라를 정식으로 사용하였으며 대군주를 뜻하던 마립간이라는 칭호 역시 중국식 칭호를 받아들여 왕(王)으로 바꾸었다. 지증왕이 고대국가 신라의 기틀을 세웠다면 그 다음 왕인 법흥왕은 국가 내적인 체제를 완비하.. 2022. 11. 26.
[한국사] - 사로국의 등장과 신라의 건국, 발전 [한국사] - 사로국의 등장과 신라의 건국, 발전 사로국은 훗날 삼국중 하나로 발전하는 신라의 옛 이름으로 한반도 동남부에 위치한 경주 평야를 중심으로 발전한 진한의 소국 12국중 하나이다. 신라는 석, 박, 김 3성의 시조설화에서 나타나듯이 여러 세력 집단이 연합해 건국한 국가이다. 신라의 건국 설화에 따르면 사로국에 살던 6촌의 우두머리들이 하늘에서 내려 온 박혁거세를 왕으로 받들어 건국한 나라라고 한다. 여기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마와 난생설화가 추가된다. 이 사항은 신라는 박혁거세라는 외부의 세력이 기존 토착세력인 사로국 6촌과 함께 연합하여 건국한 나라라는 사실을 알게해준다. 신라에 이주한 외부세력인 이주민들은 철제 도구를 다를 줄 알았고, 이들이 가진 문화는 토착세력에 큰 영향을 주었고 지배 .. 2022. 11. 26.
[한국사] - 백제의 천도와 쇠락, 웅진시대와 사비시대 백제는 국가의 정비가 대략적으로 마무리되는 4세기에 백제는 관등제를 확충하고, 왕위계승도 부자상속으로 바꾸어 위계를 공고히 했다. 그러나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4세기 후반, 5세기 초반에 확충된 군사력으로 남방정책을 추진하자 백제는 급속히 쇠락하였다. 그러다가 475년 지금의 위례성을 빼앗기고 웅진으로 도읍을 천도할 수 밖에 없었다. 백제의 웅진천도는 고구려의 한성점령에 의해 단시간에 이루어진 급작스러운 천도였다. 이러한 웅진천도의 배경에는 당시 개로왕대 백제에서는 무모한 권력행사로 백제 지도층 분열이 원인였다. 게다가 백제가 고구려와 북위를 둘러싸고 펼친 외교전에서 실패한 것이 주효했다. 백제의 개로왕은 472년 북위에 고구려를 공격할 원군을 요청하였는데 이러한 백제의 외교는 고구려를 자극하는 결과를 낳.. 2022. 11. 7.
[한국사] - 백제의 전성기 [한국사] - 백제의 전성기 백제는 8대 고이왕대를 거쳐 4세기 근초고왕 때에 전성기를 맞이하여 영토를 크게 확장시켰다. 고이왕은 백제의 체제를 정비하고 중앙집권에 힘써 백제의 기틀을 잡고 발전을 이끌었다. 이러한 백제의 성장은 고이왕 이후의 왕들인 책계왕, 분서왕, 계왕으로 이어지며 이들의 노력은 13대 근초고왕대에 이르러 대대적인 정복사업으로 나타났다. 근초고왕은 동쪽 낙동강 유역과 전라도, 지리산 일대에서 가야의 소국을 정복하고 영산강 유역의 마한 소국들을 정복했다. 가야를 흡수하므로 인해 영토를 남해안까지 확대하였다. 당시 전라도 지역은 여전히 마한의 전통을 가진 소국들이 존재하고 있었고, 백제의 중앙집권 체제에 들어오지 않은 소국이 산재하고 있었다. 이곳에 근초고왕은 대외팽창을 통해 백제의 영향.. 2022. 10. 6.
[한국사] - 백제의 성립과 마한 백제의 지배층은 고구려에서 기원한다. 본디 마한은 목지국을 수장으로 소국들이 모인 연맹체였으나, 백제가 마한내에서 영향력을 넓히면서 목지국은 마한 수장의 자리를 내어놓게 되었다. 훗날 마한을 장악하는 백제는 고구려 남쪽 마한지역 소국에서부터 출발하였다. 청동기 시대부터 한반도 북방에서 수 많은 유이민이 남쪽으로 내려왔다. 그들 중 고구려에서 내려온 유이민들 중 일부가 한강 유역에 내려와 세운 나라가 백제이다. 백제의 건국 신화에 따르면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왕자가 고구려로 와 태자가 되자, 고구려 태생인 왕자 비류와 온조가 고구려에서는 더 태자가 되지 못함을 알고 세력을 이끌고 내려와 각각 미추홀과 위레에 자리잡았다고 한다. 미추홀에 자리를 잡은 비류의 세력은 차후에 온조의 백제.. 2022. 9. 29.
[한국사] - 가야 제국(諸國)의 성립과 쇠락 [한국사] - 가야 제국(諸國)의 성립과 쇠락 가야는 낙동강 서쪽 지방의 여섯 개의 연맹체로 건국되었다. 낙동강 서안은 작은 분지지형이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지형으로 구성되어 커다란 세력이 나타나기 어려웠다. 낙동강의 동쪽은 사로국, 즉 신라가 발흥하고 있었다. 가야의 건국 설화에는 가야 아홉 마을의 우두머리들이 무리를 이끌고 구지봉에 올라가 구지가를 부르면서 하늘에서 내려온 황금알을 얻었다고 한다. 그 알에서 여섯 아이가 태어났고 그들이 자라 가야를 다스리는 왕이 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가야 연맹체의 6가야 수장을 의미하는 존재였다. 6가야 중 가장 먼저 국력을 키운 것은 김해의 금관가야였다. 낙동강 유역의 하류 충적평야에서 농경문화를 기반으로 발달한 금관가야는 낙랑군, 왜의 교역의 중간지이자 중심지가 .. 2022.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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