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전체 글293 [중국사] - 청 몰락의 시작, 아편전쟁 [중국사] - 청 몰락의 시작, 아편전쟁 19세기 들어와 청왕조와 중국 사회는 안정과 번영의 시기를 지나, 이전과는 다른 쇠퇴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장기적인 평화에 따라 늘어난 인구는 19세기에 세계인구의 1/4를 차지하는 4억 5000만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를 지탱해야할 사회 시스템은 이미 낡아버린 청조의 것이었고, 물적 기반 역시도 미약했다. 4억에 이르는 인구를 부양할 자원의 개발이나 생산성 향상, 기술 발전은 인구의 증가 속도보다 느렸고, 이는 사회적 불균형과 위기를 부르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민중의 반란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인구의 증가 압력을 버티지 못한 생태계도 붕괴하여, 산사태, 가뭄,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가 빈번히 일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에 대응해야만 하는 청조의 능력은 너무.. 2024. 9. 21. [중국사] - 청대 백련교도의 난, 청의 백련교 진압 [중국사] - 청대 백련교도의 난, 청의 백련교 진압 백련교는 남송 시대에 창설된 백련종에서 기원한다. 기본적으로는 불교로, 미륵신앙이 함께 결합하면서 청 정부에 대한 반체제적인 색채를 띄게 되었다. 여기에 마니교의 평등주의와 금욕주의가 함께 더해지면서 종말론적 메시아 신앙을 가진 백련교가 탄생하였다. 여러 교리가 통합된 백련교는 명대에 민중 반란의 주류를 이루었으나, 청이 대륙을 정복하고 치세를 이루는 동안에는 민간에 숨어들어 세를 넓히고 있었다. 이후 사회가 혼란해지자, 민간에 잠복하고 있던 백련교는 수면위로 올라와 반란을 일으키는 군벌들의 종교적 지지층이 되어주었다. 가경제 치세 연간에 백련교 반란은 섬서성 남부, 사천성 동북부, 호북성 서부의 산악지역, 하남성, 감숙성의 산악지대에서 발생하였다. .. 2024. 9. 21. [중국사] - 청 건륭제 치세와 대일통사상, 청의 황금기 [중국사] - 청 건륭제 치세와 대일통사상, 청의 황금기 옹정제는 1735년 사망했다. 그리고 그 후계로 옹정제의 아들인 24살의 보친왕 홍력이 건륭제로 즉위했다. 건륭제의 치세 60년은 청조의 최대 전성기이자 대일통을 이룬 시기라고 평가 받는다. 여기서 말하는 대일통은 영토적 통일뿐만 아니라 정치적, 문화적 이념까지 포함하는 큰 규모의 통일이다. 청은 산해관에서 명과 대치할때부터 대일통의 개념을 인식하고 있었다. 당시 홍타이지 시대에 청은 내몽골을 병합하였고, 이를 통해 대일통의 개념을 명분으로 전쟁수행에 필요한 인력과 자원을 공급받기도하였다. 청은 북방뿐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도 군대를 보내어 변방에 대한 수비를 선제적, 공격적으로 펼쳤다. 앞서 말한 내몽골, 외몽골뿐 아니라 서북지역의 신강, 청해를.. 2024. 9. 20. [중국사] - 청대 옹정제의 개혁과 개토귀류 [중국사] - 청대 옹정제의 개혁과 개토귀류 청은 강희제 연간에 전성기를 누렸다. 강희제는 61년이라는 오랜기간동안 통치하며 안정된 황권을 바탕으로 국가를 경영할 수 있었다. 1722년 강희제가 사망하면서 그의 후임으로 4남인 옹정제가 즉위하였다. 옹정제는 치밀하면서 성실하기까지 한 성격으로 자신의 정치적 세력을 꾸준히 모으며 황제가 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 후 강희제가 붕어하자 황좌를 놓고 대립각을 세우던 8황자, 9황자 10황자, 14황자를 창춘원에 감금시켜버리고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황좌에 오른다. 옹정제의 통치기간은 겨우 13년이나 강희제 연간 말기에 나타나던 사회의 혼란상을 다시 바로잡은 것으로 그 업적을 치하하는 평이 많다. 그리고 뒤이어 나타나는 건륭제의 치세를 준비한 시기라고 평하기.. 2024. 9. 19. [중국사] - 청의 전성기와 강희제의 시대 [중국사] - 청의 전성기와 강희제의 시대 후금을 청으로 만들고 기틀을 다진 홍타이지가 죽고 그의 아들인 순치제가 산해관을 돌파한다. 순치제는 어린나이에 즉위하여 숙부인 도르곤의 섭정을 받았으나, 멸망한 명의 뒤를 이어서 청의 내실을 공고히하고 통일국가로서 기틀을 마련하였다. 순치제가 산해관을 돌파한 이후 중원으로 들어온 청은 투항한 명의 장군 오삼계, 상가희, 경계무를 왕으로 봉하고 막대한 재정을 지원하였다. 순치제 이후 1661년 청의 4대 황제 강희제가 8세의 어린나이로 즉위한다. 강희제는 14살의 나이에 친정을 시작하여, 내치와 외정 양 측면에서 눈부신 업적을 쌓았다. 강희제가 있었기에 청은 중국대륙을 온전히 지배할 수 있었다. 강희제는 이들과 함께 남아있는 반청세력을 청소했다. 그러나 반청세력이.. 2024. 9. 18. [중국사] - 송나라의 중국 통일과 새로운 적, 거란 [중국사] - 송나라의 중국 통일과 새로운 적, 거란 예로부터 내륙 아시아 초원지대에는 수많은 유목민족이 거주하였다. 유목민족들은 말, 양, 염소, 낙타등의 가축을 기르며 중국의 북쪽 초원지대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중국은 이러한 유목민들이 세력을 결집하지 못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하며 관리하였는데, 중국이 혼란에 휩싸이게되면 유목민이 힘을 모을 기회가 생기곤 했다.10세기 초에 시라무렌 강, 랴호허 강 두개의 강 유역에는 거란이라는 부족이 있었다. 평화롭게 살아가던 거란은 여덟부족이 연맹체를 구성하고 있었으나 9세기 후반 점차 통일의 기운이 일어난다. 당시 당은 황소의 난과 환관의 정치로 내부의 혼란에 신경쓰느라 변경에 위치한 거란까지 신경을 쓰지 못했다. 거란은 이런 상황을 틈타 세력을 규합할 수 있었다.. 2024. 8. 22. [중국사] - 송 태조 조광윤과 중국통일 [중국사] - 송 태조 조광윤과 중국통일 송나라를 세운 조광윤은 중국 5대 10국 시대를 마무리 한 후주의 장군이다. 송 태조 조광윤의 출신은 무관 출신이었다. 그의 집안은 무관출신이었는데 아버지 조홍은은 앞선 왕조인 후당, 후진, 후당 등 3조를 섬기며 군관으로 근무한 고위급 지위관이었다. 애초에 당나라의 관료 가문이었던 조광윤의 선조는 증조부 때부터 제위 찬탈을 노리는 군벌 휘하에서 군관으로 공로를 쌓았고 그의 아버지 조홍은은 당시 상당한 고위직인 근위대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아버지의 길을 따라 20세의 나이에 군에 입대한 조광윤은 후한의 장수였던 추밀사 곽위의 막료가 되었다. 그는 처음에 후한의 대장 곽위의 휘하에 있으면서 공을 세웠다. 후한에 속해 군공을 세우던 도중 후한의 황제 은제 유승우가 .. 2024. 8. 22. [중국사] - 중국사 최후의 분열, 5대 10국의 시대 [중국사] - 중국사 최후의 분열, 5대 10국의 시대 주전충은 가난한 농부출신으로 황소의 난이 발발하자 그의 무리에 가담하여 장안함락에 공을 세웠다. 그가 두각을 나타내자 황소는 그를 경계하고 있었다. 황소는 장안을 함락하고 대제를 세웠으나, 대제는 정치가로서 자질이 부족하여 자멸의 길에 들어섰다. 주전충은 촉에 있던 당나라 장군 왕중영과 내통하여 장안에서 황소를 격퇴하였다. 이 전공으로 주전충에게는 당나라로부터 사례가 내려졌고, 이때 전충이라는 이름도 받았다. 주전충은 절도사로 즉위한 후, 당나라 내부에서 주도권 쟁탈전을 벌였고, 여기서 승리하여 실권을 장악한다. 당시 당나라는 장안 일대만을 보유한 지방정권에 불과했고, 각지에서는 절도사들이 군웅할거하고 있었다. 907년 주전충은 당 소선제로부터 .. 2024. 8. 22. [중국사]- 세계 제국의 붕괴, 당나라의 멸망과 황소의 난 [중국사]- 세계 제국의 붕괴, 당나라의 멸망과 황소의 난안녹산의 난 이후 당나라의 국정은 혼란스러워졌다. 당 중앙정부와 번진의 갈등, 조정 내부에서의 환관세력, 권력을 향한 암투의 심화와 이에 따른 민생의 어려움이 모두 겹쳐진 결과였다. 변경에서 당을 에워싸듯 설치되었던 번진은 내지로 옮겨졌다. 본디 번진의 역할인 변경의 방어가 아닌 수도 근거리에서 반란 진압을 하기 위해서였다. 50개의 번진 가운데 40개의 번진이 내지로 옮겨졌다. 내지의 번진 가운데 일부는 징세, 사법, 군사등을 독자적으로 행사하는 소왕국적 면모를 가진 번진도 있었다. 특히 천웅, 성덕, 노룡 등의 하북 삼진은 노골적으로 당 중앙정부에 저항했다. 번진을 당 중앙정부에 순응하게 만드는 작업 즉, 번진간섭은 당 왕조에게는 사활이 걸린 .. 2024. 8. 22. [중국사] - 후금, 만주족의 등장과 청나라의 중원 정복 [중국사] - 후금, 만주족의 등장과 청나라의 중원 정복 명이 사회적 혼란에 휩싸여 주변 민족에 대해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자 만주에서 새롭게 세력이 흥기하였다. 이들은 스스로를 만주족이라 부르며 활동하였다. 만주족의 기틀을 마련한 사람은 누르하치였다. 그는 건주여진에 속한 건주좌위에 속했고, 여진족의 지배층 출신이었다. 당시 명의 요동 대장 이성량 휘하에서 세력을 키워왔다. 그러나 여러가지 가설과 추측이 있지만, 명이 누르하치의 조부와 부친을 살해한 것을 구실로 누르하치는 명 세력과의 갈라선다. 그 후 누르하치는 군사를 일으켜서 3개 세력으로 나뉘어져 있던 여진을 통일했다. 만주에 흩어져서 살던 건주여진, 해서여진, 야인여진을 규합한 누르하치는 세력을 결집시키고, 여진을 만주족이라는 새로운 민족으로 통합.. 2024. 8. 19. [중국사] - 명나라 말기 이자성의 반란과 청나라의 명나라 정복 [중국사] - 명나라 말기 이자성의 반란과 청나라의 명나라 정복 명나라가 세워진 이후 200년이 지나 16세기 말로 들어가면서 명의 사회모순은 에 달했다. 16세기 중반 명의 재상 장거정의 개혁으로 사회 혼란을 바로잡고 민생안정을 도모했던 명이지만, 장거정이 죽자 관료와 환관, 신사층의 불만이 쏟아지면서 명의 체제는 천천히 붕괴되어 갔다. 특히 보바이의 난, 임진왜란, 파주토사 양응룡의 반란 등 다양한 반란이 일어나면서, 명은 장거정 사후 다시금 재정적자에 허덕이게 되었다. 재정적자에는 황실 유지비용도 한몫하였다. 만력제를 비롯한 황족들의 사치 또한 적자의 원인이되었다. 이러한 명의 적자재정을 메우기 위해서 전국으로 파견된 환관들은 막대한 권한을 휘둘렀다. 지방의 은광을 개발해 세금을 징수하는 것이 파.. 2024. 8. 18. [중국사] - 명 최초의 반정, 정난의 변과 영락제의 등장 [중국사] - 명 최초의 반정, 정난의 변과 영락제의 등장 홍건적 출신으로 명까지 건국한 주원장은 즉위와 동시에 자신의 장남 주표를 황태자로 삼았다. 나머지 아들들은 변경의 왕으로 임명하여 외적의 침입을 막도록 하였다. 그러나 주표는 40세의 나이로 급사하였다. 이에 주원자은 주표의 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주어야했다. 주원장 자신이 죽은 뒤 어린 황제에게 숙부들의 핍박이 너무나 당연시 되는 상황이 되었다. 주원장은 아들들에게 자신이 죽더라도 수도인 남경으로 오지말고 각자의 영지에서 자리를 지키라는 유서까지 남기기도 하였다. 자신의 장례를 구실로 아들들이 황태손에게 변란을 일으킬까 두려워한 나머지 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이 행동으로 주원장은 자신의 아들들에게 신임을 잃었고, 말년에는 고독하게 병사하였다. 71.. 2024. 8. 17. [중국사] - 유목민족의 국가 원의 멸망과 주원장의 명 등장 [중국사] - 유목민족의 국가 원의 멸망과 주원장의 명 등장 쿠빌라이가 대원을 선포하고, 중원을 통치를 시작한지 어언 100년이 흐르자 원나라의 통치도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피지배계층의 대부분을 이루는 한족과 지배계층인 몽골족의 갈등, 몽골의 통치세력은 라마불교에 심취하여 사치와 향락을 일삼았고, 이는 곧 피지배계층의 부담으로 이어졌다. 여기에 정치적, 경제적 혼란이 가중되고 잇따른 자연재해와 기근으로 민생이 어려워지자 여기저기서 반란의 깃발이 일어났다. 중국 하남지방의 백련교 교주인 한산동과 유복통은 이러한 원말의 분위기를 간파하고 이용하였다. 이들은 백련교라는 종교를 이용하여 한산동이 송 휘종의 8대손이라는 유언비어를 퍼트렸으며, 한족 왕조의 정통성을 얻기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주모자 한산동은 .. 2024. 8. 16. [중국사] - 대륙을 휩쓴 몽골 제국의 완성과 새로운 울르스 [중국사] - 대륙을 휩쓴 몽골 제국의 완성과 새로운 울르스 바투의 원정군은 러시아의 원정 도중 갑작스럽게 철군을 결정한다. 철군 이유는 우구데이 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후임 칸의 회의인 쿠릴타이에 참석하기 위함이었다. 우구데이 칸의 후임은 우구데이의 아들 구유크 칸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구유크 칸이 병사하게 되므로서 후임 칸을 둘러싸고 내부에서 균열이 생겼다. 혼란 끝에 선출된 몽골 제국의 4대 칸은 뭉케였다. 뭉케 칸은 즉위 직후 혼란에 둘러싸인 몽골 내부를 수습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갑작스러운 계승 혼란이 수습되자 몽골은 다시 대외 원정에 나섰다. 뭉케의 지휘 아래 지목된 공격지는 서아시아와 남중국이었다. 원정군 사령관은 자신의 동생인 훌레구와 쿠빌라이를 임명하였다. 1252년 두 방향의 원.. 2024. 8. 16. [중국사] - 징기즈칸의 아시아 제패와 최강 몽골군의 대외 정복 전쟁 [중국사] - 징기즈칸의 아시아 제패와 최강 몽골군의 대외 정복 전쟁 13세기 접어들면서 유라시아 대륙은 금나라와 송나라를 넘어, 새로운 세력이 부상하며 전란의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아시아 내륙 오로도스 지역에서 흥기한 몽골 부족은 주변의 부족을 흡수하며 커다란 세력으로 성장했다. 1189년 칸에 추대된 테무진은 몽골 부족을 이끌고 1203년 케레이트를 격파한다. 케레이트 격파 후 이듬해 1204년 나이만을 격파하고 1205년 테무친은 메르키트까지 격파한다. 결국 1206년 몽골 초원을 통일한 테무친은 초원의 유일한 대칸인 징기즈칸으로 즉위한다. 당시에 북중국을 점거하고 몽골 초원지역에까지 세력을 뻗치고 있던 금나라는 초원의 부족들이 힘을 규합하지 못하도록 서로 대립하게 만드는 정책을 펼쳤는데, 테무.. 2024. 8. 15. [중국사] - 금나라를 물리친 몽골의 중국통일, 마지막 한족 장군 악비와 남송의 최후 [중국사] - 금나라를 물리친 몽골의 중국통일, 마지막 한족 장군 악비와 남송의 최후 몽골은 남송과 전략적 제휴를 맺고, 1234년 끈질긴 추적해 남으로 도망친 금을 멸망시켰다. 뒤이어 몽골은 1235년 남송을 다음 목표로 생각하고 전투를 치뤘다. 전투의 시작은 몽골이 선수를 쳤다. 1년 전에 있었던 남송의 화북 침공, ‘단평의 입락’에 대해서 남송의 책임을 물어서 이를 명목으로 병력을 남송으로 보내어 공격하였다. 그러나 남송의 방어가 생각보다 단단하였고, 강이 많은 강남의 지형은 몽골 군대의 진격을 효과적으로 저지하였다. 게다가 1241년 몽골 우구데이 칸이 사망하면서 몽골과 송의 전쟁은 종식된다. 두번째 몽골군의 공격은 1258년이었다. 사천의 조어성을 배경으로 몽골군의 대대적 공격이 있었다. 뭉케 .. 2024. 8. 14. [중국사] - 남송과 금, 혼란의 동아시아와 초원의 끝판왕 몽골 [중국사] - 남송과 금, 혼란의 동아시아와 초원의 끝판왕 몽골 금나라가 북송의 마지막 황제인 흠종을 금나라로 끌고가고 송은 멸망하게 된다. 이를 정강의 변이라고 한다. 그러자 송 흠종의 동생이었던 조구가 남쪽으로 세력을 이끌고 도망쳐 항주에서 황제를 선언하였다. 금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한 강남에서 송을 재흥하였는데 이를 남송이라고 부른다. 북송이었을 당시에는 중국전역을 지배하였지만, 남송은 금에게 화북지방을 내어주고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남중국 일대만을 지배 할 수 있었다. 송 고종은 금의 공격을 피하여 양자강을 건너서 항주로까지 피신했지만, 금나라는 필사적으로 추적하였다. 고종이 추적을 피해 항주로 수도로 결정한 것은 남송 건립 5년만의 일이었다. 1132년 항주를 임안으로 개칭하고 남송의 수도로.. 2024. 8. 13. [중국사] - 여진족의 금 등장과 송 최대의 치욕, 정강의 변 [중국사] - 여진족의 금 등장과 송 최대의 치욕, 정강의 변 거란과 송이 화북을 두고 대치하던 시기인 11세기 초, 거란의 뒤쪽 만주 일대에서는 새로운 민족이 발흥하여 세력을 키워 나갔다. 이 세력은 말갈이라 불리던 부족인 여진이다. 여진의 발흥은 송나라, 요나라, 고려의 균형을 이루던 동아시아 전역을 다시금 전란으로 몰아간다. 여진은 기본적으로 반 농경 반수렵을 병행하는 민족이다. 이들은 고구려의 후예인 발해 건국되자 발해에 복속되었다. 그러나 요나라에 의해 926년 발해가 멸망하자 다시 거란, 요에 복속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발해시절에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계속 가지고 있었고, 요나라 시기에도 복속되긴 하였으나 여전히 정체성을 지키고 있었다. 여진이 요나라에 귀속한 정도를 가지고 남쪽의 숙여진과.. 2024. 8. 12. [중국사]- 당 현종과 양귀비, 사그러지는 당나라 [중국사]- 당 현종과 양귀비, 사그러지는 당나라 측천무후로 인해 단절되었던 당 왕조는 중종의 복위로 인하여 다시 복원되었다. 그후 예종이 즉위 하였고 다음으로 예종의 3남인 현종이 6대 황제로 즉위하여 당을 개원의 치세라는 전성기로 이끌었다. 당 태종 시기 300만 미만이던 호구수가 현종치세 726년에는 두배인 706만호로 늘어났다. 경제적 호황기를 맞아 쌀값도 저렴하였고, 태평의 시대로 평가된다. 그러나 국가의 근간이던 균전제와 부병제등 율령체제가 붕괴될 조짐이 보이던 때 역시도 이때이다. 토지 환수가 안되어 지급할 토지가 부족해지자 균전제가 흔들렸고, 균전제 위에 기초한 부병제도 덩달아 부실해져 갔다. 빈농은 고향을 등지고 토지를 떠나 유랑민이 되어갔다. 당 현종은 황후가 죽은 뒤 자신의 며느리.. 2024. 8. 11. [중국사]- 고구려 멸망의 주인공, 당 고종과 여황제 측천무후 [중국사]- 고구려 멸망의 주인공, 당 고종과 여황제 측천무후당 고종은 당 태종이 마무리 짓지 못한 고구려 원정과 나당전쟁을 마무리하고 동쪽의 정벌을 마무리한다. 비록 신라는 동쪽에 남아있었지만, 가장 위협적이었던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요동의 철광석과 만주의 생산력에 대한 것들을 이미 차지한 뒤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 한가지 고종대에 주목할만 것은 중국 역사에서 유일무이한 여자 황제, 측천무후가 있다. 그녀는 당 태종의 후궁으로 있다가, 태종이 죽자 감업사의 비구니로 출가한다. 당시 법도로는 후사를 두지 못한 선제의 후궁은 비구니가 되어야했다. 그러나 그를 눈여겨 보던 태종의 아들 고종은 그를 다시 불러들여 후궁으로 삼았다. 어머니뻘이던 여자를 다시 자신의 아내로 맞이한 것이다. 그후 후궁의 자격으로.. 2024. 8. 11. [중국사]- 당의 건국과 당 태종 이세민 치세, 여당전쟁의 이야기 [중국사]- 당의 건국과 당 태종 이세민 치세, 여당전쟁의 이야기당의 창업자는 고조 이연이지만 수나라 말기 반란세력을 진압하고, 실질적으로 창업을 주도한 인물은 2대 황제 당 태종 이세민이었다. 이는 훗날 조선의 창업자 이성계의 아들들이 실질적으로 조선의 창업에 앞장선 것과 매우 유사하다. 당 고조 이연의 둘째 아들이었던 이세민은 장안성의 북문인 현무문에서 황태자인 형 건성과 동생 원길을 살해하고, 아버지로부터 사실상 강제적으로 양위를 받았다. 이를 현무문의 변이라고 부른다. 변 사건 이후 2달이 지나 아버지로부터 황위를 이어받아 29세에 황제가 된 23년간의 태종의 정치는 후세에 ‘정관의 치’라 불리며 높게 평가되었다. 이런 정관의 치세를 연 태종의 정치에는 세가지 조처가 있었다. 태종은 오경정의를 .. 2024. 8. 10. [중국사]- 수나라의 중국통일과 당 고조 이연 [중국사]- 수나라의 중국통일과 당 고조 이연 남북조 시대에 화북에 위치해 있던 북주는 수나라 창시자 양견에 의해 멸망한다. 양견은 북주를 계승하여 수나라를 세웠다. 이가 바로 수 문제이다. 589년에 문제는 자신의 차남 양광을 시켜서 남조 정벌을 진행한다. 이 정벌이 성공하면서 이른바 남북조시대의 마침표를 찍게되는 순간이었다. 수의 남벌로 남조 진이 멸망하고 300년간 지속되어 온 중국 남북조시대는 막을 내렸다.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는 철저한 호구조사를 통해 인구를 착실하게 파악했다. 이를 통해 수 문제 말년에는 창고에 쌓인 곡식이 정부가 50~60년간 사용할 양이 되어 국가의 재정상태가 튼튼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강한 재정을 가진 수나라도 통일 후 관리에 실패하여 불과 38년 만에 멸망했다. 수나라.. 2024. 8. 10. [중국사]- 위진남북조 시대: 북강남약 [중국사]- 남북조 시대: 북강남약 서진이 유연의 한에 의해 멸망하고, 강남으로 이주한 유민들에 의해 동진이 건립되었다. 동진 건립 이후 남북 관계는 전쟁과 외교전으로 압축된다. 사마씨의 서진이 멸망한 이후 중국은 남북으로 나뉘게 되었다. 한족들이 즐겨 사용하던 중화란 중국과 화하 민족의 합성어인데 중원을 유목민족에게 내주게 된 한족들은 스스로 중화를 칭하기 어려워졌다. 이들은 강남에 동진을 세우고 자신들의 고향인 중원을 회복하고자 북벌을 진행하였지만, 유목민족이 주가 되어 기병이 막강했던 북조의 군사력에 가로막혀 성과는 크지 않았다. 이른바 북강남약의 시대였다. 중국의 고대 사회는 경제적으로는 농업사회였다. 이때는 곧 인구가 경제적 척도였다. 경제적 중심지인 화북을 가진 북조에 비해 한족의 남조는 인.. 2024. 8. 10. 타임맵 중국사 연표 (*24.07.21) * 고대 - 춘추전국시대 [중국사] - 상나라와 주변 청동기 문명들https://teropods.tistory.com/535 [중국사] - 주나라의 등장, 서주와 봉건제https://teropods.tistory.com/536 [중국사] - 춘추: 패자의 시대https://teropods.tistory.com/545 [중국사] - 춘추전국 시대와 각국의 개혁https://teropods.tistory.com/546 [중국사] - 진나라의 전국통일https://teropods.tistory.com/547* 한 [중국사]- 진한제국의 등장과 한무제https://teropods.tistory.com/548 [중국사]- 전한의 멸망과 왕망의 신 (8~23년)https://teropods.tistory.com/.. 2024. 7. 21. [중국사]- 저무는 영웅의 시대, 5호 16국 시대 (오호십육국 시대) [중국사]- 저무는 영웅의 시대, 5호 16국 시대 (오호십육국 시대) 본디 중국이라고 불리는 중국에서 멀리 떨어진 북방 민족들이 살아가는 초원이 있었다.그러나 여러가지 이유로 북방에서 중원으로 이동한 유목민족 다섯민족을 5호라고한다. 흉노, 선비, 갈, 저, 강 등 다섯 유목민족은 사마씨의 진나라에서 일어난 팔왕의 난이 종결될 즈음 각자 독자 정권을 수립한다. 304년 산서 지방을 근거로 흉노의 유연이 대선우를 칭하며 한나라를 건국한다. 유연은 한고조 유방의 후예를 자처하며 漢(한)을 자처하였지만, 그 후대에 유요가 조로 국명을 고쳤다. 사천에서는 이웅이 성도왕을 자칭하면서 5호16국 시대가 열리게 된다. 유목민족들은 삼국시대로 일컬어지는 후한말기부터 내전으로 힘이 약화된 한족의 영역인 이른바 ‘중원.. 2024. 7. 15. [중국사]- 후한의 멸망과 영웅의 시대 유방이 건국한 한나라, 전한과 후한이 중국대륙을 지배한 400년은 중국 고대의 완성이자 통일제국이었다. 그러나 통일은 오래가지 못했고 새로운 분열이 나타나게 되었다. 후한의 멸망 이후 이어지는 위, 촉, 오의 3국의 시기는 분열의 경향을 강하게 보여준 시기였다. 이때에는 지방을 중심으로호족이 성장하였다. 지방세력인 호족이 성장하여 중원의 모든 지방에서 영향력을 끼쳤다. 그리고 이러한 중원의 문화는 호족을 통해 주변 이민족에게 까지 미쳤다. 그리고 이러한 이민족을 국가 내에 포용한 한은 한족뿐 아니라 타민족까지 포함하는 제국이 되었지만, 이로인해 구조적으로 국가의 분열이 쉬운 형태로 운영되었다. 한나라때에는 유교를 국교화 하였다. 따라서 황제의 권력이 강화되었고, 지방에서는 사대부층이 성립되었다. 이 .. 2024. 7. 14. [중국사]- 전한의 멸망과 찬탈자 왕망, 후한의 등장 [중국사]- 전한의 멸망과 찬탈자 왕망, 후한의 등장 한 나라는 무제 이후 한나라는 천천히 쇠락하기 시작했다. 여러 황제를 거치면서 득세한 외척들은 결국 권력투쟁에 뛰어들어 나라를 좀먹기 시작했다. 전한 성제가 즉위한 후 황태후의 일족은 조정에서 중요 직책을 차지하였다. 전한의 혼란을 수습한 왕망도 이러한 외척 왕씨의 일원이라는 배경을 가지고 입관하였다. 왕망은 순조롭게 승진하여 평제를 옹립하고 자신의 딸을 황후로 들이면서 본격적 실권장악에 착수 하였다. 곧 왕망은 쿠데타를 일으켜 평제를 살해하고 스스로 가황제를 칭하였다. 동시에 참위설과 천재지변을 교묘히 이용하여 한을 대신할 사람이 왕망이라는 여론을 조성하고 수차례 추대를 사양하는 과정을 거친뒤 선양이라는 방식을 통해서 서기 8년 황제의 자리에 올.. 2024. 7. 13. [중국사]- 진나라의 멸망, 한제국의 등장과 한무제 [중국사]- 진나라의 멸망, 한제국의 등장과 한무제 진시황의 중국통일은 중국 역사에 있어 커다란 사건이었다. 하, 은, 주 시기까지는 국가는 황하 중하류에 중심지를 두고 주변에 영향력을 끼치는 정도였고,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는 각 제후국의 영역이 확대되었지만 동시에 그 지역 문화와 일체화 되던 시기였다. 이러한 점에서 진시황의 중국통일은 주나라 시기의 권위회복 또는 권력승계가 아닌 새로운 시기의 도래로 봐야한다. 진 제국은 자신의 통치방식을 점령한 땅에 이식하여 통치하였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제국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진나라는 무리한 토목공사와 엄격한 법 집행 등에 사회불만세력이 속출하고, 내실이 다져지지 않은 채 급속한 통합을 이루었기에 사회가 위태로웠다. 진시황 사후 제국은 급속하게 무너져 .. 2024. 7. 12. [중국사] - 전국시대를 평정한 진나라의 전국통일 [중국사] - 전국시대를 평정한 진나라의 전국통일 중국 대륙의 패권을 잡기위해 전국에서 영웅이 할거하였다. 지역패권을 잡은 지역군벌들은 옆 지역의 세력을 흡수하기위해 노력했고 전국이 전쟁의 포화로 빠져들었다. 전국시대 전쟁이 계속 되면서 사회 곳곳에서는 불만이 쌓여갔다. 지역의 패자들은 지역의 재화를 모두 쏟아부어 전쟁에 나섰다. 그런만큼 많은 양의 물자가 전쟁에 소비되었다. 이러한 재화의 손실은 모두 생산계층인 농민이 부담해야했다. 또한 이전 시대에 비해 전쟁의 규모가 커지고, 수많은 백성들이 국가에 의해 직접적으로 징병되어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다. 상인들 역시도 전쟁으로 상업활동에 제약을 받게 되면서 종국에는 이렇게 계속되는 전쟁을 종식해야한다는 사회 각 계층의 생각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전국에.. 2024. 7. 11. [중국사] - 중국 춘추전국시대와 진나라의 팽창 춘추 시대가 끝나고 전국시대가 시작된다. 전국시대가 시작되는 기점은 주로 진나라가 기원전 453년 한, 위, 조의 세나라로 분열되는 것을 기점으로 잡는다. 서주의 왕으로부터 직접 제후로 봉해진 제후국 진이 내부의 하극상으로 분열되었다는 것은 명목상으로라도 남아있던 체계가 무너지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상징적 의미였기 때문이다. 전국시대는 오로지 강한 국력을 가진 자만이 전쟁통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약육강식의 세계였다. 전국시대 군주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극대화하고 자신의 세력내에서 하극상이 일어나지 않도록 권력을 군주 중심으로 재편하였다. 또 다른 제후국과의 무한 경쟁속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국강병책을 강구하였다. 춘추 전국시대의 군주들은 자신의 근거지에서 나오는 물산을.. 2024. 7. 10. 이전 1 2 3 4 5 6 7 ··· 10 다음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