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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65

[고려사] - 몽골의 침략과 강화도에서의 대몽 항쟁 [고려사] - 몽골의 침략과 강화도에서의 대몽 항쟁 몽골이 고려에 접촉한 것은 고려가 강동성에 있는 거란의 병력을 공격하기 위해 공동작전을 펼친 때이다. 1219년 고려는 몽골 병력과 함께 거란의 병력을 공격했고, 이때부터 몽골은 만주에서 거란이 갖고있던 위치를 차지하였다. 동시에 몽골은 고려에 공물을 요구하면서 고려와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권력이 거란에서 몽골로 옮겨과는 과도기에 고려에 공물을 요구하던 몽골의 사신 저고여가 돌아가는 길에 압록강변에서 살해당했다. 압록강변에는 거란의 잔당, 여진족, 고려, 몽골 등 다양한 민족이 산재하는 곳으로 어떤 세력이 저고여를 피살했는지 정확하지 않았다. 그러나 몽골은 이를 고려의 소행으로 단정하고, 1231년 고려를 침략했다. 몽골은 고려를 침략하여 중원정벌 전.. 2023. 1. 25.
[고려사] - 고려 무신정권의 등장과 각지의 민란 [고려사] - 고려 무신정권의 등장과 각지의 민란 안정된 고려사회에서 문벌귀족의 모순성이 쌓여가자 결국 갈등이 폭발했다. 문벌귀족들은 고려의 모든 관직을 독점하고 권력을 휘둘러왔으나 결국 무신들이 일으킨 정변에 의해 몰락의 길을 걸었다. 무신의 난은 1170년 8월 고려 의종이 보현원에 행차한 틈을 타 무신인 정중부, 이고, 이의방 등 무신들이 쌓여있던 불만을 폭발시키면서 시작되었다. 무신들은 정변을 일으키면서 문신들을 닥치는대로 죽이면서 고려의 권력을 장악하였다. 무신의 난 직후 반란 주도자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 이고와 이의방이 제거되었다. 바로 정중부가 권력을 잡았으나 계속된 내분으로 권력자가 바뀌었다. 정중부 다음에는 경대승, 이의민등이 차례로 권력을 잡았다. 이들은 일관된 정국 운영 능력이나 정.. 2023. 1. 22.
[고려사] -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이 일어난 고려의 내분과 문벌귀족의 등장 [한국사] -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이 일어난 고려의 내분과 문벌귀족의 등장 여진과의 격렬한 전쟁 끝에 고려가 금에 군신관계를 받아들이자 이후 고려 사회는 천천히 안정되어 갔다. 여진은 고려와의 화친을 잘 이행했고, 고려릐 북방은 안정되었다. 그리고 안정 속에서 고려의 최고 지배층인 문벌귀족이 형성되었다. 문벌귀족은 고려 특유의 제도인 과거제와 음서제도를 통해 관직을 독점하고 정치권력을 장악했다. 문벌귀족 중에서도 유력 가문들은 혼인관계를 통해서 기반을 공고히 했으며 폐쇄적 특권층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막대한 권력을 이용해 불법적으로 개인이나 국가의 토지를 자신이 사유화 하였다. 수많은 자유 농민들이 노비로 전락하였으며 땅 또한 이들에게 흡수되었다. 이때 문벌귀족들은 섬을 소유하기도 했으며 섬에서 가축.. 2023. 1. 21.
[고려사] - 천리장성과 여진정벌, 아골타와 금의 등장 [고려사] - 천리장성과 여진정벌, 아골타와 금의 등장 거란과의 전쟁을 통해 강동 6주를 완전히 영토화한 고려는 북쪽에서의 침입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이에 고려는 거란과의 전쟁이 끝나자 북방의 침입에 대비해 장성을 쌓기 시작했다. 이를 천리장성 또는 고려장성이라고 한다. 천리장성은 흥화진 압록강에서 시작해서 동해한 함주(함흥) 까지 연결되었다. 천리장성으로 불린 장성은 덕종 2년인 1033년부터 평장사 유소를 책임자로 하여 건설을 시작해 정종 10년인 1044년에 완성하였다. 이에 거란은 반발하였으나 덕종과 정종은 끝까지 밀어붙여 건설하였다. 천리장성 동북 방면에는 여진족이 세력을 이루며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숙신과 말갈에서 내려온 생여진 계통의 종족이었다. 여진족은 지금의 한반도 함경도는 물론이고, .. 2023. 1. 19.
[독립민수] - 독립군이 사용한 권총들 [독립민수] - 독립군이 사용한 권총들 독립군은 다양한 종류의 권총을 사용했습니다. 마우저, 콜트, 브로우닝 등 다양한 제조사의 권총이 운용되었는데 이 권총들은 주로 유럽에서 제조되었고, 독립군 장교들이 사용하였습니다. 독립군이 다뤘던 권총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마우저 권총 독일의 총기제작사 마우저에서 생산된 권총입니다. 우리가 살펴볼 모델은 C96 모델입니다. 이 모델은 러시아의 레닌이 홍범도 장군에게 선물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박스형 탄창은 당시 매우 비쌌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조금 특이한 고정형 탄창을 쓰고 있습니다. 권총집을 활용해서 개머리판처럼 사용했기 때문에 매우 특이했습니다. 홍범도 장군의 남은 사진에서 이 권총집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음은 마우저의 M.. 2023. 1. 18.
[고려사] - 고려의 고구려 계승의식과 북진정책, 거란과 전쟁 (1~3차 여요전쟁) [고려사] - 고려의 고구려 계승의식과 북진정책, 거란과 전쟁 (1~3차 여요전쟁) 고려는 국호에서 보여지듯 건국 초부터 고구려를 계승을 표방했다. 이는 적극적인 북진 정책을 국조로 삼는 기반이 되었다. 이에 따라 지금의 평양인 서경을 중시하고, 평양을 기반으로 하여 청천강 이북으로 영토를 확대하려하였다. 그러나 고려의 북진 정책은 발해를 멸망시키고 만주 일대에서 세력을 영유하던 거란에게는 무시할수 없는 도전이었다. 두 나라의 대립은 곧 갈등으로 나타났다. 거란은 스스로를 키타이라고 부르는 유목 민족이다. 거란은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져있었는데, 당에 복속하였다. 그러던 중 당 말기의 혼란기에 질랄부에서 야율아보기라는 걸출한 리더가 나와 부족을 통일하며 거대 세력을 형성하였다. 또한 서쪽의 탕구트와 동쪽의.. 2023. 1. 17.
[고려사] - 고려의 민족통일과 고려 초 정세, 발해의 멸망 [고려사] - 고려의 민족통일과 고려 초 정세, 발해의 멸망 신라가 힘을 잃은 뒤 후삼국 시대가 열리자 상황은 후백제에 비해 고려에게 우세하게 돌아갔다. 930년 고창 전투에 이어서 934년 운주전투에서 후백제군은 고려군에게 패배하면서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갔다. 후백제 왕실 내부에서도 갈등이 일어났다. 견훤이 넷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면서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났다. 시간이 갈수록 상황은 더 고려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동시에 926년 거란에게 멸망한 발해의 세자 대광현이 유민을 이끌고 고려에 투항하면서 고려는 발해까지 아우르게 되었다. 또한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내부의 분열로 큰아들 신검에게 피체되어 있다가 탈출하여 결국 숙적이던 고려에 의탁하였다. 나라를 세운 견훤이 상징성이 있었던 만큼.. 2023. 1. 14.
[한국사] - 후삼국시대의 시작과 왕건의 등장 [한국사] - 후삼국시대의 시작과 왕건의 등장 9세기 들어 신라는 하대라고 불리는 쇠락의 시기가 시작된다. 중앙의 지배력이 미치는 곳은 오직 경주 일대에 국한되었고 그곳을 벗어난 각 지방에서는 농민 봉기와 지방 호족들의 할거로 인하여 신라는 더 이상 국가라고 부를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곳곳에서 일어난 반란 세력들 중 체계적인 조직을 정비한 곳은 견훤과 궁예였다. 이들은 각지에 산재하는 호족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그렇게 모인 호족들을 기반으로 체계적인 세력을 형성했고 결국에는 국가체제를 세웠다. 지금의 전라도를 기반으로 성장한 견훤은 무진주에서 농민 반란군을 흡수하여 자신의 세력을 형성했고, 곡창지대인 완산주 지역으로 도읍을 옮겨 900년에는 나라를 세우고 후백제를.. 2023. 1. 12.
[한국사] - 통일신라의 전성기와 쇠락, 호족과 후삼국시대의 시작 [한국사] - 통일신라의 전성기와 쇠락, 호족과 후삼국시대의 시작 진흥왕 이후 국력을 키워 29대 무열왕 대에 삼한일통을 이뤄낸 신라는 8세기 중엽 경덕왕 대까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평화와 번영, 안정을 누렸다. 그러나 8세기가 지나면서 천천히 국가의 기강이 무너지고 이른바 "신라 하대"로 부르는 시기로 진입했다. 경주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에서는 귀족간의 권력 쟁탈이 일어나 분열하기 시작했으며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성장하여 새로운 형태로 영지화 하여 주민에 대한 직접 지배를 시작했다. 신라 하대의 사회는 통일을 이룩한 태종 무열왕의 직계 자손들이 왕권을 강력하게 휘두르던 절대왕권이 무너지고 난 상태였으므로 이후 신라의 37대 왕인 선덕왕이 죽으면서 왕위 계승을 두고 다시 분쟁이 일었다. 36대 왕인 혜.. 2023. 1. 6.
[한국사] - 발해의 건국과 남북국시대의 시작 [한국사] - 발해의 건국과 남북국시대의 시작 나당동맹을 맺은 당과 신라의 공격으로 668년 고구려는 멸망의 길을 걷는다. 이후 나라를 잃은 유민들은 각지로 흩어졌다. 자신의 부족에 속해있던 이들은 각자도생의 길로 들어섰고, 676년 이후 고구려의 옛 지역은 몇 부분으로 나뉘면서 고구려의 옛 영토는 이리저리 찢겨졌다. 대동강 이남 지역은 나당 전쟁 이후 신라가 확보하였다. 당과 인접한 북쪽 요동지역은 당에 귀속되었다. 그 밖에 만주 중부와 동부와 한반도 북부 지역은 영역상 당에 속하긴 했지만 거리가 멀고 관리가 어려운 탓에 상대적으로 당나라의 간섭이 덜했다. 이 만주 지역에서 말갈족이 당의 억압적인 통치에 반발하여 봉기하였다. 이들이 봉기하면서 요서지역에서 당의 권위는 크게 위협받기 시작했고, 그때를 틈.. 2023. 1. 1.
[한국사] - 삼국 통일전쟁과 신라, 나당전쟁의 승리와 통일신라 [한국사] - 삼국 통일전쟁과 신라, 나당전쟁의 승리와 삼국통일 6세기에 들어오면서 고구려, 신라, 백제 3국간의 전쟁은 계속되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7세기에 접어들면서 전쟁상황이 급박하게 전개되었다. 642년에 새로이 즉위한 백제의 의자왕은 신라를 공격하여 국경의 성 40여 곳과 대성인 대야성까지 함락시켰다. 또한 주변의 작은 성들을 함락하여 고구려와 신라의 지속적인 압박에 쇠퇴해가던 백제의 전성기를 찾는듯 했다. 이에 신라의 김춘추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고구려의 평양성에 방문하여 대막리지 연개소문을 알현하였다. 신라는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서 고구려와 일시적인 동맹을 맺고자 하였는데, 고구려가 동맹의 대가로 한강유역을 요구하자 협상은 결렬되었다. 고구려와의 동맹 실패로 고구려 남부전선에서 신.. 2022. 12. 29.
[독립민수] - 안중근의 삶과 독립운동, 하얼빈 의거와 대한의군 참모중장이라 주장한 이유. 안중근은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로, 대한의 독립을 위하여 일생을 바친 독립운동가다. 1. 독립운동 투신 이전 안중근(安重根) 선생은 어릴적부터 골격이 튼튼하고, 사격에 능하여 무골로 불렸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황해도에 이주하여 거주하였는데, 안중근도 황해도에서 출생하여 활동하였다. 안태훈과 동학농민운동 당시의 일로 친분이 있던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안중근에 대해 총을 잘 쏘는 청년으로 묘사하였다. 당시 김구는 안중근보다 3살이 많았으며, 동학의 접주로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하였고, 안중근은 동학군에 반하는 자경단을 이끌어 박석골 전투 등에서 활약하였다. 일찍이 천주교에 영향으로 진남포에서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하는 등 교육사업에 투신하였으나, 1907년 8월 서울에서 대.. 2022. 1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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