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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 광해군의 즉위와 인조반정, 폐모살제의 뜻 [조선사] - 광해군의 즉위와 인조반정, 폐모살제의 뜻 광해군은 1575년 선조와 후궁 공빈 김씨의 사이에서 둘째 서자로 탄생하였다. 선비의 정비인 의인왕후가 슬하에 자녀가 없었고, 장남이자 동복형인 임해군이 있었지만 그는 포악한 성정으로 인해서 왕이 될 재목이 되지 못했다. 또한 인빈 김씨의 소생인 의안군, 신성군 모두 일찍 요절하여 광해군의 왕위 계승서열을 능가하는 사람은 없었다. 선조의 적자 영창대군이 있었으나 그는 나이가 어렸고, 당시 임진왜란이라는 특수상황에서 분조 활동까지 거치며 산전수전을 다 겪은 광해의 왕위계승을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임진왜란 발발 이후 선조는 파천과 동시에 평양에서 광해를 세자에 책봉하였다. 그리고 선조와 함께 의주로 피난하다가 영변에서 갈라졌다. 광해는 평안도, 강원도.. 2022. 11. 28.
[한국사] - 신라의 발전과 부흥, 진흥왕의 영토확장 [한국사] - 신라의 발전과 부흥, 진흥왕의 영토확장 신라는 삼국시대를 이루는 고구려, 백제보다 전성기가 늦었다. 한반도 남쪽에 위치한 탓에 중국과의 교류가 적었고, 삼국 중 가장 발전이 뒤떨어졌던 신라는 6세기에 접어들면서 발전의 기반을 다져나갔다. 6세기 초 무렵 지증왕 때에는 우경을 실시하며 농업생산이 크게 늘어났다. 농기구가 개량되고, 소를 농사에 사용하는 우경이 본격화 되면서 생산량이 증대되었고, 또한 귀족들의 무분별한 순장을 금지하면서 노동력의 무의미한 손실이 적어졌다. 또한 지증왕대에 국호 신라를 정식으로 사용하였으며 대군주를 뜻하던 마립간이라는 칭호 역시 중국식 칭호를 받아들여 왕(王)으로 바꾸었다. 지증왕이 고대국가 신라의 기틀을 세웠다면 그 다음 왕인 법흥왕은 국가 내적인 체제를 완비하.. 2022. 11. 26.
[한국사] - 사로국의 등장과 신라의 건국, 발전 [한국사] - 사로국의 등장과 신라의 건국, 발전 사로국은 훗날 삼국중 하나로 발전하는 신라의 옛 이름으로 한반도 동남부에 위치한 경주 평야를 중심으로 발전한 진한의 소국 12국중 하나이다. 신라는 석, 박, 김 3성의 시조설화에서 나타나듯이 여러 세력 집단이 연합해 건국한 국가이다. 신라의 건국 설화에 따르면 사로국에 살던 6촌의 우두머리들이 하늘에서 내려 온 박혁거세를 왕으로 받들어 건국한 나라라고 한다. 여기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마와 난생설화가 추가된다. 이 사항은 신라는 박혁거세라는 외부의 세력이 기존 토착세력인 사로국 6촌과 함께 연합하여 건국한 나라라는 사실을 알게해준다. 신라에 이주한 외부세력인 이주민들은 철제 도구를 다를 줄 알았고, 이들이 가진 문화는 토착세력에 큰 영향을 주었고 지배 .. 2022. 11. 26.
[한국사] - 백제의 천도와 쇠락, 웅진시대와 사비시대 백제는 국가의 정비가 대략적으로 마무리되는 4세기에 백제는 관등제를 확충하고, 왕위계승도 부자상속으로 바꾸어 위계를 공고히 했다. 그러나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4세기 후반, 5세기 초반에 확충된 군사력으로 남방정책을 추진하자 백제는 급속히 쇠락하였다. 그러다가 475년 지금의 위례성을 빼앗기고 웅진으로 도읍을 천도할 수 밖에 없었다. 백제의 웅진천도는 고구려의 한성점령에 의해 단시간에 이루어진 급작스러운 천도였다. 이러한 웅진천도의 배경에는 당시 개로왕대 백제에서는 무모한 권력행사로 백제 지도층 분열이 원인였다. 게다가 백제가 고구려와 북위를 둘러싸고 펼친 외교전에서 실패한 것이 주효했다. 백제의 개로왕은 472년 북위에 고구려를 공격할 원군을 요청하였는데 이러한 백제의 외교는 고구려를 자극하는 결과를 낳.. 2022. 11. 7.
[한국사] - 백제의 전성기 [한국사] - 백제의 전성기 백제는 8대 고이왕대를 거쳐 4세기 근초고왕 때에 전성기를 맞이하여 영토를 크게 확장시켰다. 고이왕은 백제의 체제를 정비하고 중앙집권에 힘써 백제의 기틀을 잡고 발전을 이끌었다. 이러한 백제의 성장은 고이왕 이후의 왕들인 책계왕, 분서왕, 계왕으로 이어지며 이들의 노력은 13대 근초고왕대에 이르러 대대적인 정복사업으로 나타났다. 근초고왕은 동쪽 낙동강 유역과 전라도, 지리산 일대에서 가야의 소국을 정복하고 영산강 유역의 마한 소국들을 정복했다. 가야를 흡수하므로 인해 영토를 남해안까지 확대하였다. 당시 전라도 지역은 여전히 마한의 전통을 가진 소국들이 존재하고 있었고, 백제의 중앙집권 체제에 들어오지 않은 소국이 산재하고 있었다. 이곳에 근초고왕은 대외팽창을 통해 백제의 영향.. 2022. 10. 6.
[한국사] - 백제의 성립과 마한 백제의 지배층은 고구려에서 기원한다. 본디 마한은 목지국을 수장으로 소국들이 모인 연맹체였으나, 백제가 마한내에서 영향력을 넓히면서 목지국은 마한 수장의 자리를 내어놓게 되었다. 훗날 마한을 장악하는 백제는 고구려 남쪽 마한지역 소국에서부터 출발하였다. 청동기 시대부터 한반도 북방에서 수 많은 유이민이 남쪽으로 내려왔다. 그들 중 고구려에서 내려온 유이민들 중 일부가 한강 유역에 내려와 세운 나라가 백제이다. 백제의 건국 신화에 따르면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왕자가 고구려로 와 태자가 되자, 고구려 태생인 왕자 비류와 온조가 고구려에서는 더 태자가 되지 못함을 알고 세력을 이끌고 내려와 각각 미추홀과 위레에 자리잡았다고 한다. 미추홀에 자리를 잡은 비류의 세력은 차후에 온조의 백제.. 2022. 9. 29.
[한국사] - 가야 제국(諸國)의 성립과 쇠락 [한국사] - 가야 제국(諸國)의 성립과 쇠락 가야는 낙동강 서쪽 지방의 여섯 개의 연맹체로 건국되었다. 낙동강 서안은 작은 분지지형이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지형으로 구성되어 커다란 세력이 나타나기 어려웠다. 낙동강의 동쪽은 사로국, 즉 신라가 발흥하고 있었다. 가야의 건국 설화에는 가야 아홉 마을의 우두머리들이 무리를 이끌고 구지봉에 올라가 구지가를 부르면서 하늘에서 내려온 황금알을 얻었다고 한다. 그 알에서 여섯 아이가 태어났고 그들이 자라 가야를 다스리는 왕이 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가야 연맹체의 6가야 수장을 의미하는 존재였다. 6가야 중 가장 먼저 국력을 키운 것은 김해의 금관가야였다. 낙동강 유역의 하류 충적평야에서 농경문화를 기반으로 발달한 금관가야는 낙랑군, 왜의 교역의 중간지이자 중심지가 .. 2022. 9. 16.
[러시아사] - 러일전쟁과 니콜라이 2세의 러시아 [러시아사] - 러일전쟁과 니콜라이 2세의 러시아 러시아는 극동에서 공격적이고 모험적인 팽창을 계속해서 진행해왔다. 여기에는 1891년부터 1903년에 부설된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대표적이다. 만주와 중국, 한국을 연결하고 간접적으로 일본까지 러시아의 영향력을 미쳤던 철도는 극동지방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예였다. 이에 만주로의 진출을 염두에 두고 있던 일본은 이러한 러시아의 영향력 확대를 가만히 좌시하지 않았다. 당시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통한 근대화 성공으로 1894년에 있었던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동북아시아에서 자신의 패권을 위시했다. 청일전쟁의 마무리를 짓는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일본이 만주 진출을 염두에 두고 랴오둥 반도를 조차하려 하자, 러시아는 앞서서 프랑스, 독일과 함께 이러한 일본의.. 2022. 9. 15.
[한국사] - 고구려의 영토팽창과 전성기, 광개토대왕의 등장 고구려는 백제와의 평양성 전투에서 고국원앙의 전사 이후 내부적인 정비를 마치고 다시금 영토 팽창을 시작했다. 이는 당시 중국이 분열되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의 삼국간의 경쟁에서 주도권을 잡으면서 5세기에 최전성기를 펼쳤다. 이때가 그 유명한 광개토왕, 장수왕, 문자왕의 치세로 고구려는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하고 삼국시대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였다. 고구려의 광개토왕은 18세의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올라 안정된 정치 기반을 바탕으로 대대적인 정복사업을 펼쳤다. 북으로는 거란의 일파인 비려를 정멀하고 요하를 넘어 요동을 점령해 영유권을 확보했다. 고구려는 이 원정에서 600-700여개에 달하는 촌락을 파괴했다. 북쪽 변경을 정비한 이후 기수를 남으로 돌렸다. 고국원왕이 근초고왕에 의해 .. 2022. 9. 14.
[러시아사] - 차르 니콜라이 2세의 등장과 반개혁정치 [러시아사] - 차르 니콜라이 2세의 등장과 반개혁정치 알렉산드르 3세가 서거하자 그의 장남인 니콜라이 2세가 1894년 러시아의 차르로 즉위하였다. 그는 1868년생으로 최후의 차르로 불리우는데, 당시 니콜라이는 러시아를 둘러싸고 돌아가는 국제적인 정세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차르를 기반으로 한 전통적인 권력 개념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니콜라이는 자신, 즉 통치자는 신에의해서 축복 받고 있으며 자신의 국민들과 특별한 유대를 맺고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전통주의적 시대의 복식과 정치질서를 추구했다. 니콜라이는 러시아의 전통에 반하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회의적이었으며 반개혁적 정치질서를 가지고 통치를 진행했다. 니콜라이 3세는 부친의 반동적인 정책을 완화 시킬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는데 이러한 기대.. 2022. 9. 13.
[러시아사] -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과 알렉산드르 3세의 즉위 [러시아사] -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과 알렉산드르 3세의 즉위 크림전쟁의 패배 이후 러시아의 개혁에 착수했던 알렉산드르 2세는 때때로 그 개혁에 의구심을 가지기도 하였으나 계속해서 개혁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러시아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했으나 그의 개혁이 모두에게 달가운 것은 아니었다. 1881년 알렉산드르 2세는 의회를 개설해 달라는 요구를 받아들여 의회 기구를 개설하기 위해 마차를 타고 궁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날 공화주의자(나로드니키) 인민의 의지당이 계획한 폭탄 테러에 맞닥뜨리게 된다. 공화주의자들에 의해 첫번째로 투척된 폭탄은 호위병과 마부에게만 손상을 입혔다. 황제의 마차는 나폴레옹 3세가 선물한 방탄마차였기에 첫번째 폭탄에 의해 황제가 입은 피해는 전무했다. 그러나 상황을 살펴보고 다친 .. 2022. 9. 4.
[한국사] -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한국사] -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조선이 멸망한 108년 이후 조선의 영역에서 여러 나라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조선의 강역이었던 압록강 중류 지역에서 거주하던 맥족이 새로운 정치체제를 수립하고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기원전 37년 경 성립된 고구려는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킨 이후에 설치한 현도군을 몰아내며 5부라는 연맹체를 구성하여 국가를 성립했다. 고구려의 시조로 일컬어 지는 사람은 주몽이다. 기원전 1세기경 북쪽에 위치한 부여에서 자란 주몽은 무리를 이끌고 부여에서 남쪽으로 이주해 세력을 만들었고 고구려 지역의 토착민인 소노부를 제압하고 계루부 소속으로 연맹체에 속해 주도권을 장악했다. 고구려의 연맹체는 여러 소국과 집단으로 점철되어있었으나 결국 총 5개의 집단으로 정리되.. 2022. 8. 29.
[러시아사] - 알렉산드르 2세와 러시아의 아시아 지역 팽창 [러시아사] - 알렉산드르 2세와 러시아의 아시아 지역 팽창 러시아 제국은 알렉산드르 2세의 통치기에 아시아로의 진출을 황장하여 진정한 식민지 강국으로 변모했다. 그전에도 이미 폴란드와 코사크 인 등 다양한 다민족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시아 확대를 통해 더욱 제국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에 다른 유럽 열강들은 러시아의 영토팽창에 신경을 쓸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러시아가 영토를 확장하는 곳은 아시아로 캅카스, 중앙아시아, 극동 지역이였기에 열강은 효과적으로 그 팽창을 저지 할 수 는 없었다. 또한 차르 정부는 알래스카까지 영토를 확장했으나 이는 1867년에 미국에 720만 달러에 팔아 넘겼다. - 카프카스 지역과 러시아 19세기 전반에 걸쳐서 조지아(그루지야)가 러시아에 종속되고, 페르시아와 투르크로부.. 2022. 8. 27.
[한국사] - 고조선의 발전과 한제국의 조선침략 고조선은 춘추전국시대에 조선으로 이주해온 중국 유이민으로부터 받아들인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주변에 산재한 주변의 소국들을 정복하면서 국가의 기틀을 다져나갔다. 또한 관료제도를 정비하고 북방의 흉노와 동맹을 맺으면서 중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나갔다. 그러던 중 기원전 128년 예족의 통치자인 남려가 28만의 백성을 이끌고 요동에서 한나라에 복속되길 청했다. 한은 이를 받아들여 요동에 창해군을 설치하고자 했으나 곧 주변 주민들의 저항으로 폐지되었다. 한나라가 조선에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자 이를 두고 조선의 지배층은 분열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자 고조선 내 중심세력이 영향력을 잃기 시작했고, 동시에 고조선 내 중심세력이 영향력을 잃자 한나라는 흉노와 조선의 관계를 끊어내기 위해 조선으로.. 2022. 8. 26.
[한국사] - 고조선의 등장과 발전 고조선은 기원전 7세기 무렵부터 기원전 108년까지 존속한 국가이다. 본래의 국호는 조선이다. 1392년 이성계에 의해 건국된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후대에 옛 고(古) 한자를 넣어 고조선이라 부르게 되었다. 조선의 영역은 한반도 북부와 지금의 중국 랴오닝 성에 걸쳐서 있었다. 조선이라는 국호는 중국 한대에 쓰여진 ‘관자’라는 책에 처음 등장한다. 책의 내용이 기원전 7~6세기의 상황을 전달하는 책이므로 적어도 고조선이 그때 당시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관자'는 저자가 관중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관중의 언행을 기록한 것이며 이것은 춘추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계속해서 수정되었다. 사기에도 고조선이 등장한다. 당시 고조선은 중국 춘추시대 제나라와 교역을 했다고 한다. 제나라는 산둥반도에 위치한 국가로.. 2022. 8. 25.
[한국사] - 한국의 청동기 시대와 고조선 한국의 청동기 시대는 기원전 1000년 무렵 시작된다. 현재 중국에 있는 요녕성과 길림성 일대의 지역과 한반도 여러 곳에서 청동기 유적이 발견되고 있다. 한반도로 유입된 청동기 문화는 남만주를 거쳐서 한반도로 들어왔다. 이때 이 청동기 문화를 향유한 이들이 예족과 맥족, 이른바 예맥족이다. 한반도와 만주일대에 거주하던 예맥족의 청동기 문화 중 대표적인 것은 칼날이 비파모양을 닮은 비파형 동검이다. 비파형 동검은 장식이 없고, 기하무늬가 새겨진 청동거울이나 단추등 작은 청동 장식품과 함께 나온다. 그런데 기원전 4세기 무렵부터 칼날 모양이 길고 가느다란 모양으로 변경된다. 이를 세형동검이라 부른다. 이러한 동검의 발굴 위치는 청동기문화를 향유했던 고조선의 위치를 가늠하게 하는 지표이기도 하다. 청동기가.. 2022. 8. 23.
[중앙아시아사] - 러시아 제국의 남진과 중앙아시아 중앙아시아에 대한 러시아의 공식적인 접촉은 1550년대 말 영국 상인 젠킨스에 의해서 최초로 이루어졌다. 영국은 경제적으로 러시아와 교류를 이어나갔는데 이러한 연유로 영국의 젠킨스는 러시아의 차르 이반 4세의 친서를 가지고 남쪽에 위치한 히바 칸국과 부하라 칸국을 방문하였다. 당시 중앙아시아는 중소 칸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젠킨스의 방문 이후 16세기말 까지 공식적인 사신교환은 물론 러시아와의 교역량도 꾸준하게 증가하였다. 이후 1600년대 들어서도 이들은 각자의 목적에 따라서 교류를 계속 유지하였다. 1700년대 들어서 러시아는 스웨덴과 대북방전쟁을 진행하며 어마어마한 전쟁자금을 충당하기 위해서 다양한 방법을 시도한다. 그중 러시아표트르 대제에 들어간 소문들 중 하나는 중앙아시아에서 황금이 나온다는 .. 2022. 8. 19.
[중앙아시아사] - 청제국의 중앙아시아 정복과 야쿱 벡의 반란 청 제국은 러시아와 네르친크스 조약으로 동쪽의 우환을 제거했다. 그리고 서쪽으로 눈을 돌려 건륭제 때인 1757년 준가르의 아무르사나를 조혜로 하여금 격파하고 난 뒤 톈산 남북의의 초원과 사막지대를 모두 정복하였다. 그리고 이곳을 새로운 영역이라는 뜻의 신강(新疆)이라고 불렀다. 신강이라는 이름은 청이 새로운 영토를 얻으면 붙이는 일반명사였다. 이곳은 "서역신강"이었다. 청은 기존의 편제와 달리 신강은 성으로 편제하지 않고 군사적인 특별구역으로 설정하였다. 청 제국에서 멀리 떨어진 만큼 민관이 아닌 군관을 배치하고 군대를 주둔시켰다. 또한 이 구역을 천산을 기준으로 북로, 남로, 동로로 분할하여 통치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다시 유목민이 정착할 수 없게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둔전과 요새를 건설하였다. 또한.. 2022. 8. 18.
[중앙아시아사] - 청과 러시아의 국경분쟁과 시베리아 진출 몽골 울루스의 킵차크 칸국이자 주치 울루스의 속령에 속해있던 모스크바 공국은 이른바 "타타르의 멍에"로 불리우는 피지배 상황에서 오랜시간 몽골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그러나 몽골이 쇠퇴하고 러시아의 쿨리코보 전투 이후 점차 몽골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러시아는 16세기 중반 볼가강 유역의 킵차크 칸국의 군소정권인 카잔 칸국과 아스트라한 칸국을 공격해 동쪽 방면으로의 진출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1582년 예르막이 코사크인 800명과 우랄 산맥 부근의 시비르 강을 건너면서 러시아의 시베리아 진출이 시작된다. 시베리아라는 지명 역시킵자크 칸국의 후예국인 시비르 강 유역의 시비르 칸국에서 나온 것이다. 러시아는 이때부터 시비르 칸국을 공격하면서 약 70년에 걸쳐서 동쪽으로 진출했다. 1586년 모스크바 공국은 튜멘.. 2022. 8. 16.
[러시아사] - 알렉산드르 2세와 러시아의 농노제 개혁 [러시아사] - 알렉산드르 2세의 등장과 러시아의 농노제 개혁 (1855-1881) 유럽의 헌병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억압했던 러시아 차르 니콜라이 1세는 1853년 발발한 크림 전쟁으로 인해 무너지게 되었다. 러시아의 지나칠 정도의 자유주의, 민족주의 억압과 팽창주의 확장이 오히려 유럽 국가들에게 경계심을 불러일으켰고, 러시아가 유럽에서 고립당하게 된 것이다. 니콜라이 1세는 크림전쟁에서 러시아군이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참패를 당하기 시작하자, 군사적 정치적 타격을 입은 채 실의에 빠졌다. 그는 비가 오는 날 크림반도로 출진하는 군대를 사열하다가 폐렴으로 쓰러져 1855년 생을 마감했다. 크림전쟁은 1856년 끝났다. 알렉산드르 1세는 37세의 나이에 부친인 니콜라이 1세의 뒤를 이.. 2022. 8. 12.
[중앙아시아사] - 여진의 흥기와초원의 통일 16세기 후반 여진은 통합되지 않고 건주여진, 해서여진, 야인여진 등 3개의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중 건주여진에서 다시 5부로 나뉘어지고 5부 중 완안부에 속했던 누르하치는 건주여진의 나머지 4부를 모두 통합하고 건주여진의 지배층으로 부상했다. 누르하치가 건주여진을 통일하자 건주여진의 통일에 놀란 해서여진 4부(여허부, 하다부, 울라부, 호이파부)는 몽골에 속한 호르친부와 내할하 5부 등과 연합하여서 1593년 누르하치의 건주여진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이 전투에서 누르하치는 연합 세력을 물리치고 승리하였다. 할하 몽골인들은 1603년 건주여진의 누르하치에게 칸이라는 존호를 바쳤고 1616년 만주에서 여진을 완전히 통합한 누르하치는 청 제국의 전신인 후금을 건국한다. 1626년 누르하치의 뒤를.. 2022. 8. 6.
[중앙아시아사] - 몽골 다얀 칸의 등장과 몽골의 재통일 1453년 타이시에서 칸에 오른 에센은 소위 황금씨족, 즉 징기즈칸의 혈족이 아니었기에 칸에 오른 해 바로 피살된다. 칸을 자칭했던 에센이 살해되자 몽골 초원에는 명목적인 칸은 있으나 여러 부족들로 세력이 나뉘어져 유력 수령들이 서로 대립하는 혼전 양상이 펼쳐졌다. 이런 상황에서 몽골초원에 산재하던 다수의 유목민이 정치적 혼란을 피해 중국과 가깝고 땅이 비옥하여 가축을 먹일 풀이 풍부한 내몽골 오르도스 지방으로 모여들었다. 15세기 후반 부족의 수령 벡 아르슬란은 인근의 다른 수령들을 제압한 뒤 1475년 만두굴을 칸으로 옹립한다. 그리고 자신은 국정을 총괄하는 타이시가 되어 권력을 휘둘렀다. 그러나 만두굴 칸은 허수아비에서 만족하지 않고, 곧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뒤 벡 아르슬란을 축출한다. 만두굴 .. 2022. 7. 23.
[중앙아시아사] - 서몽골 오이라트의 등장과 발전 [중앙아시아사] - 서몽골 오이라트의 등장과 발전 명은 중원을 회복한 뒤 막북으로 도망간 북원을 공격했다. 북원이 명나라의 거듭된 원정으로 인해 점차 쇠락의 길을 걷자 서몽골에 위치했던 부족 오이라트는 예수데르를 지원하여 그를 새로운 칸으로 앉힌다. 그러나 제국의 실권과 권력은 오이라트의 부족 수령들이 모두 가진 상태였다. 결국 북원이 붕괴하고 동몽골에서 황금 씨족인 징기즈칸의 일족이 몰락하자 서몽골의 오이라트는 초원을 장악할 기회를 잡았다. 본디 서몽골의 오이라트는 징기즈칸 시대에 몽골에 복속하고 부족의 정략결혼을 통해 제국에 협력한 부족이었다. 그러나 동몽골 황금씨족인 징기즈 일족이 몰락하고 명이 건국되어 나타나 북원에 대한 원정을 거듭하자 이들은 결국 명에 협력했다. 오이라트를 이끄는 세명의 수령.. 2022. 7. 15.
[중앙아시아사] - 몽골제국 이후의 동아시아와 오이라트 [중앙아시아사] - 몽골제국 이후의 동아시아와 오이라트 주원장이 명을 건국하는 1368년에 몽골인들은 대도와 상도를 명군에게 함락당했다. 몽골인들은 자신들이 거주하던 중국에서의 영토를 상실하고 초원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북원이 건국되었지만 몽골제국은 1487년 다얀 칸이 즉위하여 재통일을 할때까지 120년간 내전 상태로 들어간다. 토곤 테무르 칸은 명군이 응창을 기습할때 가까스로 몸을 피해서 측근만을 이끌고 막북 몽골 초원의 카라코룸으로 대피했다. 토곤 테무르 칸을 북원의 1대 칸으로 보기도 한다. 1370년 사망한 토곤 테무르 칸을 이어 아유시리다라 칸은 전열을 가다듬어 명군의 군사적 공세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한다. 명나라 홍무제는 1372년 봄 15만 대군을 세 갈래로 나누어서 출병시켰다. 각.. 2022. 7. 11.
[중앙아시아사] - 몽골 제국의 쇠퇴와 종말 [중앙아시아사] - 몽골 제국의 쇠퇴와 종말 세계를 호령했던 몽골제국의 세계지배는 사실상 14세기 중반을 전후하여 붕괴하기 시작했다. 제국 붕괴의 조심은 본격적으로 지배체계가 무너지기 20~30년 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각 울루스에서는 칸의 권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차가다이 울루스에서는 1326년 케벡 칸이 사망한 뒤 극히 짧은 기간만을 통치하고 단명한 칸들이 줄을 이었으며 타르마시린 칸은 이슬람으로 개종했다는 이유로 폐위되기도 했다. 내부적인 갈등과 균열로 인해서 차가다이 울루스는 1340년대 후반 동서로 분열되었다. 훌레구 울루스 또한 마지막 군주 아부 사이드의 20년 치세동안 어느정도 안정된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나 이는 권신들의 세력 균형을 위한 일시적인 안정이지 울루스 칸의 권력이 강해서가.. 2022. 7. 7.
[중앙아시아사] - 몽골제국의 칸국들: 훌레구 울루스 (일 칸국) [중앙아시아사] - 몽골제국의 칸국들: 훌레구 울루스 (일 칸국) 우구데이 가문의 칸과의 경쟁을 통해 왕위에 오른 툴루이의 아들 뭉케 칸은 자신의 동생인 훌레구에게 줄 땅을 분봉하기 위하여 중동 원정을 명령한다. 1255년 훌라구는 군사를 이끌고 중동원정을 시작한다. 이 원정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랍 이슬람권의 중심지인 아바스 왕조의 수도 바그다드를 정복하는 것이었다. 훌레구는 1255년 출발하여 중앙아시아의 여러 도시들을 정복하고 2년 뒤인 1257년 11월 훌라구의 군대는 마침내 바그다드에 도착하여 성을 포위했다. 아바스 왕조의 마지막 칼리파 알 무스타심은 몽골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바그다드를 정복한 몽골 군은 도시를 무슬림을 학살하고 도시는 약탈한 후 불태웠다. 이렇게 아바스 왕조는 멸망하였다. 아바.. 2022. 6. 22.
[중앙아시아사] - 몽골울루스의 칸국들: 주치 울루스 (킵차크 칸국) 징기즈칸은 주치를 장자로 규정하였으나 그에게 혈통문제는 계속해서 문제화 되었다. 그가 실제로 징기즈칸의 자식인지에 대한 논쟁은 주치를 일찌감치 칸 울루스의 후계자 선정 문제에서 떼어놓았다. 주치는 우구데이와 혈통 문제로 크게 다투고 모욕을 당한 후 카안 울루스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중앙아시아에 주치 울루스, 킵차크 칸국을 세우고 그곳을 통치한다. 주치의 아들 바투는 1230년대 서방원정을 지휘한다. 서방원정의 결과로 킵차크 초원을 정복하고 러시아를 속령화 하였다. 우랄 산맥을 중앙에 둔 상태로 거대한 영역을 다스리게 된 주치 울루스는 이후에 역사에서 킵차크 한국, 킵차크 칸국으로 불리게 된다. 주치 울루스는 두개로 나누어 좌익과 우익으로 통치되었다. 좌익은 주치의 맏아들 오르다가 첫 칸을 맡았고 우익.. 2022. 6. 21.
[중앙아시아사] - 몽골의 칸국: 차가타이 울루스 [중앙아시아사] - 몽골의 칸국들: 차가타이 울루스 징기스칸이 1207년 부터 1211년 자제 분봉을 실시해서 차가다이가 받은 최초의 봉지는 알타이 산지 부근이었다. 이 알타이 산지 부근에 받은 초봉지는 이후에 서방원정으로 크게 확장되어 알말릭과 쿠야스 부근에 다다르게 되었고 곧 사마르칸드와 부하라에 이르는 지역까지 모두 포괄하게 되었다. 차가타이는 징기즈 칸의 둘째 아들이고, 차가타이 칸국의 칸을 처음으로 자처한 훌레구는 그의 손자였으며, 차가타이 칸국의 제3대 칸이 되는 예수 몽케는 그의 아들이었다. 차가타이 울루스는 울루스들 사이에서 중앙에 자리잡게 되어 중앙 울루스라고 불리기도 했다. 차가타이 울루스의 이러한 입지조건은 몽골 제국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변동에 계속해서 영향을 받았고 칸의 권력 안정.. 2022. 6. 20.
[중앙아시아사]- 몽골제국 톨루이 가문과 쿠빌라이의 즉위 [중앙아시아사]- 몽골제국 톨루이 가문과 쿠빌라이의 즉위 1251년 징기즈칸의 4남인 톨루이 가문은 징기스칸이 직접 후계로 정한 우구데이 가문에게서 자신들의 후계로 카안의 자리를 빼앗아 왔다. 뭉케 카안이 1259년 7월 사천 조어산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카안의 갑작스러운 사망은 카라코룸에 다시금 계승 문제로 인한 긴장케하였다. 이번 계승 분쟁은 뭉케의 두 동생인 쿠빌라이와 아릭 부케가 경합을 벌였다. 뭉케카안이 갑작스럽게 사망할 당시 쿠빌라이는 남송 원정군을 이끌고 남 중국에서 화이수이를 건너려던 참이었고 아릭 부케는 제국의 수도인 카라코룸에서 후방 업무를 총괄하고 있었다. 카안의 사망소식이 알려지자 쿠빌라이는 남송원정을 중단하고 북상하다가 도중에 독자적으로 개평에서 쿠릴타이를 열어 1260년 4월.. 2022. 6. 18.
[중앙아시아사]- 몽골 제국 왕권 계승 전쟁의 종식 징기즈칸의 손자이자 툴루이 계의 적통인 쿠빌라이칸은 1260년 몽골제국의 5대 칸에 올랐고, 대원제국을 설립했다.1271년의 일이다. 쿠빌라이 칸은 재위 내내 제국내의 반란에 시달려야했다. 앞선 1260년 즉위 당시 아릭부케와의 갈등으로 몽골 제국은 왕권 계승전쟁에 휘말렸다. 쿠빌라이는 1260년 아릭 부케를 토벌한다고 선언하고 그해 6월 아릭 부케의 세력 일부를 쓰촨성 부근에서 제거하였다. 또한 자신의 정통성을 과시하며 자신이 적법한 계승자임을 발표했다. 아릭 부케는 카라코룸에서 쿠릴타이를 열고 쿠빌라이를 비난했다. 두 세력은 계속해서 카라코룸을 두고 격돌 했으며 이 일대는 황폐화 되었다. 또한 싱안링 산맥 울루스들의 맹주 나얀은 쿠빌라이가 일본 원정을 추진하면서 이 지역에 대한 징발과 통제를 강화하고.. 2022. 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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