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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사] - 프라하의 봄과 아프가니스탄 침공, 소비에트의 폭력적 대응 2 [러시아사] - 프라하의 봄과 아프가니스탄 침공, 소비에트의 폭력적 대응 2 동유럽의 문제는 끊임없이 불거져나왔다. 헝가리 혁명을 진압한 후 12년간 소비에트는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제도적 다양성과 이데올로기적 다양성을 가진 공산주의 다원주의를 용인하려했다. 그러나 이는 동유럽 여러 국가들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현상을 포괄하지는 못했다. 1968년 프라하에서는 “프라하의 봄"이라 불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체코,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은 경기침체에 시달리고 있었다. 프라하의 봄은 이러한 경제침체를 해결할 것을 요구하는 개혁요구, 민주화 요구 운동이었다. 프라하의 봄에 의해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권력독점을 포기한다고 말했고, 경제 수정주의와 민주주의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동.. 2023. 4. 21.
[러시아사] - 폴란드와 헝가리의 혁명, 소비에트의 폭력적 대응 [러시아사] - 폴란드와 헝가리의 혁명, 소비에트의 폭력적 대응 1956년은 소비에트에게 있어 놀란만한 해였다. 스탈린 치하에서는 허용되지 않았던 티토와 유고슬라비아의 노선은 오류를 낳았고, 스탈린의 후임자인 후르쇼프와 불가닌은 이 오류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위해 베오그라드를 방문했다. 이러한 부드러운 정책에 반대했던 외교장관 몰로토프는 셰필로프로 교체되었다. 흐루쇼프의 베오그라드 방문과 더불어 그가 했던 1956년의 2월 연설은 동유럽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모스크바가 스탈린의 오류와 범죄를 인정한 것은 체제 개혁을 위한 요구를 허락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동시에 폴란드와 헝가리에서 변혁을 요구하는 시위가 격렬하게 터져나왔다. 폴란드에선 1956년 6월 하순경에 노동자들이 포즈난 시의 거리로 쏟아져.. 2023. 4. 17.
[러시아사] - 스탈린 사후 소비에트의 대외관계와 냉전: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창설 [러시아사] - 스탈린 사후 소비에트의 대외관계와 냉전: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창설 스탈리의 사망 이후 그의 후계자들이 소비에트를 맡으면서 대외정책은 훨씬 더 미묘하고 복잡해졌다. 스탈린 당시의 관점인 세계가 노동자의 적으로 가득 찼다고 보는 관점은 점차 “차이점의 연속체(a continuum of difference)"이라는 개념으로 대체되었다. 각 국가간의 사이의 이해관계와 입장이 폭넓게 다르다는 점을 인정할 뿐 아니라, 일부의 차이점은 소비에트 이익에 반하지 않으면 이를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어느정도 인정의 한계를 지녔지만, 소비에트 블록내에서 견해의 차이를 관용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는 자본주의와 소비에트가 공존할 수 있고, 전쟁 없이 이 차이점을 해결할 수 있다는 미래를 제시했다. 물론 .. 2023. 4. 15.
[러시아사] - 흐루쇼프의 실각과 새로운 통치자 브레즈네프 [러시아사] - 흐루쇼프의 실각과 새로운 통치자 브레즈네프 여러모로 짧았던 흐루쇼프의 통치기간은 오랜 혁명 정치사의 정점이었다 흐루쇼프는 국내외적으로 자신의 통치 방향을 ‘사회주의 사회 건설'로 잡았고, 그의 후계자들은 그와는 다른 정치적 방향성을 보여주었다. 흐루쇼프가 개혁과 변덕스러운 캠페인을 보여주었다면 후계자들은 혁명이 아닌 질서를 바라며 통치했다. 1964년 새롭게 구성된 소비에트의 집단지도부는 브레즈네즈를 필두로 구성되었으며, 1917년 이후 성년이 된 최초의 세대였다. 이들은 혁명 당시에는 어린아이였고, 대부분 기술교육을 받았다. 모든 지도자들은 대숙청을 통해 당의 고위직으로 진입했고 빠르게 승진했다. 대체적으로 그들은 안정된 권력과 효율적인 경제 발전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실용적인 인물들이.. 2023. 4. 12.
[러시아사] - 스탈린 이후의 소련, 스탈린의 죽음과 흐루쇼프의 등장, 크렘린의 권력투쟁 [러시아사] - 스탈린 이후의 소련, 스탈린의 죽음과 흐루쇼프의 등장, 크렘린의 권력투쟁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은 1953년 3월 5일 사망하였다. 그의 공식적인 사망원인은 뇌졸중이었다. 스탈린의 죽음 이후에 크렘린은 3일간 침묵을 지켰으며, 결국 독재자의 서거를 발표하였을 때 새로운 지도부는 인민들의 통합과 단결을 강조하며 자신들이 국가를 통치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선언했다. 여기서 말렌코프가 등장하여 가장 중요한 직책인 당 서기장직과 수장자리를 겸임하였다. 말렌코프 다음으로는 베리야와 몰로토프가 그 다음 순서를 차지하여 독재자가 죽고 난뒤 소련의 삼두체제를 구성했다. 그러나 이러한 삼두체제는 오래가지 않았다. 3월 준순이 되자 말렌코프는 당의 최고위층이긴 하지만, 당 서기장식을 사임한다고 발표하였다. 당.. 2023. 4. 11.
[한국사 연표] - 한국사 연표 (삼국시대, 고려사, 조선사, 근현대사 - 23년 3월) [청동기-철기시대] BC 50: [한국사] - 한국의 청동기 시대와 고조선 BC 7C: [한국사] - 고조선의 등장과 발전 BC 108: [한국사] - 고조선의 발전과 한제국의 조선침략 BC 37: [한국사] -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BC 18: [한국사] - 백제의 성립과 마한 BC 57: [한국사] - 사로국의 등장과 신라의 건국, 발전 AD 42: [한국사] - 가야 제국(諸國)의 성립과 쇠락 [삼국시대] AD 4C: [한국사] - 고구려의 영토팽창과 전성기, 광개토대왕의 등장 AD 5C: [한국사] - 백제의 전성기 AD 475: [한국사] - 백제의 천도와 쇠락, 웅진시대와 사비시대 AD 6C: [한국사] - 신라의 발전과 부흥, 진흥왕의 영토확장 AD 607: [한국사] - 고구려와 수나라 .. 2023. 4. 4.
[현대사] - 신군부와 전두환의 정권 장악과 몰락, 6월항쟁과 민주화 [현대사] - 신군부와 전두환의 정권 장악과 몰락, 6월항쟁과 민주화 육사 11기 출신 전두환은 5.16 쿠테타 당시 국가혁명위원회에 가담하고 자신의 후배인 육사생도들의 쿠테타 지지 퍼레이드를 조직하여 박정희의 눈에 들었다. 그는 박정희의 비호아래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에 참여하여 그 지도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전두환은 박정희의 군사독재에 적극 협력한 인사로 1976년에는 대통령경호실 작전차장보, 1979년에는 육군본부 보안사령관으로 재직했다. 거기에 10.26사태 직후에는 합동수사본부장이 되어 김재규를 구속하고 수사를 주도하였다. 그리고 육군참모총장을 김재규의 협력자라는 구실로 체포한 12.12사태까지 일으키면서 군부를 장악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그는 박정희의 비호아래 커온 군부독재정부의 그림자.. 2023. 3. 28.
[현대사] - 신군부와 12.12쿠테타, 1980년 서울의 봄과 광주 민주화운동 1979년 10월 26일 부마항쟁에 대해 강경진압을 지시하던 박정희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피살되었다. 김재규는 혼란상황을 수습하고 정권을 잡으려 하였으나 곧바로 체포되고, 국가의 수장을 잃은 군부는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갑작스러운 계엄 업무를 수행하는 군부는 겉으로는 정치적인 중립을 선언하고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민간에 권력을 이양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12월 12일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는 무력으로 군부와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다. 이들은 하나회라는 이름으로 박정희의 비호 아래 활동하던 군내 사조직이었다. 이때의 사건을 계기로 군에서는 사조직 형성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이들이 일으킨 쿠테타를 12.12사태라고 부른다. 이어서 12월 22일에는 계엄사령관을 체포.. 2023. 3. 25.
[현대사] - 5.16 군사정변과 박정희의 등장, 유신체제와 김재규 [현대사] - 5.16 군사정변과 박정희의 등장, 유신체제와 김재규 민주화에 대한 염원으로 이승만 독재와 부정선거에 대항해 민주화를 이뤄낸 4.19 혁명 이후, 대한민국에는 민주당이 선거에서 승리하며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민주당이 이행하는 개혁이 여러 현실적인 문제에 막혀 지지부진하자 민중 사이에서는 불만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이때 사회의 혼란스러움을 기회로 삼아 박정희 소장을 주축으로하는 일부 군인들이 반공과 경제개발을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1961년 5월 16일의 일이었다. 이를 5.16 군사정변 또는 5.16 군사 쿠데타라고 부른다. 이 사태로 인해 4대 대통령 윤보선은 하야했다. 이는 대한민국의 헌법적 질서를 무시하고 무력을 앞세운 폭력적 정권수탈이었다. 총칼을 앞세운 군인들은 정권을 .. 2023. 3. 23.
[현대사] - 1960년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 이승만의 하야: 현대사의 시작 / 대한민국 민주화의 시작 [현대사] - 1960년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 이승만의 하야: 현대사의 시작 / 대한민국 민주화의 시작 남북한의 단독정부가 수립된 이후 10년, 대한민국에서는 이승만이 10년간 집권하였다. 이승만과 자유당은 한국전쟁, 사사오입 개헌 등을 거치면서 권력을 독점화하려 했고, 1956년 3차 연임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당시 이승만의 나이는 70세가 넘은 나이였다. 3대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고,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은 이승만과 이기붕을 후보로 내세웠다. 야당인 민주당은 조병옥을 대통령 후보로 장면 부통령후보로 내세웠다. 그러나 조병옥이 갑작스럽게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대통령 후보는 이승만 단독후보로 당선이 정해졌고, 세간의 관심은 부통령 선거에 집중되었다.. 2023. 3. 22.
[근대사] - 북한의 남침과 6.25 전쟁의 시작 (한국전쟁) [근대사] - 북한의 남침과 6.25 전쟁의 시작 (한국전쟁) 1948년 유엔의 총선거를 거부한 북한은 소련의 괴뢰정권이 들어섰고, 남한은 단독 총선거를 실시하였다. 남한과 북한에 각각의 정부가 설립되어 존재하는 분단의 상황에서 각 정부는 서로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냈다. 그러던 중 1949년 북한의 김일성이 신년사에서 국토완정론을 주장하면서 남북한에는 긴장관계가 형성되었다. 이에 이승만은 김일성의 발언에 북진통일론으로 맞섰다. 서로의 영토를 공격한다는 가정아래 남북의 정부는 각기 미국과 소련의 군사적 지원 아래 군사력을 강화하였다. 특히 미군과 소련이 한반도에서 철수하자 이러한 군비경쟁은 더욱 치열해 졌다. 북한은 중국의 국공내전과 항일무장투쟁을 통해 수많은 실전경험을 쌓은 조선의용군 수만명을 인민군으로.. 2023. 3. 21.
[근대사] - 남북한 단독정부 수립과 총선거, 한반도 분단의 고착 [근대사] - 남북한 단독정부 수립과 총선거, 한반도 분단의 고착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맞은 일본이 1945년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38선을 경계로 한반도에는 북에는 소련군이 남에는 미군이 들어왔다. 이들은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구실로 실질적인 한반도의 지배세력이 되었다. 38선 위쪽의 북한은 소비에트의 간접지배로, 남한의 미군정은 직접지배를 통해 통치하였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는 한국문제를 처리하기 위해서 미국과 영국, 소비에트 3국 외무장관이 모여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를 모스크바 3상회의라고 한다. 이 회의에서는 한국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향후 5년간 신탁통치를 한다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이러한 조치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36년간의 일본제국주의 .. 2023. 3. 20.
[근대사] - 한반도 분단과 미군의 한반도 진주, 미군정 치하 민중의 삶 [근대사] - 한반도 분단과 미군의 한반도 진주, 미군정 치하 민중의 삶 1945년 9월 8일 인천항을 통해서 한반도로 들어온 미군은 일본군을 무장해제하고 점령군으로서 38선 이남의 지역에서 군정을 실시하였다. 미군정이 정식으로 실시되자, 남한에서 세력을 구축하고 실질적인 행정조직을 마련한 건국준비위원회나 귀환을 준비하고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 한국인의 정치집단들은 상황이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다. 미군정은 한국인이 조직한 정치집단을 모두 배제하고 미군정만이 유일한 공식 정치단체임을 선포하였다. 이는 사회주의적 단체의 설립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동시에 미군정은 경제체제는 일제가 실시하던 전시 통치제제에서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를 도입하였다. 그러나 당시 시대적인 상황과 남한만의 특수한 .. 2023. 3. 17.
[근대사] - 일제의 패망과 광복, 미군정과 혼란의 해방정국 [근대사] - 일제의 패망과 광복, 미군정과 혼란의 해방정국 1945년 8월 15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맞은 일본은 일왕의 라디오 방송을 통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총옥쇄와 본토사수를 외치던 일제는 결국 연합국에 무릎꿇었다.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제로 침탈한지 35년만의 일이었다. 연합국에 항복한 일본은 식민지를 잃게 될 것이었고, 한국인들은 광복을 맞이했다. 해방과 더불어 한인들을 이끌어갈 새로운 정치를 위해 다양한 움직임이 나타났다. 가장 먼저 움직인 인물은 여운형이었다. 여운형은 국내에서 활동하면서 국내에서의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해두고 있었고, 이미 1년전부터 일제의 패망을 예측하고 조선건국동맹이라는 비밀조직을 만들어 국내에서 항일 세력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게다가 노동자와 농민을 대.. 2023. 3. 12.
[독립운동사] - 1930년대- 40년대 무장독립투쟁과 한국광복군의 활동 [독립운동사] - 1930년대- 40년대 무장독립투쟁과 한국광복군의 활동일제가 침략전쟁에 미쳐 중국대륙과 동남아로 침략을 확장하자 만주와 중국 일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도 일제에 대항하여 독립전쟁을 개시하였다. 독립전쟁 개시에 앞서 독립운동 단체들은 1920년 후반 부터 효율적인 전쟁을 하기위해 독립운동 단체 세력을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1935년 결성된 조선민족혁명당은 당시의 절박한 상황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의열단, 신한독립당,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등 다양한 단체가 참가하여 결성되었다. 그러나 내부의 주도권 다툼으로 일부 민족주의 계열이 탈퇴하고 반쪽짜리 통합에 그치고 말았다.1937년 8월 임시정부 주도의 한국 광복운동단체 총연합회가 결성되어 민족주의 세력의 결집을 이끌었고, 11월.. 2023. 3. 11.
[근대사] - 일제의 만주침략과 만주국 성립, 한반도 병참기지화 정책 [근대사] - 일제의 만주침략과 만주국 성립, 한반도 병참기지화 정책 일제는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해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켜서 만주를 침략한다. 일제는 군국주의 국가답게 대륙진출을 항상 염두에 두고 일찍이 1910년대 부터 간도에 병력을 보내는 등의 침략행위를 끊임없이 저질렀으나, 1930년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침략카드를 꺼내며 만주국 설립이라는 강경책을 꺼내든 것이다. 만주를 침략해 청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를 내세워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운 일본군은 그 야욕을 드러내 1937년에는 중일전쟁까지 일으켰다. 이는 일제의 중국대륙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하는 것이기도 했다. 전쟁 초기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중국의 도시들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승리는 도시라는 점과 철도라는 선.. 2023. 3. 10.
[독립운동사] - 독립군의 항쟁과 독립전쟁, 1920년대 무장항일투쟁 [독립운동사] - 독립군의 항쟁과 독립전쟁, 1920년대 무장항일투쟁 1920년대 간도와 만주지방에서는 독립군 단체가 형성되며 일제에 대항하여 독립전쟁을 시작하였다. 국외 지방에는 경술국치를 전후로 많은 독립지사들이 망명하여 독립군기지건설을 추진했는데 간도와 만주도 그 지역들 중 하나였다. 이곳은 국내와 가까운 지리적 이점과 이미 한인들이 많이 건너가 살고 있다는 여건 때문에 비교적 쉽게 독립군 근거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 특히 북간도는 강 하나만 건너면 바로 국내로 진입할 수 있는 근거리였기에 이러한 독립군 근거지로서 떠올랐다. 근거지에 한인들의 사회가 구축되고 1919년 3.1운동의 영향으로 1920년대 들어 독립군 무장 단체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였다. 대표적인 한인의 근거지로는 용정, 국자가, 봉.. 2023. 3. 8.
[독립운동사] - 1920년대 민족운동: 6.10만세운동과 광주학생운동, 민족유일당 운동과 신간회 [독립운동사] - 1920년대 민족운동: 6.10만세운동과 광주학생운동 1920년대 일제의 문화통치가 진행되면서 국내에서는 민족교육의 열기와 그에 따른 민족적 고양감이 고취되기 시작하였다. 고종이 승하할 때 일어났던 3.1운동과 마찬가지로 1920년대 민족운동의 열기가 뜨겁게 이어지던 때 승하한 순종황제로 인해 다시 만세운동의 열기가 분출되었다. 1926년 4월 26일 순종황제가 서거하자 국내의 청년들이 모여 새로운 만세운동을 조직하고 시위준비를 시작했다. 순종황제의 인산일인 6월 10일 행렬이 다가왔고, 당일 창덕궁에서 종로를 지나 동대문에 이르는 길에 수많은 애도 인파로 가득 찼다. 연희전문, 중앙고보, 경성대학 등의 학생 조직과 천도교에서 동원된 청년들은 인산 행렬이 지나가는 도중에 길목마다 격문을.. 2023. 3. 7.
[근대사] - 일제의 문화통치와 1920년대 국내 민족운동, 계몽운동의 전개 [근대사] - 일제의 문화통치와 1920년대 국내 민족운동, 계몽운동의 전개 1919년 고종의 인산일에 일어난 3.1운동으로 인해 조선총독부는 기존의 폭력적인 무단통치로는 조선을 효과적으로, 지속적으로 통치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2대 총독인 하세가와는 3.1운동을 폭력적으로 억압했다가 결국 3년만에 교체되었고, 3대 총독인 사이토 마코토가 취임하였다. 이들은 효율적인 식민지 경영을 위하여 무조건 억압하는 것이 능사라는 것이 아님을 알고 조선인들의 권리를 일부 인정하면서 민족적 활동도 일부 인정하였다. 이른바 ‘문화통치'의 시작이다. 이에 따라서 국내에서는 청년회와 교육 진흥 운동이 점차 일어나기 시작했다. 3.1운동 이후 전국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청년운동은 풍속 개량과 생활 개선 등의 운동으로.. 2023. 3. 6.
[근대사] - 일제의 폭력적 무단통치와 경제침탈 [근대사] - 일제의 폭력적 무단통치와 경제침탈 일제는 1905년 을사조약을 통해서 보호국화하고, 1910년 대한제국을 불법적으로 점령하여 일본의 식민지로 삼았다. 한국을 불법적이며 강제로 병합한 일본은 우선 설치되어있던 통감부를 조선총독부로 격상시키고 현직 육군대장중에서 총독을 임명하여 관할케 하였다. 조선 총독은 행정권뿐 아니라 법령의 제정, 관리임명, 군대 통수권, 재판소 감독권 등 식민지 안에서라면 왕과 같은 무소불위의 권위를 가지고 권력을 행사하였다. 총독은 이러한 권력을 바탕으로 실질적인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관리를 일본인으로 채우고, 전국의 지배채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행정조직을 정비하였다. 아울러 일제는 군대와 경찰력을 동원해 강압적인 통치를 진행했다. 산간 오지까지 헌병 분견소와 순사 파출.. 2023. 3. 5.
[독립운동사] - 3·1 운동의 배경과 과정, 결과 [독립운동사] - 3·1 운동의 배경과 과정, 결과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 일어난 거국적, 거족적 독립만세운동이다. 전국에서 계층을 불문하고 전개된 3·1운동은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일대의 사건이었다. 3·1운동을 통해 대한의 정신과 독립에 대한 의지가 살아있음을 만방에 떨쳐보였고, 그 결과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설립될 수 있었다. 나아가 일제에게 기존의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통치 방법을 바꾸게 할 만큼 큰 사건이었다. 1. 3·1운동의 배경 1910년 일제의 대한제국 강제병합 이후 한국의 의병과 열사들은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무단통치를 표방하면서 민족적 탄압을 가했고, 점차 국내에서는 독립운동이 힘들어졌다. 대한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국외에 거점을 마련하고 독립운동.. 2023. 2. 28.
[독립운동사] - 애국계몽단체의 국권수호운동 전개 / 신민회 / 국채보상운동 [독립운동사] - 애국계몽단체의 국권수호운동 전개 / 신민회 / 국채보상운동 1905년 을사조약을 전후하여 대한제국의 개화된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대중을 계몽시켜 실력 양성운동을 펼쳐야 한다는 의식이 확장되었다. 이들은 국가의 힘을 올리려면 대중이 깨어나야한다고 생각했고, 대한제국 곳곳에서는 계몽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졌다. 이들은 교육과 산업을 일으켜 실력을 길러 국권을 회복하는 길이 일제의 간섭을 뿌리칠 수 있는 가장 빠른 독립의 길이라 생각하였다. 계몽운동가들은 1904년 일제가 한국 내 황무지 개척권을 구실로 토지를 약탈하려하자 이들은 이것을 막기 위해 보안회를 조직하였다. 보안회는 이미 일제의 영향력에 들어간 정부가 할 수 없는 일제의 토지약탈에 저항했다. 또한 1905년 조직된 헌정연구회는 이준이 .. 2023. 2. 27.
[독립운동사] -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조선의 의병 항쟁, 을미의병 / 을사의병 / 정미의병 [독립운동사] -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조선의 의병 항쟁, 을미의병 / 을사의병 / 정미의병 일제는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삼기위해 다양한 형태의 침략을 전개해왔다. 경제적 침략, 정치적 침략을 병행하여 대한제국의 숨통을 조여왔다. 여기에 불법적으로 무력을 동원하여 대한제국의 숨통을 조여왔다. 이러한 일제의 침략에 대해 대한제국의 민중은 다양한 형태로 저항하였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직접적이고 강력한 민중의 저항은 의병활동이었다. 일제의 무력에 대항하는 민중의 움직임은 의병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무력 저항은 1895년 을미년에 처음으로 나타났다. 을미년에 일어난 항일 의병은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대한 반발로 일어났다. 을미의병은 양반 유생들을 필두로 국모를 시해한 일본인들을 응징하고, 양반이 가졌던 성리학적 .. 2023. 2. 26.
[미국사] - 미국 독립혁명의 시작과 미합중국의 설립 [미국사] - 미국 독립혁명의 시작과 미합중국의 설립 영국에서 청교도들은 카톨릭 신앙을 가진 스튜어트 왕조대에 천덕꾸러기 신세였다. 그들은 왕조의 전제정치와 종교적인 탄압을 피해서 새로운 땅인 아메리카로 이주하였다. 청교도와 함께 일부 경제적인 이득을 위해 이주하는 모험가나 경영인도 있었다. 이들은 힘겨운 정착과정을 거쳐 북아메리카 동해안 일대에 13개의 식민지를 건설하고 정착하였다. 영국의 13개 식민지는 각기 사정은 조금씩 달랐으나, 오히려 유럽에 비해서는 신분적, 경제적으로 매우 차이가 없었다. 부에 대한 경제적 기회도 충분하였고 사회적 유동성도 활발하였다. 영국은 이러한 식민지에 대해서 다른 식민지들과 마찬가지로 총독을 파견하고 관리하였다. 그러나 북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실제 정치는 총독보다는 식민.. 2023. 2. 22.
[독립민수] - 독립군이 사용한 기관총과 수류탄들 HTML 삽입 미리보기할 수 없는 소스 오늘은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할 때 사용한 기관총과 수류탄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독립군은 일본군에 비해 소수였기에 치고 빠지는 유격전에 특화되어 있었고 타국에서 힘들게 생활하는지라 물자부족과 무기부족에 시달렸습니다.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열정은 있었지만, 강력한 화력의 무기를 보유하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무기의 가격도 문제였지만 돈이 있다 하더라도 무기는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지요. 강한 화력을 가진 기관총과 수류탄은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독립군은 무기의 수와 질, 화력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소수지만 기관총을 구비해 운용했습니다. 그러나 기관총은 운용했지만 어떤 종류의 기관총을 사용했는지 기록에 남은 것은 일부에 불과합니다. 일제 기록에는 몇정의 .. 2023. 2. 16.
[유럽사] - 18세기 유럽의 인구폭발과 흑사병 [유럽사] - 18세기 유럽의 인구폭발과 흑사병 18세기 이전 유럽에서는 멜서스식 인구 조정론에 들어맞는 인구 성장을 보였다. 17세기의 경우 인구증가는 정상적인 경우 1년에 0.5%에서 1%만 보였다. 이 증가율은 얼핏 적어보이나 매년 1%씩 인구가 300년간 성장한다면 인구는 16배가 된다. 그러나 농업을 기반으로 한 18세기 이전의 농업적 유럽에서 이러한 증가는 실제로 일어나지 못했다. 전쟁은 물론이고, 가뭄과 홍수가 흉작을 초래했고, 조악한 농업 생산방식으로 인한 기근은 자주 일어났다. 기근이 들면 어김없이 이질과 천연두가 발생하여 많은 인명을 빼앗아 갔다. 17세기 전반기에 일어난 30년 전쟁은 독일 대부분의 지역에서 인구의 30% 이상을 감소시켰다. 독일 전체로 본다면 전체 인구의 40%가 감.. 2023. 2. 15.
[유럽사] - 17 ~ 18세기 유럽의 근대문화 태동과 과학혁명 [유럽사] - 17 ~ 18세기 유럽의 근대문화 태동과 과학혁명 17세기는 근대국가뿐 아니라 근대적 학문으로서 과학과 철학이 형성된 시기였다. 종교에 귀의해 만들어가던 인간의 문화는 인간 스스로 본연의 문화를 만들어간다는 믿음이 생겼다. 그 최전선에는 바로크 문화가 존재하고 있다. 바로크라는 말은 본디 17세기 건축양식을 가르키는 말이다. 장대함, 웅장함, 복잡하고 뛰어난 기교를 특징으로 한다. 바로크 양식은 비단 건축에만 국한되지 않고, 이 시대의 회화, 음악 등 전반적인 예술사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대표적인 건축물인 베르사유 궁전을 보면 기본적으로 질서와 안정을 나타내고 있으나 때때로 괴기하거나 격렬한 회화가 있어 불안정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회화에서도 바로크 사조가 엿보인다. 회화에서 바로크.. 2023. 2. 14.
[근대사] - 러일전쟁과 일제의 국권침탈, 을사조약과 군대해산 [근대사] - 러일전쟁과 일제의 국권침탈, 을사조약과 군대해산 대한제국이 성립되고 광무개혁이 진행되었으나, 한반도를 둘러싼 일본과 러시아의 대립은 갈수록 심해지고 날카로워졌다. 제국주의 열강은 자신들의 실익에 따라서 러시아와 일본의 편에 서서 서로를 지지했다. 프랑스와 독일은 러시아의 편을 들었고, 영국과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점차 팽창하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 편에 가담하였다. 특히 미국은 일본에게 조선의 영향력을 인정하는 대신 필리핀에서의 영향력을 상호 확증받았다. 이를 가쓰라 태프트 밀약이라고 한다. 영국의 경우 1902년 영일동맹을 맺고 가장 먼저 일본의 조선침략을 인정하였다. 영국과 미국의 동의 아래 일본의 국권침탈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일본은 한반도에서 영향력을 넓히고 있던 러시아를 .. 2023. 2. 13.
[근대사] -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대한제국의 성립과 독립협회의 불법화 [근대사] -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대한제국의 성립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두고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서 일어난 러일전쟁 승리 이후 일본은 1894년 조선에서 갑오개혁을 시행했다. 압도적인 무력을 가진 일본을 등에 업은 개화파에 의해 정권에서 물러난 명성왕후는 일본을 견제할 목적으로 러시아를 등에 업고 다시 권력을 가지려고 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에 반발하여 명성왕후를 암살할 계획을 꾸민다. 일본은 1895년 10월 8일 정부세력이 아닌 지금의 폭력배에 해당하는 낭인들을 동원하여 밤에 경복궁으로 침입, 명성왕후를 시해한다. 이를 을미사변이라고 한다. 이는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의 지휘아래 이루어진 것으로, 일왕의 결재가 한 보고서가 2005년에 발견되기도 하였다. 을미사변이 일어난 이후 고종은 자.. 2023. 2. 12.
[조선사] - 조선 내부의 갈등과 개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조선사] - 조선 내부의 갈등과 개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조일수호조약 체결 이후 조선정부는 근대적인 서양문물을 도입하기 위해서 개화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외교와 통상, 군사업무를 추진하는 개화 추진기구를 설치하고 별기군이라는 신식군대를 설치하여 서양의 앞선 무기와 군사기술을 배우려 했다. 또한 청과 일본의 근대적 문물을 보고 배우기 위하여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강화도 조약 직후 수신사를 보내고, 그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개화파를 위시하여 조사 시찰단을 편성해 일본으로 파견했다. 이들은 4개월에 이르는 시간동안 일본의 산업과 사회를 살펴보고 귀국하였다. 조선의 개화정책은 흥선대원군이 주장하던 기존의 척화에서 돌아선 것으로 최초의 개화정책이라는 점은 높이 평가 할 만 하다. 그러나 조선의 개화는 봉건적.. 2023. 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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