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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 조선 후기 사회와 동학농민운동, 동학과 전봉준 [조선사] - 조선 후기 사회와 동학농민운동, 동학과 전봉준 조선 후기에 들어서자 국가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세제도는 극도로 문란해졌다. 세금을 걷는게 아닌 수탈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정도로 삼정의 문란, 황구징수 등이 남발되었고, 어지러운 조세제도는 대원군 집권 이후, 개항을 한 이후에도 바로잡히지 않았다. 부패한 관리와 아전들의 수탈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한편 조선이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개항을 시작한 이후, 조선 사회 곳곳으로 들어와 활동하던 청과 일본의 상인들은 농민들의 생활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한 원인이었다. 조청수륙무역장정 이후 청 상인들은 내륙을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었고, 청에서 생산된 물건을 조선에 들여왔다. 조선에서 이와 관련된 산업을 하던 수공업자들은 몰락의 길을 걸어야 했다... 2023. 2. 10.
[조선사] - 강화도 조약과 개항, 불평등조약의 시작 [조선사] - 강화도 조약과 개항, 불평등조약의 시작 1873년 서양과 통상을 반대하면서 척화비까지 세우던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조선의 정권은 고종이 손에 쥐게 되었다. 그러나 고종은 완전하게 왕권을 바로 세우지 못했고 왕비의 인척인 민씨 일가가 정국을 주도하는 형식이었다. 흥선대원군의 개혁을 부정하고 권력을 잡은 민씨세력은 척화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결국은 외국에 통상요구에 조선의 문을 열어야 한다는 주장에 관심을 돌렸다. 척화에 목숨걸던 대원군 정권이 무너지자 조선보다 훨씬 앞서서 개항한 일본은 조선을 자신들이 당했던 방식 그대로 개항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조선에 자국 군함 운요호를 파견하였다. 일본에서 출발한 운요호는 부산에서 영흥만에 이르는 동해안의 해로를 측량하고 강화도 초지진에서 함포사.. 2023. 2. 9.
[조선사] -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치와 이양선 출몰, 조선의 개항 서세동점의 시기인 19세기, 조선은 위기를 맞고 있었다. 조선은 내부적으로는 세도 정치의 폐단으로 조세제도가 흔들리며 삼정의 문란이 일어나고, 무능한 지배세력으로 대표되는 양반에 대항하여 농민의 봉기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때 이미 중국은 아편전쟁에서 패배하고 개항된 상태였으며, 아시아의 무력적 정도를 알게 된 서구 열강 세력이 동쪽으로 눈을 돌려 조선에 접근해오기 시작했다. 이때 집권하기 시작한 흥선대원군은 격변기를 헤쳐나가야 할 정치적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조대비와 일부 척족 세력의 지지를 기반으로 고종의 즉위와 함께 수렴청정을 통해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정권을 장악한 뒤 고종을 위해 실추된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적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만의 개혁정치를 실시하였다. 흥선대원군.. 2023. 2. 8.
[조선사] - 조선의 성리학 이념과 붕당 정치의 시작 [조선사] - 조선의 성리학 이념과 붕당 정치의 시작 조선은 신진사대부들의 백성을 위한다는 위민 정치라는 성리학 이념 아래 건국되었다. 하지만 조선 초기 정치는 사뭇 달랐다. 조선초의 정치는 실용적인 것을 중시하는 훈구파 공훈세력이 주도하였기 때문이다. 사림세력은 조선의 건국에 회의적이었던 고려의 온건개혁파들이 고향으로 내려가 은둔하면서 지낸 세력이다. 훈구 공신 세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특권 세력화 되었고, 조선 성종은 이들을 견제하고 성리학적 이상 사회를 건립하고자 사림 세력을 등용하였다. 고려의 온건개혁파의 후예인 사림은 향촌의 중소 지주라는 경제적 기반과 상대적으로 우월한 도덕성을 기반으로 훈구파를 비롯한 기존 기득권 세력을 비판하였는데 이러한 갈등으로 인하여 사림들이 대거 정계에서 숙청당하는 사건.. 2023. 2. 7.
[조선사] - 세도정치의 등장과 흥선대원군의 개혁 [조선사] - 세도정치의 등장과 흥선대원군의 개혁 조선은 성리학을 기반으로 세워졌다. 성리학에서 말하는 세도정치(世道)란 학식과 덕망이 있는 사람이 세상의 올바른 도를 책임지는 정치를 말한다. 그러나 사회의 모순이 반복해 쌓인 19세기 조선의 상황에서는 뜻이 달리 쓰인다. 정조의 둘째인 이공이 11세의 어린나이로 23대 군주로 즉위하는 1800년부터, 헌종 ~ 철종대까지 약 60년에 걸쳐 시행된 세도정치는 부정하게 세력을 휘둘렀다는 의미에서 기세 勢를 사용하여 세도정치(勢道)라고 부른다. 정조가 갑작스레 승하하면서 순조는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아야했고, 이는 외척과 세도 가문이 정계를 장악하는 시발점이 된다. 이 시기의 세도 정치는 안동김씨와 풍양 조씨 등 노론 출신의 외척 가문들 정치를 주도하고 여기.. 2023. 2. 6.
[조선사] -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만주족의 흥기와 조선의 시련 [조선사] -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만주족의 흥기와 조선의 시련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조선과 명이 전쟁에 국력을 쏟아 붓는 사이 만주에 위치한 여진족은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본디 만주지역은 명의 관리하에 있었는데 명은 산해관 너머 여진에 대한 통제를 풀 수 밖에 없었고, 조선 역시도 전쟁으로 인한 여파로 내부수습이 급해 여진족에 신경쓸 수 없었다. 건주여진의 추장인 누르하치가 여진 세력을 통일하고 금나라를 이어받는다는 뜻에서 후금을 건국했다. 후금은 1115년에 있었던 완안부 아골타의 금나라의 후계를 잇는 다는 명분으로 붙인 국호였다. 명은 후금이 건국되자 즉시 견제를 시작하였다. 만주로 병력을 출병시켰고 여진족을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인 조선에게도 출병을 요청했다. 그러나 조선의 임금 광해군은 상황.. 2023. 2. 5.
[조선사] -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조선의 의병들 [조선사] -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조선의 의병들 조선이 건국되고 약 200년동안 동북아시아의 정세는 평화로웠다. 조선 건국 초기에 명과 북원이 대치하던 상황은 명이 중원을 차지하면서 명의 승리로 끝났다. 15세기에 비교적 평화롭게 교류하던 조선과 일본은 16세기에 들어 갈등이 심화되었다. 일본은 조선에 더 많은 무역을 요구하였고, 조선은 이를 거절하고 무역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던 것이다. 이에 일본인들은 무역을 요구하며 삼포왜란, 을묘 왜변과 같은 변란을 일으켰다. 일본의 요구에 조선은 비변사를 설치하며 일본의 정세를 살폈다. 동시에 국방을 강화하자는 10만 양병설 등이 주장되었으나 이는 붕당간의 견해차이와 예산 등의 문제로 실현되지는 않았다. 한편 일본에서는 전국시대가 종료되었다. 100년간의 전국시.. 2023. 2. 4.
[조선사] - 세종대의 영토 개척, 4군 6진과 쓰시마 정벌 조선 건국 초기 동아시아 정세는 급변하고 있었다. 명은 원을 중원에서 몰아냈지만, 여전히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고, 북원은 몽골 초원에서 강대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조선은 건국과 동시에 피폐해진 군사력을 재건하여 수많은 침략으로 무너진 방어선을 구축하고자 했다. 다행히 원과 명의 갈등으로 조선 북쪽의 땅에 대해서는 영향력이 미치지 않았기에 조선은 이 땅의 여진족을 회유 또는 공격하였다. 조선은 북쪽으로는 4군과 6진을 개척하였다. 국경선이 강을 기준으로 할때 외적의 침입을 가장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기에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의 경계로 삼고자 북진해 요새이자 근거지를 조성한 것이다. 조선 태조인 이성계는 동북면 출신으로 고려말부터 동북면의 여진족을 평정하여 두만강 하류지역을 조선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2023. 2. 3.
[조선사] - 조선 건국과 1, 2차 왕자의 난, 태종 이방원의 즉위 [조선사] - 조선 건국과 1, 2차 왕자의 난, 태종 이방원의 즉위 이성계는 우왕이 지시한 요동 정벌을 수행하기 위해 출정하다 압록강의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려 개경을 향해 진격했다. 이성계가 개경을 점령하고 군권과 정권을 장악한 뒤 권문세족의 경제기반인 토지를 박탈하기 위해 과전법을 실시하였다. 급진적 토지개혁으로 인해서 고려 왕조의 기득권 세력은 경제기반을 잃고 실각했고, 그 과정에서 혁명에 반대하던 정몽주와 온건 개혁파도 숙청되었다. 1392년 7월 17일 이성계는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으로부터 왕위를 선양 받았다. 이성계는 즉위 사실을 명에 알리고 제도를 공표했다. 명으로부터 화신과 조선 중 어떤 것을 국호로 할지 물은 뒤 국호를 조선으로 하여 태조 2년에 반포하였다. 3년에는 한양을 새로운 .. 2023. 2. 2.
[고려사] - 고려의 멸망과 위화도 회군, 역성혁명과 이성계 [고려사] - 고려의 멸망과 위화도 회군, 역성혁명과 이성계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하고 반원정책을 추진하던 공민왕이 신돈의 실각 이후 환관에 의해 시해되었다. 고려 조정은 큰 혼란에 빠졌으나, 정계의 실력자인 이인임은 재빨리 우왕을 즉위시키고 고려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공민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우왕은 당시 10세에 즉위한 실권이 없는 어린 왕에 불과했다. 실질적인 권력과 국정운영은 최영, 경복흥 등 홍건적과 왜구를 물리친 무장세력에 의해 진행되었다. 이들이 무신정권 때 처럼 권력을 휘두른 것은 아니나 조정의 신흥세력으로 떠올랐고, 당시 공민왕의 발탁으로 권문세족의 대항마로 떠오르던 신진사대부들은 이들이 집권하는 것을 좌시하지 않았다. 이인임은 그동안 공민왕이 추진해 오던 친명 외교정책을 버리고 단절.. 2023. 2. 1.
[고려사] - 고려 공민왕의 반원정책과 홍건적, 왜구의 침략 [고려사] - 고려 공민왕의 반원정책과 홍건적, 왜구의 침략 몽골의 부마국이 된 고려는 사회적으로 누적되어 온 모순에 휩싸여 있었다. 이를 개혁으로 바로잡고자 했지만 고려 국왕이 자신의 위치에서 개혁을 통해 사회와 정치를 바로잡으려고 하면 원이 압력을 행사하여 그 노력을 무위로 되돌렸다. 충자로 시작하던 고려의 국왕들 다음 즉위한 공민왕은 원이 고려의 국정에 직접적으로 간섭하는 것을 배제하기 위해서 정치개혁을 서둘렀다. 공민왕은 자주성을 회복하고 권문세족을 위시한 부원세력을 축출하기 위해 본격적인 반원정책을 취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반원정책이 추진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우선 몽골이 약해진 것이 첫번째 이유이다. 14세기에 들어서며 마니불교에 심취한 원이 국력이 쇠약해지고 한족들이 원에 대해 저항을 시작하.. 2023. 1. 31.
[고려사] - 고려와 부원세력 권문세족, 일본정벌 [한국사] - 고려와 부원세력 권문세족, 일본정벌 1270년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천도한 고려는 원의 부마국이 되었다. 무신정권을 끝낸 국왕은 스스로 국정을 운영하였다. 원이 직접적으로 고려를 통치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다루가치를 보내어 고려에 간섭하였고, 원은 필요할 때마다 고려왕을 교체할 수 있었다. 또한 고려의 국왕은 어릴 때 원에서 자라야했고, 원 황실의 공주와 결혼해야했다. 이로써 원이 영위하는 국제질서에 고려는 편입되었고, 부마국의 위치에서 그 질서에 순응하였다. 충렬왕에서 공민왕에 이르기까지 총 일곱명의 고려왕이 원간섭기에 즉위하고 폐위되었다. 원 간섭기에 고려 왕실의 호칭과 관제도 모두 원나라식으로 바뀌었다. 고려 국왕의 묘호에는 조종의 예를 올리지 못했고, 첫자는 충성할 충자를 써서 원에 .. 2023. 1. 30.
[독일사] - 프리드리히 대왕과 7년전쟁, 강대국 프로이센의 등장 [독일사] - 프리드리히 대왕과 7년전쟁, 강대국 프로이센의 등장 프로이센이 열강들의 자리를 위협하는 강대국으로 떠오르면서 이를 경계하는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의 대립으로 7년전쟁이 벌어졌다. 특히 오스트리아는 슐레지엔을 회복하려 했기 때문에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에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쟁탈전이라는 이중적 관계속에 7년전쟁은 시작되었다. 프로이센은 수적으로 열세였다. 3개의 국가로 영토가 둘러싸인 형국이었기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기민하게 병력을 움직였다. 프로이센군은 1757년 프랑스군을 로스바흐에서 격파하고, 이어서 오스트리아 군을 로이텐에서 제압한 다음 기수를 돌려 1758년 초른도르프에서 러시아군에게 승리하였다. 세 국가의 병력이 합쳐지기 전에 각개격파하는 전술을 선택한 것이다.. 2023. 1. 29.
[독일사] - 프리드리히 대왕과 슐레지엔 정복,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 [독일사] - 프리드리히 대왕과 슐레지엔 정복,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 프리드리히 대왕은 28세로 즉위하자 마자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이라는 상황을 맞이한다. 그는 선대들이 전해 내려준 풍족한 재정, 능률적인 관료조직, 훌륭하게 훈련된 군대를 가지고 있었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전쟁이 일어나자 국운을 짊어지고 뛰어들었다. 오스트리아는 현재의 벨기에와 이탈리아 일부를 영토로 가지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남자상속을 기반으로 계승을 관리하였는데, 황제 카알 6세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외동딸 마리아 테레지아만이 유일한 계승자였다. 황제는 생전에 딸에게 황제 자리를 계승하게 하려 1713년 국사조칙을 반포하는 등의 노력을했으나, 황제가 죽자 이 조칙을 지킬 국가는 어디에도 없었다. 카를 6세가 죽자 프리드리히는 .. 2023. 1. 29.
[독일사] - 동유럽의 절대왕정과 프로이센의 절대왕정 체제 수립 [독일사] - 동유럽의 절대왕정과 프로이센의 절대왕정 체제 수립 동유럽에서도 서유럽과 마찬가지로 상비군과 관료집단을 위시한 절대왕권이 등장하였다. 전제적 지배라는 기본적 성격에서는 서유럽의 절대왕권과 일치했으나 몇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우선 성립의 시간대가 서유럽에 비해 1세기 이상 늦었다. 또한 성립 계기가 자율적인 왕권강화가 아닌 군사적인 것이나 서유럽의 모델을 따라 한 형태였다. 서유럽과 달리 동유럽은 부르주아가 아닌 농노제가 절대왕정 성립의 기반이었다. 이러한 농노제는 동유럽 절대왕정의 봉사귀족들의 기반이 되었는데, 이는 귀족들과 대척점을 지니는 서유럽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농노제를 기반으로 했기에 동유럽에서는 도시와 부르주아가 발달하지 않았으며 왕권과 귀족의 유착을 통해 위로부터의 개혁으로.. 2023. 1. 28.
[러시아사] - 소비에트 러시아의 전후 경제 재건과 변화 [러시아사] - 소비에트 러시아의 전후 경제 재건과 변화 제 2차 세계대전의 피해를 복구하고 소비에트의 경제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스탈린과 당국자들은 다시 5개년 계획이라는 카드를 꺼내들었다. 4차 5개년 계획은 앞선 5개년 계획들과 비슷한 형식으로 짜여졌다. 총투자 금액의 85%를 중공업에 투자하고 특히나 석탄과 전력, 철, 강재, 목재, 시멘트 등에 투자되었다. 독일인들이 황폐화 시키고 떠난 러시아 땅에 다시 복구 작업이 개시되었다. 4차 5개년 계획은 독일과 추축국에게서 얻은 배상금으로 진행되었다. 1947년의 경우 소비에트 러시아로 들어온 많은 수입품들은 동유럽과 러시아 관할 독일 지역에서 들여왔다. 이들은 자원은 물론이고 점령지에 존재하던 공장마저 해체하여 소비에트 러시아로 들여왔고, 그.. 2023. 1. 28.
[고려사] - 삼별초의 대몽항쟁과 제주도 항전 [고려사] - 삼별초의 대몽항쟁과 제주도 항전 삼별초는 진도에서 여몽연합군을 맞아 용장성에서 패배하였다. 상징으로 내세운 승화후 왕온은 물론 삼별초의 지휘관 배중손도 진도에서 전사하였다. 김통정은 살아남은 병력을 수습하여 제주도로 향하였다. 제주도는 삼별초군이 진도에 들어온 해인 고려 원종 11년인 1270년 11월 개경에서 파견된 관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해 확보한 지역이다. 진도에서 들어온 삼별초군은 김통정의 지휘아래 제주의 방어시설을 구축하면서 잃어버린 제해권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고려사 권 27에는 삼별초가 제주에 들어가 내성과 외성을 쌓은 뒤, 그 성을 믿고 더욱 창궐하여 수시로 나와 노략질 한다고 서술해두었다. 삼별초는 진도를 잃고 제주도를 최후 거점 삼아 여몽연합군에 대항하려 했던 것으로 .. 2023. 1. 27.
[고려사] - 삼별초의 대몽항쟁과 진도 용장성 전투 [고려사] - 삼별초의 대몽항쟁과 진도, 제주에서의 전투 마지막 무신정권의 권력자였던 임유무가 몽골의 군사적 지원을 받은 고려 원종에 의해 살해되면서 고려 조정은 개경으로의 환도를 준비한다. 그러나 강화도 대몽항쟁의 주역이었던 삼별초들은 몽골에게 보복 받을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 개경으로의 환도를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삼별초는 본디 좌별초, 우별초로 구성된 야별초에 신의군이 더해져 3개의 별초로 구성된 군대로 최우 집권기에 나타나 대몽항쟁의 선두에서 활약하였다. 최항 집권기에 창설된 신의군은 몽골에 붙잡혔다 돌아온 이들로 구성된 부대였다. 삼별초는 반몽적 성격이 강했으며 당시 고려의 가장 최선봉에 있는 정예부대였다. 이들의 명부가 왕에게 압수당한 상황에서 몽골군에 넘어간다면 보복을 감수해야만 했다. .. 2023. 1. 26.
[고려사] - 몽골의 침략과 강화도에서의 대몽 항쟁 [고려사] - 몽골의 침략과 강화도에서의 대몽 항쟁 몽골이 고려에 접촉한 것은 고려가 강동성에 있는 거란의 병력을 공격하기 위해 공동작전을 펼친 때이다. 1219년 고려는 몽골 병력과 함께 거란의 병력을 공격했고, 이때부터 몽골은 만주에서 거란이 갖고있던 위치를 차지하였다. 동시에 몽골은 고려에 공물을 요구하면서 고려와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권력이 거란에서 몽골로 옮겨과는 과도기에 고려에 공물을 요구하던 몽골의 사신 저고여가 돌아가는 길에 압록강변에서 살해당했다. 압록강변에는 거란의 잔당, 여진족, 고려, 몽골 등 다양한 민족이 산재하는 곳으로 어떤 세력이 저고여를 피살했는지 정확하지 않았다. 그러나 몽골은 이를 고려의 소행으로 단정하고, 1231년 고려를 침략했다. 몽골은 고려를 침략하여 중원정벌 전.. 2023. 1. 25.
[영국사] - 영국의 튜더왕조, 절대왕정과 대영제국의 기틀 [영국사] - 영국의 튜더왕조, 절대왕정과 대영제국의 기틀 영국의 절대왕정은 튜더왕조의 헨리 7세 대에 성립하였다. 당시 영국은 장미전쟁 이후 봉건귀족이 약화된 상태였고, 국민적 여론 또한 왕을 구심점으로 질서와 안정을 요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헨리 7세는 귀족의 사병제를 폐지하여 사적 무력을 금하고 국가 수입을 증대시켰다. 헨리 7세는 국민적 기반하에 왕권을 신장시키고 번영된 왕국을 헨리 8세에게 계승하였다. 헨리 8세는 선왕의 유지를 이어 받아 절대왕권을 확립시켰다. 튜더 정부는 중앙 정부를 개혁하고, 종교개혁을 단행해 로마로부터 교회를 독립시켰고, 수도원을 해산해 그 토지를 측근과 왕당파에게 나눠주었다. 이는 하나의 세속세력으로 굳어진 수도원의 세력을 약화하면서 왕권을 강화하는 방법이었다. 왕을 견.. 2023. 1. 24.
[러시아사] - 제 2차 세계대전과 소비에트 러시아의 피해 [러시아사] - 제 2차 세계대전과 소비에트 러시아의 피해 소비에트 러시아는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엄청난 인명 손실과 물질적인 피해를 입었다. 러시아 전역에서 적군 수백만명이 사망했을 뿐 아니라, 수백만명의 민간인 역시 이리저리 바뀌는 전선과 독일군의 연이은 침공에 희생되었다. 러시아의 희생자 수는 계속해서 추산되고 있는데 최근의 수치는 약 2,500만명에 달했다. 소비에트의 시민들은 노동자로, 전쟁 포로로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서 죽어갔다. 나치는 동부전선에서 영토 합병을 위한 전멸작전을 펼쳤기에 대량 총살과 집단 처형장으로 주민을 보내는 일은 흔하게 일어났다. 게다가 그 모든 시련을 겪고 살아났다 하더라도 생존자들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입었다. 전쟁은 러시아에 있어 비극적인 인적 손실이었다... 2023. 1. 23.
[고려사] - 고려 무신정권의 등장과 각지의 민란 [고려사] - 고려 무신정권의 등장과 각지의 민란 안정된 고려사회에서 문벌귀족의 모순성이 쌓여가자 결국 갈등이 폭발했다. 문벌귀족들은 고려의 모든 관직을 독점하고 권력을 휘둘러왔으나 결국 무신들이 일으킨 정변에 의해 몰락의 길을 걸었다. 무신의 난은 1170년 8월 고려 의종이 보현원에 행차한 틈을 타 무신인 정중부, 이고, 이의방 등 무신들이 쌓여있던 불만을 폭발시키면서 시작되었다. 무신들은 정변을 일으키면서 문신들을 닥치는대로 죽이면서 고려의 권력을 장악하였다. 무신의 난 직후 반란 주도자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 이고와 이의방이 제거되었다. 바로 정중부가 권력을 잡았으나 계속된 내분으로 권력자가 바뀌었다. 정중부 다음에는 경대승, 이의민등이 차례로 권력을 잡았다. 이들은 일관된 정국 운영 능력이나 정.. 2023. 1. 22.
[고려사] -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이 일어난 고려의 내분과 문벌귀족의 등장 [한국사] -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이 일어난 고려의 내분과 문벌귀족의 등장 여진과의 격렬한 전쟁 끝에 고려가 금에 군신관계를 받아들이자 이후 고려 사회는 천천히 안정되어 갔다. 여진은 고려와의 화친을 잘 이행했고, 고려릐 북방은 안정되었다. 그리고 안정 속에서 고려의 최고 지배층인 문벌귀족이 형성되었다. 문벌귀족은 고려 특유의 제도인 과거제와 음서제도를 통해 관직을 독점하고 정치권력을 장악했다. 문벌귀족 중에서도 유력 가문들은 혼인관계를 통해서 기반을 공고히 했으며 폐쇄적 특권층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막대한 권력을 이용해 불법적으로 개인이나 국가의 토지를 자신이 사유화 하였다. 수많은 자유 농민들이 노비로 전락하였으며 땅 또한 이들에게 흡수되었다. 이때 문벌귀족들은 섬을 소유하기도 했으며 섬에서 가축.. 2023. 1. 21.
[고려사] - 천리장성과 여진정벌, 아골타와 금의 등장 [고려사] - 천리장성과 여진정벌, 아골타와 금의 등장 거란과의 전쟁을 통해 강동 6주를 완전히 영토화한 고려는 북쪽에서의 침입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이에 고려는 거란과의 전쟁이 끝나자 북방의 침입에 대비해 장성을 쌓기 시작했다. 이를 천리장성 또는 고려장성이라고 한다. 천리장성은 흥화진 압록강에서 시작해서 동해한 함주(함흥) 까지 연결되었다. 천리장성으로 불린 장성은 덕종 2년인 1033년부터 평장사 유소를 책임자로 하여 건설을 시작해 정종 10년인 1044년에 완성하였다. 이에 거란은 반발하였으나 덕종과 정종은 끝까지 밀어붙여 건설하였다. 천리장성 동북 방면에는 여진족이 세력을 이루며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숙신과 말갈에서 내려온 생여진 계통의 종족이었다. 여진족은 지금의 한반도 함경도는 물론이고, .. 2023. 1. 19.
[독립민수] - 독립군이 사용한 권총들 [독립민수] - 독립군이 사용한 권총들 독립군은 다양한 종류의 권총을 사용했습니다. 마우저, 콜트, 브로우닝 등 다양한 제조사의 권총이 운용되었는데 이 권총들은 주로 유럽에서 제조되었고, 독립군 장교들이 사용하였습니다. 독립군이 다뤘던 권총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마우저 권총 독일의 총기제작사 마우저에서 생산된 권총입니다. 우리가 살펴볼 모델은 C96 모델입니다. 이 모델은 러시아의 레닌이 홍범도 장군에게 선물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박스형 탄창은 당시 매우 비쌌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조금 특이한 고정형 탄창을 쓰고 있습니다. 권총집을 활용해서 개머리판처럼 사용했기 때문에 매우 특이했습니다. 홍범도 장군의 남은 사진에서 이 권총집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음은 마우저의 M.. 2023. 1. 18.
[고려사] - 고려의 고구려 계승의식과 북진정책, 거란과 전쟁 (1~3차 여요전쟁) [고려사] - 고려의 고구려 계승의식과 북진정책, 거란과 전쟁 (1~3차 여요전쟁) 고려는 국호에서 보여지듯 건국 초부터 고구려를 계승을 표방했다. 이는 적극적인 북진 정책을 국조로 삼는 기반이 되었다. 이에 따라 지금의 평양인 서경을 중시하고, 평양을 기반으로 하여 청천강 이북으로 영토를 확대하려하였다. 그러나 고려의 북진 정책은 발해를 멸망시키고 만주 일대에서 세력을 영유하던 거란에게는 무시할수 없는 도전이었다. 두 나라의 대립은 곧 갈등으로 나타났다. 거란은 스스로를 키타이라고 부르는 유목 민족이다. 거란은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져있었는데, 당에 복속하였다. 그러던 중 당 말기의 혼란기에 질랄부에서 야율아보기라는 걸출한 리더가 나와 부족을 통일하며 거대 세력을 형성하였다. 또한 서쪽의 탕구트와 동쪽의.. 2023. 1. 17.
[러시아사] - 소비에트 연방과 제 2차 세계대전: 소비에트 적군의 반격과 베를린 진격 [러시아사] - 소비에트 연방과 제 2차 세계대전: 소비에트 적군의 반격과 베를린 진격 1943년 여름 독일군의 공격이 소강상태에 들어서자 소비에트 적군은 다시 반격을 시작했다. 적군은 세력을 규합해서 침입자들을 영토에서 몰아내고 결국에는 부다페스트, 빈, 프라하, 베를린까지 진격했다. 적군의 진격은 수도 베를린을 점령하고 전쟁이 끝날때까지 이루어졌다. 적군의 압도적인 승리는 독일군의 전력이 모두 소진되었기에 가능했다. 독일군의 탄약과 물자는 사실상 소진되었고 인력구성 역시 독일인이 아닌 루마니아 인이 크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지휘권을 가져간 히틀러는 계속해서 실수를 저질렀다. 너무 늦은 시기까지 후퇴를 허락하지 않았고 제때 지휘가 전선에 도착하지 않았다. 소비에트 적군은 여전히 막대한 손실을 입으면서 .. 2023. 1. 16.
[프랑스사] - 프랑스의 절대왕정의 구조와 성립 [프랑스사] - 프랑스의 절대왕정의 구조와 성립 유럽의 절대왕정은 유럽의 사회가 봉건시기를 탈피하여 근대사회 성립의 초기단계이다. 절대왕정국가는 봉건 제후들에게 나뉘어져있던 권력을 왕을 중심으로 모으고 국가를 통일시켜 행정, 사법, 군사적 측면에서 중앙집권화를 이룬 국가를 말한다. 국가 통일과 중앙집권으로 이룬 왕권은 매우 강력했다. 정치는 오늘날의 시각에서 전제정치에 가까웠다. 그러나 절대왕권 역시도 아무런 견제를 받지 않는 권력은 아니었다. 절대왕권 역시 귀족이나 의회, 세습 관료집단에 의해 견제를 받았지만 기본적으로 이들을 굴복시킬 수 있다는 것이 절대왕권의 기준이 된다. 사상적으로는 왕권신수설을 기반으로, 경제적으로는 중상주의를 기본으로 하였다. 절대왕정은 관료제와 상비군의 존재를 통해 강력한 권.. 2023. 1. 15.
[러시아사] - 소비에트 연방과 제 2차 세계대전: 독일의 2차 대공세 [러시아사] - 소비에트 연방과 제 2차 세계대전: 독일의 2차 대공세 1941년 진행된 독일군의 첫번째 공세에 비해서 독일군의 두번째 공세는 범위와 물량이 제한적이었다. 첫번째 공세는 러시아의 혹한에의해 패퇴당했지만, 겨울이 지나가자 1942년 두번째 공세가 시작되었다. 1942년 여름 시작된 독일의 2차 대공세는 보로네시로부터 흑해에 이르는 전선의 남쪽에 걸쳐 진행되었다. 독일군과 추축국의 100개 사단과 100만에 이르는 군대는 전선의 남쪾을 따라 진군했다. 독일군은 케르치 지역을 점령하고 한달간의 포위전 끝에 러시아의 해군요새 세바스토폴을 함락했다. 이어 독일군은 이를 기반으로 동으로는 볼가강 유역, 남으로는 캅카스 쪽을 공격했다. 그러나 보로네시로의 진격이 막히자 독일의 폰 보크는 30만 명이상.. 2023. 1. 15.
[고려사] - 고려의 민족통일과 고려 초 정세, 발해의 멸망 [고려사] - 고려의 민족통일과 고려 초 정세, 발해의 멸망 신라가 힘을 잃은 뒤 후삼국 시대가 열리자 상황은 후백제에 비해 고려에게 우세하게 돌아갔다. 930년 고창 전투에 이어서 934년 운주전투에서 후백제군은 고려군에게 패배하면서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갔다. 후백제 왕실 내부에서도 갈등이 일어났다. 견훤이 넷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면서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났다. 시간이 갈수록 상황은 더 고려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동시에 926년 거란에게 멸망한 발해의 세자 대광현이 유민을 이끌고 고려에 투항하면서 고려는 발해까지 아우르게 되었다. 또한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내부의 분열로 큰아들 신검에게 피체되어 있다가 탈출하여 결국 숙적이던 고려에 의탁하였다. 나라를 세운 견훤이 상징성이 있었던 만큼.. 2023.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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