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한국사65 [독립운동사] - 1920년대 민족운동: 6.10만세운동과 광주학생운동, 민족유일당 운동과 신간회 [독립운동사] - 1920년대 민족운동: 6.10만세운동과 광주학생운동 1920년대 일제의 문화통치가 진행되면서 국내에서는 민족교육의 열기와 그에 따른 민족적 고양감이 고취되기 시작하였다. 고종이 승하할 때 일어났던 3.1운동과 마찬가지로 1920년대 민족운동의 열기가 뜨겁게 이어지던 때 승하한 순종황제로 인해 다시 만세운동의 열기가 분출되었다. 1926년 4월 26일 순종황제가 서거하자 국내의 청년들이 모여 새로운 만세운동을 조직하고 시위준비를 시작했다. 순종황제의 인산일인 6월 10일 행렬이 다가왔고, 당일 창덕궁에서 종로를 지나 동대문에 이르는 길에 수많은 애도 인파로 가득 찼다. 연희전문, 중앙고보, 경성대학 등의 학생 조직과 천도교에서 동원된 청년들은 인산 행렬이 지나가는 도중에 길목마다 격문을.. 2023. 3. 7. [근대사] - 일제의 문화통치와 1920년대 국내 민족운동, 계몽운동의 전개 [근대사] - 일제의 문화통치와 1920년대 국내 민족운동, 계몽운동의 전개 1919년 고종의 인산일에 일어난 3.1운동으로 인해 조선총독부는 기존의 폭력적인 무단통치로는 조선을 효과적으로, 지속적으로 통치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2대 총독인 하세가와는 3.1운동을 폭력적으로 억압했다가 결국 3년만에 교체되었고, 3대 총독인 사이토 마코토가 취임하였다. 이들은 효율적인 식민지 경영을 위하여 무조건 억압하는 것이 능사라는 것이 아님을 알고 조선인들의 권리를 일부 인정하면서 민족적 활동도 일부 인정하였다. 이른바 ‘문화통치'의 시작이다. 이에 따라서 국내에서는 청년회와 교육 진흥 운동이 점차 일어나기 시작했다. 3.1운동 이후 전국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청년운동은 풍속 개량과 생활 개선 등의 운동으로.. 2023. 3. 6. [근대사] - 일제의 폭력적 무단통치와 경제침탈 [근대사] - 일제의 폭력적 무단통치와 경제침탈 일제는 1905년 을사조약을 통해서 보호국화하고, 1910년 대한제국을 불법적으로 점령하여 일본의 식민지로 삼았다. 한국을 불법적이며 강제로 병합한 일본은 우선 설치되어있던 통감부를 조선총독부로 격상시키고 현직 육군대장중에서 총독을 임명하여 관할케 하였다. 조선 총독은 행정권뿐 아니라 법령의 제정, 관리임명, 군대 통수권, 재판소 감독권 등 식민지 안에서라면 왕과 같은 무소불위의 권위를 가지고 권력을 행사하였다. 총독은 이러한 권력을 바탕으로 실질적인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관리를 일본인으로 채우고, 전국의 지배채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행정조직을 정비하였다. 아울러 일제는 군대와 경찰력을 동원해 강압적인 통치를 진행했다. 산간 오지까지 헌병 분견소와 순사 파출.. 2023. 3. 5. [독립운동사] - 3·1 운동의 배경과 과정, 결과 [독립운동사] - 3·1 운동의 배경과 과정, 결과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 일어난 거국적, 거족적 독립만세운동이다. 전국에서 계층을 불문하고 전개된 3·1운동은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일대의 사건이었다. 3·1운동을 통해 대한의 정신과 독립에 대한 의지가 살아있음을 만방에 떨쳐보였고, 그 결과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설립될 수 있었다. 나아가 일제에게 기존의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통치 방법을 바꾸게 할 만큼 큰 사건이었다. 1. 3·1운동의 배경 1910년 일제의 대한제국 강제병합 이후 한국의 의병과 열사들은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무단통치를 표방하면서 민족적 탄압을 가했고, 점차 국내에서는 독립운동이 힘들어졌다. 대한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국외에 거점을 마련하고 독립운동.. 2023. 2. 28. [독립운동사] - 애국계몽단체의 국권수호운동 전개 / 신민회 / 국채보상운동 [독립운동사] - 애국계몽단체의 국권수호운동 전개 / 신민회 / 국채보상운동 1905년 을사조약을 전후하여 대한제국의 개화된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대중을 계몽시켜 실력 양성운동을 펼쳐야 한다는 의식이 확장되었다. 이들은 국가의 힘을 올리려면 대중이 깨어나야한다고 생각했고, 대한제국 곳곳에서는 계몽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졌다. 이들은 교육과 산업을 일으켜 실력을 길러 국권을 회복하는 길이 일제의 간섭을 뿌리칠 수 있는 가장 빠른 독립의 길이라 생각하였다. 계몽운동가들은 1904년 일제가 한국 내 황무지 개척권을 구실로 토지를 약탈하려하자 이들은 이것을 막기 위해 보안회를 조직하였다. 보안회는 이미 일제의 영향력에 들어간 정부가 할 수 없는 일제의 토지약탈에 저항했다. 또한 1905년 조직된 헌정연구회는 이준이 .. 2023. 2. 27. [독립운동사] -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조선의 의병 항쟁, 을미의병 / 을사의병 / 정미의병 [독립운동사] -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조선의 의병 항쟁, 을미의병 / 을사의병 / 정미의병 일제는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삼기위해 다양한 형태의 침략을 전개해왔다. 경제적 침략, 정치적 침략을 병행하여 대한제국의 숨통을 조여왔다. 여기에 불법적으로 무력을 동원하여 대한제국의 숨통을 조여왔다. 이러한 일제의 침략에 대해 대한제국의 민중은 다양한 형태로 저항하였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직접적이고 강력한 민중의 저항은 의병활동이었다. 일제의 무력에 대항하는 민중의 움직임은 의병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무력 저항은 1895년 을미년에 처음으로 나타났다. 을미년에 일어난 항일 의병은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대한 반발로 일어났다. 을미의병은 양반 유생들을 필두로 국모를 시해한 일본인들을 응징하고, 양반이 가졌던 성리학적 .. 2023. 2. 26. [독립민수] - 독립군이 사용한 기관총과 수류탄들 HTML 삽입 미리보기할 수 없는 소스 오늘은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할 때 사용한 기관총과 수류탄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독립군은 일본군에 비해 소수였기에 치고 빠지는 유격전에 특화되어 있었고 타국에서 힘들게 생활하는지라 물자부족과 무기부족에 시달렸습니다.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열정은 있었지만, 강력한 화력의 무기를 보유하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무기의 가격도 문제였지만 돈이 있다 하더라도 무기는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지요. 강한 화력을 가진 기관총과 수류탄은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독립군은 무기의 수와 질, 화력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소수지만 기관총을 구비해 운용했습니다. 그러나 기관총은 운용했지만 어떤 종류의 기관총을 사용했는지 기록에 남은 것은 일부에 불과합니다. 일제 기록에는 몇정의 .. 2023. 2. 16. [근대사] - 러일전쟁과 일제의 국권침탈, 을사조약과 군대해산 [근대사] - 러일전쟁과 일제의 국권침탈, 을사조약과 군대해산 대한제국이 성립되고 광무개혁이 진행되었으나, 한반도를 둘러싼 일본과 러시아의 대립은 갈수록 심해지고 날카로워졌다. 제국주의 열강은 자신들의 실익에 따라서 러시아와 일본의 편에 서서 서로를 지지했다. 프랑스와 독일은 러시아의 편을 들었고, 영국과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점차 팽창하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 편에 가담하였다. 특히 미국은 일본에게 조선의 영향력을 인정하는 대신 필리핀에서의 영향력을 상호 확증받았다. 이를 가쓰라 태프트 밀약이라고 한다. 영국의 경우 1902년 영일동맹을 맺고 가장 먼저 일본의 조선침략을 인정하였다. 영국과 미국의 동의 아래 일본의 국권침탈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일본은 한반도에서 영향력을 넓히고 있던 러시아를 .. 2023. 2. 13. [근대사] -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대한제국의 성립과 독립협회의 불법화 [근대사] -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대한제국의 성립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두고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서 일어난 러일전쟁 승리 이후 일본은 1894년 조선에서 갑오개혁을 시행했다. 압도적인 무력을 가진 일본을 등에 업은 개화파에 의해 정권에서 물러난 명성왕후는 일본을 견제할 목적으로 러시아를 등에 업고 다시 권력을 가지려고 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에 반발하여 명성왕후를 암살할 계획을 꾸민다. 일본은 1895년 10월 8일 정부세력이 아닌 지금의 폭력배에 해당하는 낭인들을 동원하여 밤에 경복궁으로 침입, 명성왕후를 시해한다. 이를 을미사변이라고 한다. 이는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의 지휘아래 이루어진 것으로, 일왕의 결재가 한 보고서가 2005년에 발견되기도 하였다. 을미사변이 일어난 이후 고종은 자.. 2023. 2. 12. [조선사] - 조선 내부의 갈등과 개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조선사] - 조선 내부의 갈등과 개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조일수호조약 체결 이후 조선정부는 근대적인 서양문물을 도입하기 위해서 개화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외교와 통상, 군사업무를 추진하는 개화 추진기구를 설치하고 별기군이라는 신식군대를 설치하여 서양의 앞선 무기와 군사기술을 배우려 했다. 또한 청과 일본의 근대적 문물을 보고 배우기 위하여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강화도 조약 직후 수신사를 보내고, 그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개화파를 위시하여 조사 시찰단을 편성해 일본으로 파견했다. 이들은 4개월에 이르는 시간동안 일본의 산업과 사회를 살펴보고 귀국하였다. 조선의 개화정책은 흥선대원군이 주장하던 기존의 척화에서 돌아선 것으로 최초의 개화정책이라는 점은 높이 평가 할 만 하다. 그러나 조선의 개화는 봉건적.. 2023. 2. 11. [조선사] - 조선 후기 사회와 동학농민운동, 동학과 전봉준 [조선사] - 조선 후기 사회와 동학농민운동, 동학과 전봉준 조선 후기에 들어서자 국가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세제도는 극도로 문란해졌다. 세금을 걷는게 아닌 수탈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정도로 삼정의 문란, 황구징수 등이 남발되었고, 어지러운 조세제도는 대원군 집권 이후, 개항을 한 이후에도 바로잡히지 않았다. 부패한 관리와 아전들의 수탈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한편 조선이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개항을 시작한 이후, 조선 사회 곳곳으로 들어와 활동하던 청과 일본의 상인들은 농민들의 생활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한 원인이었다. 조청수륙무역장정 이후 청 상인들은 내륙을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었고, 청에서 생산된 물건을 조선에 들여왔다. 조선에서 이와 관련된 산업을 하던 수공업자들은 몰락의 길을 걸어야 했다... 2023. 2. 10. [조선사] - 강화도 조약과 개항, 불평등조약의 시작 [조선사] - 강화도 조약과 개항, 불평등조약의 시작 1873년 서양과 통상을 반대하면서 척화비까지 세우던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조선의 정권은 고종이 손에 쥐게 되었다. 그러나 고종은 완전하게 왕권을 바로 세우지 못했고 왕비의 인척인 민씨 일가가 정국을 주도하는 형식이었다. 흥선대원군의 개혁을 부정하고 권력을 잡은 민씨세력은 척화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결국은 외국에 통상요구에 조선의 문을 열어야 한다는 주장에 관심을 돌렸다. 척화에 목숨걸던 대원군 정권이 무너지자 조선보다 훨씬 앞서서 개항한 일본은 조선을 자신들이 당했던 방식 그대로 개항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조선에 자국 군함 운요호를 파견하였다. 일본에서 출발한 운요호는 부산에서 영흥만에 이르는 동해안의 해로를 측량하고 강화도 초지진에서 함포사.. 2023. 2. 9. 이전 1 2 3 4 5 6 다음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