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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사] - 거란의 등장과 번영, 키타이제국 당나라의 명운이 쇠해져 가던 10세기 초 시라무렌 강과 랴호허 강 유역에서 살던 유목부족인 거란이 새로이 국가를 건설하였다. 동호와 선비 계열에서 갈라져 나와 4세기 경 자신들만의 세력을 구축했으며 내몽골 지역을 영유하였다. 10세기 초 당시 당은 정권말이여서 내부의 혼란에 몰두하여 국경 외곽 변경에 까지 신경을 쓰지 못했고, 거란은 그러한 상황에서 세력을 규합할 수 있었다. 907년 당이 멸망함과 동시에 거란의 야율아보기는 거란을 건국했다. 이들은 농경도 병행하여 반농반목적 생활을 영유하였고, 여진-만주족과는 별개로 더 유목민의 성격이 짙었던 것으로 보인다. 거란이라는 이름보다는 키탄 또는 키타이에 가까운 발음이었던 이 제국은 야율아보기라는 인물에 의해서 세워졌다. 야율은 부족의 명칭 또는 씨족 성으로.. 2022. 5. 12.
[중앙아시아사] - 위구르 제국 유랑민과 새로운 왕국: ‘천산 위구르’ [중앙아시아사] - 위구르 제국 유랑민과 새로운 왕국: ‘천산 위구르’ 위구르 제국이 멸망한 이후 방테긴의 지휘아래 서쪽으로 이동한 위구르 유랑민들을 서주파라 부른다. 서주파 중 일부는 하서지역으로 들어가 하서 위구르를 만들었다.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대다수 위구르 인들은 톈산 산맥 북방에 위치한 절라만 산에 도착했다. 여기에서 일부는 산을 넘어 하미와 랍추크 지방으로 들어가고 또 대다수는 계속 서진을 했다. 그리고 천산 산맥 동쪽의 투르판과 베쉬발릭에 도착하여 근거지를 마련하고 왕국을 건설했다. 위구르 유랑민이 세운 이 나라는 여러 이름을 가진다. 중국의 자료에서 안서로 나오기도 하고 지역명을 따라서 천산 위구르, 서주 위구르, 화주 위구르, 고창 위구르라고 불리기도 한다. 고창회골 또한 이들의 별칭이.. 2022. 5. 9.
[중앙아시아사] - 위구르 제국의 후예: 하서 위구르 [중앙아시아사] - 위구르 제국의 후예: 하서 위구르 위구르가 840년 키르기즈에 의해 멸망하면서 위구르의 유랑민 집단은 크게 두가지 세력으로 나뉘어졌다. 남쪽으로 이동한 남주파와 서쪽으로 이동한 서주파로 나뉘어진다. 남쪽으로 향했던 남주파는 외게테긴을 다시 카간으로 세우고 험한 고비사막 이남으로 향하였다. 남주파는 고비사막 이남에서 다른 위구르 세력을 규합했다. 당시 남주파의 세력은 어림잡아 인구 100만명에 해당했다. 위구르인들은 하나의 세력을 이루어 당에 식량을 우선 요구했고 수많은 위그드인이 몰려오자 당은 이들의 항복을 요구하며 대치하였다. 당으로서는 칸까지 포함된 정치집단의 등장이 반갑지 않았으니, 당연한 조치였다. 그러나 곧 당은 843년 이들의 본진을 공격하여 위그드인들을 몰살시켰다. 이러한.. 2022. 5. 8.
[중앙아시아사] - 위구르 제국의 번영과 멸망 [중앙아시아사] - 위구르제국의 쇠락과 멸망 위구르 제국의 2대 카간인 카를륵 카간에 이어 759년 즉위한 뵈귀 카간은 20년간 당 왕조에 대한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중국의 풍부한 물자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물질적 풍요는 위구르제국의 정치적 안정에 기여하였고 카간의 권위는 건재할 수 있었다. 중국에서 들어온 물자는 위구르 내부의 정치적 안정뿐 아니라 제국으로 여러 부족들을 거느리는데 필수적인 역할을 하였기에 위구르제국의 번영에는 당의 물자가 필수적이었다. 3대 뵈귀 카간의 치세에 이어 그의 후계자인 알프 쿠틀륵 빌게 카간 역시도 위구르 제국을 잘 번영시켜나갔다. 그러나 4대째인 빌게 카간이 789년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위구르 제국은 위기를 맞이한다. 빌게 카간이 예상밖에 빠르게 죽자 .. 2022. 5. 6.
[중앙아시아사] - 위구르 제국의 등장과 당나라, 돌궐의 멸망과 안록산의 난 [중앙아시아사] - 위구르 제국의 등장과 당나라, 돌궐의 멸망과 안록산의 난 위구르 제국은 투르크계 유목민인 칙륵의 후예이다. 칙륵 또는 철륵으로 불리는데 이는 수레를 뜻한다. 이들은 바퀴가 높은 수레를 이용하여 유목을 했기 때문에 붙은 명칭이다. 605년 서돌궐의 지배 하에 있던 칙륵이 세력이 커지자 서돌궐의 카간은 칙륵의 수령들을 급습하여 죽여 세력을 억제했다. 그러자 칙륵에 속하던 부구, 통라, 위구르, 바이쿠르등이 모두 스스로를 위구르라고 칭했다. 이들은 셀렝게 강 부근에 살았으며 인구 10만에 병사의 숫자가 5만을 헤아렸다. 이 기록에 따르면 7세기 초에는 톈산 방면에 살던 투르크계 유목민 집단이 서돌궐의 공격으로 동북방 셀렝게 유역으로 이주하면서 위구르를 중심으로 세력화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2022. 5. 2.
[중앙아시아사] - 이슬람과 당의 격돌, 탈라스 전투 [중앙아시아사] 이슬람과 당의 격돌, 탈라스 전투 무하마드가 박해를 피해서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헤지라(622년) 이후 세력을 키우던 이슬람 세력은 중앙아시아로 진출을 꾀했다. 정통 칼리프시대가 4대 시아알리를 마지막으로 661년에 마감되고 술탄을 위시한 우마이야 왕조가 건립되며 이슬람의 동방 진출은 시작되었다. 우마이야 왕조는 수도를 다마스쿠스로 옮기고 동쪽진출을 시작했다. 중앙아시아의 상업적 성격이 짙은 도시국가들을 공격하여 공물을 통한 물자 획득에 열정적이었다. 그리고 697년 하자즈 이븐 유스프가 바스라 총독에 임명되면서부터 상황이 바뀌었다. 이들은 동쪽으로의 정복전쟁을 통해서 이슬람 내부에 쌓여있는 종족적 갈등을 외부로 돌려 발출해내고자 했다. 이슬람 세력은 먼저 부하라 인근 도시 바이칸드.. 2022. 4. 29.
[중앙아시아사] - 토번왕국의 등장, 당의 서역지배 당은 서돌궐을 복속시키고 타림분지 도시국가들을 장악하면서 서역지배를 완성하는듯 했으나, 다시금 세력의 도전에 직면해야했다. 티베트 고원에 위치한 토번 왕국이 그 주인공이다. 중국의 기록 속에서 토번으로 나오는데 토번은 티벳을 옮겨 기록한것이다. 토번 왕국은 7세기 티베트 라싸를 중심으로 건설되어티베트 고원지대의 여러 민족들을 흡수통합하면서 9세기 중반까지 국가의 명맥을 유지했다. 토번 왕국의 건설자는 송첸감포였는데 그는 고원을 통일한뒤 634년 당나라와 접촉하였다. 그는 선비족 탁발부의 후예로 당나라 공주와 혼인하여 국격을 높이려했으나 주변 유목민인 토욕혼의 방해로 성사되지 않았다. 하여 송첸감포는 636년 군대를 이끌고 토욕혼을 정발하고 당항, 백란등의 유목부족들을 차례로 정벌하였다. 이후 당의 서.. 2022. 4. 21.
[중앙아시아사] - 돌궐 2제국의 부흥 (679 - 744) 당에 멸망하기전 돌궐인들은 비석에 자신들의 문자인 투르크 문자를 새겨 기록을 남겨두었다. 돌궐의 기록에는 중국의 위험에 대해서 경계하는 모습과 당이 돌궐을 지배 했던 50여년 동안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서술하고 있다. 또한 돌궐이 당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뤄야했는지를 서술하고 있다. 당은 동돌궐과 서돌궐을 차례로 격파하며 영토를 넓혀 서역지배체제를 완비한다. 당에 복속한 돌궐에 대해 당은 간접 지배체제로서 돌궐의 수장들을 내세워 구 돌궐제국의 영토를 통치한다. 서돌궐이 당에 멸망한 657년 이후 약 20년 뒤인 679년에 내몽골에서 당의 통치에 참지못한 돌궐 수령들이 합심하여 반란이 일으킨다. 아사나가문의 니숙복이라는 인물이 칸에 올라 구심점이 되자, 주변 24세력의 돌궐 수령.. 2022. 4. 19.
[중앙아시아사] - 당과 돌궐제국, 돌궐의 서방정책 새롭게 몽골초원에서 흥기한 돌궐은 제국을 세웠다. 흉노와 달리 돌궐은 영역이 넓어 서쪽 카스피해까지 미쳤기 때문에 당시 서아시아에 존재하던 사산왕조 페르시아는 물론이고 그 너머 비잔티움 제국과도 관계를 맺었다. 돌궐제국은 사산왕조와 연합해헤프탈 훈족을 멸망시키고 아무다리야강을 기점으로 서로의 영토를 분할 하였다. 이로써 돌궐제국은 사산왕조 페르시아와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사산왕조 페르시아와 돌궐은 초원길을 통한 비단무역을 두고 대립하였다. 돌궐제국은 사산왕조가 영유하고 있던 국제 교역로를 우회해서 이들이 가지고 있던 영향력을 빼앗고자 했다. 그리하여 교역로를 두고 돌궐은 페르시아를 거치지 않고 비단을 교역할 길을 찾기위해 노력하였다. 이때 돌궐의 눈에 들어온 나라가 바로 동로마제국, 비잔티움이었다. .. 2022. 4. 14.
[중앙아시아사] - 돌궐제국의 성장과 분열 몽골초원을 장악하고 있던 유연은 6세기 들어 투르크계 돌궐의 도전을 받게되었다. 552년 투멘의 공격을 받은 유연의 아나괴 이 자살하면서 투멘은 돌궐을 건국한다. 몽골초원의 패자로 나타난 돌궐은 발음상으로는 튀르크로 불리우는 종족이었다. 앞서 초원을 지배하던 유연의 유력 계층은 몽골어를 쓰는 계통이었지만 이들이 나타나면서 몽골 초원은 투르크계열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초원을 차지하게 되었다. 돌궐제국의 건국자는 중국측 기록에는 토문(土門)으로 기록되는데 이는 투르크 어에서 10,000을 뜻하는 투멘[tumen]을 옮겨 기록한 말이다. 아마 만명을 거느리는 만호장을 뜻하는 말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토문이 즉위한뒤 자신을 일릭이라고 칭했다. 투르크어에서 일[il]은 나라(國)를 의미하고 일릭칸은 나라를.. 2022. 4. 11.
[중앙아시아사] - 중앙아시아의 새로운 패자, 유연 선비족의 뒤를 이어 고비사막 북쪽의 초원을 다스렸던 민족은 유연족이다. 유연은 기원후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중반까지 초원에 국가를 건국하여 활동하였다. 3세기 전반에 선비족 연합체가 붕괴되고 우문부, 탁발부 같은 일부 선비 부족이 북중국으로 이주하였다. 비어버린 초원을 '칙륵'이라는 투르크 계통의 유목민족이 이들이 빠져나간 자리를 채웠다. 유연이라는 국명은 4세기 전반 거록회라는 인물이 몽골 초원에 잔류하던 선비계 유목민들을 규합하면서 사용되었다. 이들은 여여나 예예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졌다. 유연의 남쪽에 국경을 맞댄 북위는 비하의 의미로 연연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당시 화북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북위의 도무제는 4세기말 유연에 대하여 군사적 원정을 감행하여 타격을 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군사적 압박속.. 2022. 4. 8.
[중앙아시아사] - 중국 한족 왕조의 몰락과 유목민족의 중국 이주 [중앙아시아사] - 한인 왕조의 혼란과 유목민족의 이주 후한 말의 환관들이 난입하는 혼란한 정치상황과 대내외 적인 군사 충돌로 인해 중국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후한이 몰락하던 2세기말부터 중국대륙의 패권을 놓고 서로 다투던 위, 촉, 오는 280년이 되에서야 진이라는 새로운 나라에 의해 혼란을 끝낸다. 진은 촉한의 제갈량의 북벌을 막아낸 위나라의 대신 사마의의 손자인 사마염이 건국하였다. 건국 초기에는 어진 정치로 새로운 국가를 다져나갔으나 2대 혜제대에 이르러서는 나라의 기강이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2대 황제인 혜제때에는 이러한 혼란에 말미암아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던 왕들이 8왕의 난을 일으키고 국운이 기울게된다. 약 16년간 일어난 반란에 변경방비에 틈이 생기자, 만리장성 이북에 거주하던 유목민족들이.. 2022. 4. 7.
[중앙아시아사] - 동호의 후예, 유목민족 선비족 [중앙아시아사] - 동호의 후예, 유목민족 선비족 본디 선비는 동호에 속한 부족이었다. 그러나 흉노족 묵특선우에게 공격을 받고 동호는 두 갈래로 나뉘어 이주하였는데 이 두갈래가 오환과 선비로 나누어졌다. 눈강 상류의 산악지역으로 들어간 동호는 선비족이 되어 역사에 기록되었다. 발음의 음가값이 [세르비 : Servi]에 가까웠기에 기록에 선비로 옮겨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1세기 중반 선비는 오환이 한나라의 영향권 아래의 지역으로 이주하자 오환 거주하던 초원지대를 자신들이 채우기 시작하여 결국에는 동으로는 내몽골에서부터 서로는 주천과 동황에 이르기는 넓은 영역을 관할하였다. 이는 곧 선비족이 중국 북변에 넓게 분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비족은 기본적으로는 후한의 울타리로서 오환 편에 서서 북흉노의 공격.. 2022. 4. 6.
[중앙아시아사] - 유목민족 오환의 등장 [중앙아시아사] - 유목민족 오환의 등장 유목민족 오환의 이름은 본디 동호였다. 중국의 기록에 따르면 흉노의 선우 묵특의 공격으로 동호가 근거지에서 쫓겨나 이동하였는데, 이들이 도망하여 자리잡은 와환산과 선비산에서 살게 되어 오환과 선비가 생겨났다. 이 기록을 따르면 기원전 3세기 말 몽골 초원 동남부에 거주하던 유목민족이 흉노 묵특의 공격으로 동북쪽으로 이주하면서 싱안링 상맥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 세력이 바로 오환이 된다. 한나라 한무제는 압도적인 군사력을 바탕으로 당시 랴호허 유역까지 남하해있던 오환을 상곡, 어양, 우북평, 요동, 요서등 5군으로 나누어 거주시켰다. 그리고 관직으로 호오완교위를 임명하여 이들을 관리, 감독하여 힘을 키우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오환의 수령들에게 연 1회 한나라.. 2022. 4. 5.
신간회 해소에 대한 근본적 원인 분석 신간회 해소에 대한 근본적 원인 분석 목차 머리말 신간회 해소의 원인에 대한 종래의 연구 1) 내재적 원인 2) 외재적 원인 조선총독부 의 신간회 탄압 신간회 해소 원인과 조선총독부 탄압과의 연관성 1) 신간회 중앙본부와 지회간의 갈등조장 2) 공산주의 세력의 신간회 해소활동 결론 머리말 신간회는 자치운동을 주장한 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을 제외한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결집해서 창안한 합법적 운동단체로 1927년 2월 15일에 발기하여 1931년 5월까지 존속한 한국의 좌우합작 독립운동 단체이다. 신간회는 1920년대 부터 나타난 민족주의 세력의 자치론자들에 대항한 민족주의 내부의 비타협적세력과 사회주의자들이 민족협동전선을 만들며 탄생하였다. 천도교계와 조선공산당이 함께 추진한 6.10 만세운동은 .. 2021. 5. 28.
[중앙아시아사] - 북흉노의 서천, 그리고 제국의 멸망 [중앙아시아사] - 북흉노의 서천, 그리고 제국의 멸망 48년 흉노의 분열로 인해서 남흉노 선우 일축왕 비가 한에 투항였다. 신하를 칭하면서 스스로를 호한야 선우로 칭하자 흉노는 북흉노와 남흉노로 갈라지게 된다. 후한의 영내에서 북흉노와 대립하던 호한야 선우는 고비사막 북쪽에 있는 북흉노 포노선우와 대립하게 되었다. 남흉노는 후한의 물질적 지원에 힘입어 북흉노를 정복하고 고비사막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그러나 남흉노와 후한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북흉노의 세력이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북흉노는 한과 계속 대립했으며 타림분지의 여러 도시들을 군사적으로 압박하여 각 도시들을 흉노의 세력권 아래에 두었다. 특히 도시 쿠차를 앞세워 야르칸드를 정벌하고 서부의 타림분지 세력권내 15개 도시국가에서 추가병력 3만을 .. 2021. 5. 8.
[중앙아시아사] - 흉노 선우들의 대립과 2차 분열 [중앙아시아사] - 흉노 선우들의 대립과 2차 분열 호한야 선우와 그의 형 질지의 분열을 흉노의 1차 분열로 본다면 한번 더 분열하게 된다. 이를 흉노의 2차 분열이라고 한다. 앞선 1차 분열에서는 호한야 선우를 동흉노, 그의 형 질지를 서흉노로 분류한다면 2차 분열에서는 남과 북으로 나뉘어 분열하게 된다. 기원전후를 전후해 한나라의 왕망정권이 곧 무너지고 나서 곧바로 후한이 들어서게된다. 한나라의 정권 교체기를 틈타 흉노는 한나라의 북쪽 변경을 공격하고 이를 통해 군사적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이에 국가가 성립한지 얼마 되지 않은 후한은 군사를 일으킬 여력이 없었으므로 되도록이면 흉노와의 화친을 통해서 그들이 원하는 경제적으로 이득을 주고 군사적인 갈등을 문제를 해결코자 했다. 그러나 흉노는 지속적으로 .. 2021. 5. 7.
[중앙아시아사] - 중앙아시아와 한나라, 타림분지의 국가들 [중앙아시아사] - 중앙아시아와 한나라, 타림분지의 국가들 중앙아시아의 서부인 서-투르키스탄 지방은 일찍부터 서쪽의 지중해 문명과 접촉했고, 기원전 6세기 경에는 문헌에 등장하며 역사에 등장한다. 그에 비해서 동쪽 투르키스탄의 여러 도시들은 비교적 문헌에 나타나는 기록이 늦다. 비교적 정확하고 자세한 문헌은 동쪽의 흉노가 발흥하여 묵특 선우 이후에 흉노가 몽골 초원과 서역을 장악하자 한나라가 이에 대응하여 외교, 군사적 작전을 펼칠 시기였다. 기원전 176년에 흉노의 묵특 선우는 한나라에 보내는 서신에서 누란, 오손, 오걸 및 그 주변 26개국을 모두 흉노의 속국으로 삼았다고 보냈다. 이를 통해 유추해 볼 때 당시 흉노가 타림분지 주변의 크고 작은 오아시스 도시들을 모두 속국으로 삼았고, 한나라를 둘러 .. 2021. 5. 4.
[중앙아시아사] - 흉노와 한의 관계변화(호한야선우와 왕소군) [중앙아시아사] - 흉노와 한의 관계변화 한과의 전쟁이 끝난 뒤인 기원전 60년, 허려권거 선우가 사망하면서 흉노는 정치적 혼란과 분열에 휘말렸고 곧 내전으로 격화되었다. 그러나 곧 내전은 수습되었고 흉노의 우현왕이던 악연구제가 흉노선우를 계승하였다. 그리고는 곧 자신의 즉위에 반대한 흉노 귀족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탄압을 받던 귀족들은 이대로는 당할 수 없다며 호한야라는 인물을 선우로 옹립하여 악연구제에게 대항하였다. 이로써 초원에는 모두 2명의 선우가 있었고 이는 곧 내전으로 다시 격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호한야 선우의 세력이 승리하는듯 하였으나 호한야의 형인 질지가 그를 축출하면서 상황은 다시 급변한다. 형에게 선우자리를 찬탈당한 호한야는 몽골초원에 머물 곳을 찾지 못하여 결국에는 기원.. 2021. 5. 3.
[중앙아시아사] - 흉노 제국의 대 한나라 전쟁 [중앙아시아사] - 흉노 제국의 대 한나라 전쟁 흉노와 한나라 무제가 참여한 흉노-한 전쟁은 중국 측의 일방적인 기록만이 남아 전하고 있다. 유목민족의 특성상 이러한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흉노는 전형적인 유목국가로 글로 역사를 남기는 일에 매우 미숙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오로지 중국측의 기록에만 의존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중국 사서를 기준으로 역사를 살펴볼 수 밖에 없는데, 이를 인식하지 않고 사료 그대로의 역사를 받아들이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한 고조 유방이 흉노 때문에 고생을 한 이후 한 무제는 흉노에 대하여 칼을 갈고있었다. 흉노를 공격하기 위해 무제는 기원전 139년 장건을 서역으로 파견한다. 이는 흉노의 후방을 공격할 세력을 찾는 이유이기도 했다.. 2021. 4. 14.
[중앙아시아사] - 흉노의 등장과 만리장성 [중앙아시아사] - 흉노의 등장과 만리장성 은주 이래로 춘추전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중국 북방에 살던 여러 민족들은 주로 정주생활을 하며 보병을 기반으로한 전투를 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기원전 4세기에서 3세기로 넘어갈 무렵 계절적 이동을 하며 기마전을 수행하는 새로운 민족이 등장했다. 중원 사람들은 이들을 가르켜 호(胡)라고 불렀다. 이 호라는 명칭은 특별한 부족이나 국가를 가르키는게 아닌 유목적 생활양식을 가진 사람들을 지칭하는 넓은 범위를 가진 단어였다. 따라서 동호, 임호,누번, 흉노 등은 모두 호에 속하는 집단이었다. 최초의 유목국가였던 스키타이가 역사에 등장한지 3세기 정도가 지난 뒤 유라시아 동쪽에서도 최초의 유목세력이 국가를 이룬다. 역사서에 나타나는 처음 기록은 유명한 사가 사마천의 에서.. 2021. 4. 2.
[중앙아시아사] - 역사상 첫 유목민: 스키타이 역사상 첫 유목민: 스키타이 스키타이 중앙아시아에 나타난 민족이며, 또한 역사에 처음 이름을 남긴 유목민 세력이다. 스키타이 인들은 인종적으로는 인도-이란계에 속하는 민족이며 스키타이에 관련해 상세한 기록을 남긴 사람은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이다. 역사가이자 철학자이던 헤로도토스는 저서 에 옛 스키타이의 구전 설화들을 수집하여 이것들을 모아 서술하였다. 또한 스키타이 민족의 기원에 적어두었는데 이들은 원래 아락세스강 동쪽에 살던 민족으로서 맛사게태의 공격을 받아 자신의 근거지를 이탈해 서쪽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흑해 북안의 킴메르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킴메르인들이 스키타이 인들을 피해서 캄카스 산맥을 넘어 남쪽으로 도망치자 스키타이 인들은 이들을 쫒아 소아시아, 지금의 중동.. 2021. 4. 1.
[중앙아시아사] - 유목민의 등장과 말 유목민유목민의 등장과 말 유목민이란 말과 양, 염소등의 가축을 기르고 이들을 먹이기 위해 목초지를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유목민이 등장하기 위해서는 야생의 말을 가축화하는 순화 과정이 먼저 수반되어야 한다. 최초의 유목민이 출현했을것이라 추측되어지는 ‘안드로노보 문화’, ‘아파나시에보 문화’, ’카라수크 문화’ 등에서는 대체로 기원전 3500~ 3000년경 까지는 말의 순화가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인간에게 순화된 말은 처음에는 타고 다니는 용도 보다는 주로 마차를 끌게하는데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다. 당시에는 인간이 말의 등에 올라 타더라도 몸을 지지할 등자가 발명되지 않아서 몸을 지지하기 위해 허벅지의 근육만을 사용해 말을 붙잡아야 했기 때문이다. 뒤이어 바퀴가 등장하고, 더불어.. 2021.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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