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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 - 무로마치 막부의 몰락과 일본 전국시대의 시작 무로마치 막부의 몰락과 일본 전국시대의 시작앞서 언급하였듯이 무로마치막부의 시작은 남북조의 대립이 치열하였던 1338년의 일이었다. 고다이고천황을 교토에서 몰아냄으로써 건무친정을 종결시킨 아시카가 타카우지는, 1336년 스스로가 옹립한 코우묘 천황으로부터 정이대장군직을 임명받고, 교토에서 새로운 막부를 개창한다. 가마쿠라에 이은 두번째 막부, 무로마치 막부 시대의 개막이다. 원래 토우코쿠 지역을 기반으로 둔 가신이었던 아시카가가 교토에 막부를 세우게 된 이유는 당시 교토가 산업과 유통의 중심이었다는 경제적 이유와 요시노 의 남조를 비롯한 교토 주변의 적대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군사적 이유가 함께 있었다. 그리고 무로마치 막부라는 명칭은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교토의 무로마치에 ‘꽃의 궁전’짓고 나라.. 2025. 1. 28.
[일본사] - 고다이고 천황과 남북조시대 고다이고 천황과 남북조시대 아시카가 타카우지와 닛타 요시사다 등의 활약으로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킨 고다이고천황은 코우곤천황을 퇴위시키고, 코우곤천황이 서명한 칙서는 물론 전대에 행해진 모든 관직의 무효를 선언한다. 그리고 천황의 친정체제 아래 공가(公家)와 무가(武家)를 합한 새로운 정치체제를 시행한다. 종래의 토지소유권을 무효로 하고, 새롭게 토지소유권을 신청 받는 등 천황친정체제 기틀 마련에 힘쓴다.그러나 공가만을 중시하고,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는 등으로 인해 무사들과 농민들의 불만이 커져간다.이러한 불만들을 감지한 아시카가 타카우지는 1335년 가마쿠라 막부의 잔당을 토벌하기 위해 가마쿠라로 출병하게 된 것을 기회로 조정에 반기를 든다. 1336년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교토를 수중에 넣고, 고다이고.. 2025. 1. 27.
[일본사] - 원의 침략과 가마쿠라 막부의 멸망 원의 침략과 가마쿠라 막부의 멸망1192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 의해 가마쿠라를 본거지로 시작된 가마쿠라 막부는 약 140여 년간 지속되었다. 일본사에서 중세에 해당하는 가마쿠라 시대는 이른바‘어은(御恩)’과‘봉공(奉公)’에 의한 지배구조로 유지되었다. 천황으로부터 통치를 위한 모든 권력을 이양 받은 쇼군이 가신들에게 영지를 주거나 지역의 수호, 지령 등의 관직을 하사하여 해당 지역을 다스리게 하였고, 이에 대해 가신들은 교토나 가마쿠라의 경비를 담당하거나 유사시에 병력을 동원하여 참전하는 봉공이 의무시되었다. 이와 같이 쇼군과 어가인이 토지를 매개로‘어은과 봉공’의 주종관계를 맺는 봉건제도가 가마쿠라 막부체제를 지탱하는 기본 골격이었다. 그런데 1274년과 1281년의 두 차례에 걸친 원나라의 침입으로.. 2025. 1. 26.
[일본사] - 조큐의 난과 가마쿠라 막부 조큐의 난(1221년)가마쿠라 막부의 설립과 정치적 상황1185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일본 역사상 최초의 무사 정권인 가마쿠라 막부를 설립했습니다. 요리토모는 귀족과 천황 중심의 기존 정치 체제를 무너뜨리고, 무사들에게 실질적 권력을 부여했습니다. 이를 위해 지방에 슈고(守護)와 지토(地頭)를 임명하여 군사와 행정 권한을 분담했으며, 이 체제는 막부의 지방 통치를 뒷받침했습니다. 그러나 교토에 기반을 둔 조정(천황과 귀족들)은 여전히 명목상 국가의 최고 통치자로 남아 있었고, 정치적 형식미를 유지하며 자신들의 권위를 지키려 했습니다.미나모토 가문의 몰락과 호조 가문의 부상막부 설립 후, 미나모토 가문은 가마쿠라의 쇼군직을 계승했지만, 1219년 3대 쇼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가 암살당하면서 가문이 단절.. 2025. 1. 25.
[일본사] - 가마쿠라 막부의 성립 가마쿠라 막부의 성립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다이라 군을 물리치고 새롭게 권력을 잡았다.그러나 그들은 다이라 가문의 전철을 밟지 않기위해 어줍잖은 귀족흉내를 내지 않았다.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무사가문다운 통치체재를 위해 새로운 조직을 거점인 가마쿠라에 설치했다.1185년 가마쿠라 막부의 시작이다. 가마쿠라는 수도였던 쿄토에서 서쪽으로 500km 떨어진 곳으로 꽤나 거리가 있었다. 가마쿠라 막부는 자신의 휘하에 모인 무사들과 주종 관계를 맺어서 이들을 고케닌, 즉 가신으로 삼았다.고케닌은 주군으로부터 영지를 하사받고, 그 대가로 전투에 참여하는 의무를 가졌다.이러한 토지를 매개로 한 주종관계는 일본 중세 700년을 지탱하는 기본 원리였다. 겐페이 전쟁의 마지막 전투인 1185년 단노우라 전투에서 다이라 일족을.. 2025. 1. 24.
[일본사] - 호겐의 난과 가마쿠라 막부의 등장 호겐의 난과 가마쿠라 막부의 등장1156년 교토에서 황위 계승문제로 천황과 상황 세력이 격돌한다.스도쿠 상황과 고시라카와 천황파로 분열되에 교토에서 두세력이 펼친 이 전쟁은 연호인 호겐에 있었던 전쟁이라 하여 호겐의 난으로 불리운다. 내전의 결과 패배한 스도쿠 상황은 폐서인 되어 유배되었다.천황과 상황의 격돌이었지만 오직 무사만이 전쟁에 참여하여 벌인 내전이었다. 교토의 상황, 천황, 귀족이 세력을 나누어 내전을 벌임에도 불구하고 오직 무사의 무력에 의해서만 승패가 결정되었다.이 전쟁으로 인해 무사들은 자신의 힘을 깨닫게 되었으며, 전쟁의 승패는 자신들에게 달려있음을 알게되었다. 호겐의 난을 기점으로 천황권의 고대사회가 저물고, 일본의 무사계급이 지배하는 중세가 도래하게 된다.호겐의 난 이후 무사들은 전.. 2025. 1. 23.
[일본사] - 사무라이, 무사의 등장 무사의 등장  헤이안 시대에 후지와라씨는 중앙귀족으로 섭관정치를 통해서 150년간 권세를 누렸다.그러나 후지와라 가문의 천황비가 계속 왕자를 생산하지 못하는 일이 거듭 일어나면서결국 후지와라와 혈통적으로 관계가 없는 고산죠 천황이 1068년 즉위한다.  고산죠는 섭관정치의 그늘에서 벗어나 천황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기조는 다음 천황인 시라카와 천황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들이 후지와라 가문과 결혼하게 되면다시 섭관정치가 나타날 것을 우려해 자신은 아들에게 천황 자리를 양위하고 상황이 되어 정치를 펼쳤다. 이러한 정치 형태를 원정이라고 한다. 원정이 후지와라의 세력을 누르고 천황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한 조치였다고는 하지만천황의 권위로 중앙집권을 회복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상황이 하.. 2025. 1. 22.
[일본사] - 헤이안 시대: 중앙집권의 종말과 봉건 사회의 시작 일본 헤이안 시대: 중앙집권의 종말과 봉건 사회의 시작1. 헤이안 시대의 서막: 천년의 수도 헤이안쿄794년, 간무 천황은 일본의 수도를 나라의 헤이죠쿄에서 현재의 교토 지역인 헤이안쿄(平安京)로 옮기며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헤이안쿄는 당나라의 수도 장안성을 본떠 설계된 대규모 도시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서 자리 잡았습니다. 북쪽에는 천황의 거처와 조정 건물이 위치했고, 도심에는 귀족 저택과 불교 사원이 세워졌습니다.헤이안쿄로의 천도는 당시 천황이 직면한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고, 중앙집권 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선택한 전략적 결단이었습니다. 헤이안 시대 초기, 간무 천황은 율령제를 유지하고 국가의 공지 공민제를 강화하기 위해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지방 호족과 귀족들의 세력.. 2025. 1. 21.
[일본사] - 일본 나라 시대: 중앙집권 체제의 도전과 새로운 전환점 일본 나라 시대: 중앙집권 체제의 도전과 새로운 전환점1. 나라 시대의 시작과 헤이죠쿄의 탄생710년, 일본은 새로운 정치적 도약을 선언하며 나라 시대를 열었습니다. 당시 수도인 헤이죠쿄(平城京)는 국가의 중심이자 천황의 권위를 상징하는 도시로서 건설되었습니다. 이 도시는 중국 당나라의 수도 장안성을 본떠 설계된 거대한 도시로, 북쪽에는 천황의 거처와 조정 건물이, 도심에는 귀족 저택과 대규모 불교 사원이 자리 잡았습니다. 이는 천황이 신성한 통치자로서 국가의 정점에 있음을 강조하는 상징적 배치였습니다. 또한, 헤이죠쿄는 일본의 정치적 안정과 문명화를 대내외에 과시하는 역할도 수행했습니다.2. 율령제와 조용조 제도의 모순나라 시대의 통치 체제는 중국의 율령제를 기반으로 삼아 정비되었습니다. 국가가 모든 .. 2025. 1. 20.
[일본사] - 일본의 중앙집권화와 천황제 국가의 탄생 일본의 중앙집권화와 천황제 국가의 탄생1장: 백촌강 전투와 일본의 위기660년, 동아시아의 정세는 격변의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한반도에서는 신라와 당나라가 동맹을 맺고 백제를 공격하였고, 그 결과 백제는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며 멸망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백제는 일본과 오랜 시간 외교적, 문화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고, 일본은 백제의 기술, 예술, 불교를 받아들이며 자신의 문화를 크게 발전시켜왔습니다. 이러한 백제의 몰락은 일본에게 단순한 외교적 손실을 넘어 문화와 기술의 기반을 위협하는 큰 사건으로 다가왔습니다.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본은 백제 부흥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662년, 일본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백제의 부흥군과 합류하였고, 이듬해 663년에는 한반도 남.. 2025. 1. 19.
[일본사] - 아스카 문화와 고대 일본 아스카 시대는 일본 고대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이룬 시기로, 일본의 고대 국가 형성과 불교 문화가 꽃핀 시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6세기 후반에서 8세기 초반에 걸쳐 약 150여 년 동안 이어진 이 시대는 일본의 역사적, 문화적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 글에서는 아스카 시대의 개요와 한반도와의 교류, 불교 전래, 불교 예술의 발전, 정치적 변화, 그리고 국제 관계의 변화를 상세히 다루어 보겠습니다.1. 아스카 시대란 무엇인가?아스카 시대(飛鳥時代)는 일본 고대사의 중요한 장으로, 나라현 아스카 지역을 중심으로 왕실이 새로운 궁전과 도시를 세운 시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시기는 일본 고훈 시대의 종말과 맞물려 등장했으며,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가 형성되기 시작한 시기였습니다. 아스카라는 명칭은 "편.. 2025. 1. 18.
[한국사] - 한국 송어 양식업의 발전과 역사 대한민국 송어 양식의 역사: 무지개송어와 양식업의 여정송어 양식의 시작: 박정희 정권과 미국 종란대한민국의 송어 양식은 1965년, 박정희 정권이 농어민 소득 증대 사업의 일환으로 미국에서 무지개송어 종란을 들여오면서 공식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사업은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구만리에 위치한 간이 부화장에서 시험 부화 과정을 통해 시작되었으며, 이후 강원도 평창과 영월 등지에서 송어장이 설립되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초기에는 정부 주도로 송어 양식을 추진했지만, 점차 민간으로 이양되며 양식 산업이 본격화되었습니다.송어 양식의 초기 전조: 일제강점기의 흔적대한민국의 송어 양식 역사는 1965년 이전에도 일부 시도된 바 있습니다. 1920년대 일제강점기, 일본은 한반도에 송어 양식을 도입하며 함남 지역에 양.. 2025. 1. 17.
[일본사] - 쇼토쿠 태자와 다이카 개신, 聖徳太子 쇼토쿠 태자와 일본의 개혁쇼토쿠 태자(聖徳太子, 574–622)는 일본 아스카 시대(飛鳥時代)의 대표적인 정치가이자 사상가로, 일본 고대 국가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일본 내 불교와 유교의 발전을 촉진했으며, 일본 정치 체제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됩니다.쇼토쿠 태자의 생애와 업적쇼토쿠 태자는 일본 천황가의 일원으로, 제33대 스이코 천황(推古天皇)의 섭정을 맡으며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했습니다. 그는 중국의 선진 문화를 적극적으로 도입해 일본을 중앙집권적 체제로 개혁하고자 했습니다.불교의 장려와 종교적 개혁:쇼토쿠 태자는 불교를 국가 차원의 종교로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사찰 건설을 장려하고, 스스로 불교 신앙을 실천하며 불교의 가르침을 정치와 연결하려 했습니다... 2025. 1. 16.
[일본사] - 야마토 정권과 고훈시대 야마토 정권과 고훈시대 3세기 말부터 일본 열도 곳곳에는 거대한 무덤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고분'(古墳, こふん)이 세워지기 시작한 이 시대를 고훈시대라고 부른다.고분은 많은 노동력을 요하기에 민중을 동원해야했다. 이는 민중에 대한 지배층의 절대적인 권력을 보여준다. 이러한 고분은 시신을 안치하기 위한 석실이 존재했으며, 해자를 두르기도 했다.고분시대는 4세기와 5세기까지 이어졌으며 일본의 고대국가가 형성되는 시기와 일치한다. 이때 현재의 나라, 교토, 오사카 지방에서 확립된 정권이 현대 일본인들이 정신적 시조로 여기는 야마토 정권이다. 일본의 4-5세기는 명확한 기록이 남지 않아 다양한 학설이 존재하지만, 거대 고분이 다수 건설된 야마토 정권을 중심으로 일본의 고대 통일 정권이 확립되었으리라 추측한다... 2025. 1. 15.
[일본사] - 고대 일본 소국의 형성과 통합: 히미코 여왕의 야마타이국 고대 일본 소국의 형성과 통합: 히미코 여왕의 야마타이국야요이 시대에 접어들면서 일본열도에는 벼농사가 보급되었다. 농업의 강력한 부양력을 바탕으로 집단이 대형화되고, 금속기의 사용으로 무력집단이 탄생하면서 집단 내부에서, 집단과 집단에서 투쟁과 병합이 반복되었다. 결국 이러한 과정을 통해 집단은 소국을 칭하게 되었고 그 정점에서 정치적 지배자 왕이 탄생하였다. 다만 이 당시의 지도자는 현재의 군 단위의 영토만을 영위하는 촌락 공동체의 지도자 수준이었다. 그렇기에 이러한 국가를 고대국가와 구분하여 ‘소국’이라고 칭한다. 이 시대에 소국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많이 없으나, 사서에 남은 소국이 있다. 2세기 말 존속했던 야마타이국이다. 야마타이국은 히미코라는 여왕이 다스린 것으로 전해진다. 중국사서 에 그 .. 2025. 1. 14.
[일본사] - 도래인과 야요이 시대의 서막 대륙에서 건너온 사람과 문명도래인과 야요이 시대 기원전 300년 경, 한반도를 통해 일본 열도로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농사를 짓고, 금속제 도구를 사용하는 무리로 규슈 북부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내 일본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이들로 인해 농사와 금속도구 사용을 특징으로 하는 야요이 시대가 시작되었다.  야요이인은 빠르게 일본 전역으로 퍼져 약 400년만에 혼슈까지 나아갔다. 이 시대를 이들이 사용한 토기가 발견된 곳의 이름을 따 야요이 시대라고 부른다. 야요이 시대는 기원전 300년부터 기원후 3세기까지 약 600년의 시간을 가르키며, 이때를 기점으로 일본은 본격적인 농경사회로 발전하게된다. 농경 사회가 나타난 야요이 시대의 큰 특징은 벼농사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벼농사는 고도의 농사.. 2025. 1. 13.
[일본사] - 조몬 시대: 일본 신석기 시대의 시작과 문화 일본 열도의 신석기 시대, 조몬시대 기원전 1만년 경 빙하기가 끝나면서 인류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기후가 따뜻해지며 자연환경이 좀더 살기 좋게 바뀌었다. 온난한 기후와 우거진 숲은 인간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빙하가 녹았기 때문에 바닷물이 차오르면서 육지와 연결되었던 일본은 어느새 섬이 되어 대륙과 연결이 끊어졌다. 혼슈, 시코쿠, 큐슈, 홋카이도로 나뉘어졌다. 이때부터 현대 일본인과 연관성 있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토기를 사용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고, 약 1만년 전부터 기원전 3세기까지 긴 시간대에서 활동했다. 이들이 사용한 토기 표면에 새끼줄처럼 보이는 문양을 넣었는데, 그래서 이를 조몬토기라고 불렀다. 토기의 이름을 따서 시대 또한 조몬 시대라 이름 붙였.. 2025. 1. 12.
[일본사] - 일본 구석기 시대와 후지무라 사건 일본열도에 등장한 인류, 열도의 구석기 시대 일본사에서의 구석기 시대는 인류가 일본 열도로 들어선 순간부터 신석기 조몬 문화가 나타나는 순간까지를 지칭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1만 6500년 전 정도로 여겨진다. 구석기의 일본지역은 대륙과 연결되어 있었다. 해수면의 높이가 지금과는 달랐기에 지금의 경상도에 해당하는 부분과 규슈가 맞닿아 있었다.  지금의 동해는 바다와 분리된 호수 형태를 띄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오랫동안 구석기 유적이 발견되지 않아 구석기 시대에 인류가 살지 않았다고 생각해왔으나, 1949년 이와주쿠에서 구석기 유적이 발견되면서, 일본에도 구석기부터 사람이 살았음이 입증되었다.  그러나 구석기 시대 일본에 살았던 인류가 현재 일본인의 조상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우선 구석기를 살았던 인류.. 2025. 1. 11.
[중국사] -중국 민주화 요구의 물결과 천안문 [중국사] -중국 민주화 요구의 물결과 천안문 모든 권력은 인민의 것이다. 인민은 잊지 않는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1989년 6월 4일, 넓은 광장에 수많은 시민이 모여 자유를 외치고 있습니다.그리고 곧 수많은 전차가 밀려들어 이 학생과 시민들을 밀어버립니다.도대체 무슨일이 있었던 걸까요. 문화대혁명의 실패 이후 집권한 덩샤오핑은 개혁개방 정책을 주도하며 세계에 중국의 문호를 열고 경제 교류를 시행합니다. 이로인해 지식인과 대중을 중심으로 서구세계와의 접촉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으며, 자유와 민주화를 향한 이들의 열망 또한 커져갔습니다.  그러던 중 1989년 4월, 중국 공산당에서 민주화의 상징격인 인물인 후야오방이 사망하면서, 그를 추모하는 인원들이 베이징 천안문으로 몰려들기 시작했죠. 후야오방의 .. 2024. 10. 20.
[중국사] - 중국 현대사의 상처, 마오의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 [중국사] - 중국 현대사의 상처, 마오의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 중국은 1958년부터 국가경제건설 2차 5개년 계획을 실시했다. 공업부분에서는 철강을 중심으로 발전계획을 구상하고, 농업에서는 곡물의 생산량을 늘리는 쪽으로 목표를 잡았다. 당시 우방국 소련은 인공위성을 발사하는 등의 국제적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이에 자극받은 모택동은 15년 이내로 철강생산량에서 영국을 따라잡겠다는 캐치프레이를 내걸고 생산부분의 대약진운동을 펼쳤다. 대약진운동은 마오쩌둥의 주도로 진행된 농공업 증산 정책이었다. 중국은 당시 농업국으로 국가 발전의 유일한 수단은 오직 농업뿐이었다. 농업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한정된 농지에서 곡물을 빽빽히 심고 땅을 깊게 파는 밀식과 심경을 이용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오히려 생산량을 감.. 2024. 10. 18.
[중국사] - 대륙통일과 독재의 시작,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중국사] - 대륙통일과 독재의 시작,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1949년 10월 1일,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되었다. 중국은 인민공화국 설립에 앞서 새로운 중국의 정치제도를 준비하였다. 이들이 구상한 새로운 중국은 노동자와 중국공산당의 지도 아래, 국민당에 대한 독재를 취하는 인민민주주의독재국가 였다. 건국 이후 공산당의 급선무는 외교관계를 통해 소련과 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1949년 12월 중국을 출발한 모택동이 3개월간이나 소련에 머물면서, 우호조약을 체결한 사실은 중국의 다급함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당시 오직 소련만이 중국공산당의 중국을 인정한 상황이었고, 별다른 우방이 없던 중국으로서는 소련의 인정과 관계설정이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당시 냉전이 본격화 되던 시기였기에, 소련 역시.. 2024. 10. 17.
[중국사] - 대륙을 건 전쟁, 국공내전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설립 [중국사] - 대륙을 건 전쟁, 국공내전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설립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면서 중국에서의 전쟁도 종료되었다. 중국은 일본을 상대로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그러나 그 승리는 중국인 2000만명이 죽고, 5000억 달러 이상의 손해를 입은 상처뿐인 승리였다. 국민들은 경제회복과 새로운 국가건설이 염원이었지만, 국민당과 공산당의 패권다툼이 남아있었다.  진격하는 일본군을 피해서 중경으로 천도했던 국민당 정부는 부패로 인해 악명을 떨쳤다. 게다가 일본군이 점령했다가 국민당 정부로 복귀한 도시들에서는 일대 혼란이 연일 이어졌다. 국민당군은 놀랍게도 수복한 도시들을 약탈하고 자원을 압수를 했다. 이로 인해 도시의 경제는 붕괴되어갔다. 마치 점령군같이 행동하는 국민당군에 대해서 중국의 도시민에게서 .. 2024. 10. 16.
[중국사] - 일제의 침략, 만주사변과 2차 국공합작 [중국사] - 일제의 침략, 만주사변과 2차 국공합작  일본은 러일전쟁 승리 이후로 남만주와 동북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1928년 남경국민정부가 성립하고 세계대공황이 닥쳐오자 일본은 만주와 몽골에서의 이권확보를 국가의 생존에 관련된 사항으로 인식하고, 중국 동북지역을 무력으로 점령하려 하였다. 1931년 9월 만철노선 폭파사건을 빌미로 관동군은 동북지역을 침략하기 시작했고, 5개월만에 점령하였다. 일본의 만주침략은 관동군의 독단적 행동과 그에 대한 일본 정부의 묵인으로 시작되었다. 결국 그렇게 15년에  걸쳐 일본의 대륙침략전쟁이 시작되었다.남경정부는 일본의 불법척 침략을 규탄해줄 국제연맹의 외교적 해결을 기다렸다. 그러나 국제연맹은 실질적 구속력이 없었고, 남경정부 역시 일본군에 완강히 .. 2024. 10. 15.
[중국사] - 중국의 붉은물결 공산당과 홍군, 공산당 대장정 [중국사] - 중국의 붉은물결 공산당과 홍군, 공산당 대장정1917년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인 러시아 혁명 이후 중국에서도 꾸준히 공산당이 성장하였다. 이들은 도시의 중산계급을 통해 혁명을 이루려 했지만 계속해서 실패했으며, 러시아와 같은 혁명의 성공을 위하여 계속 투쟁하였다. 그러던 중 항일을 목적으로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첫번째 합작인 1차 국공합작이 성립하였다. 일본에 대항하기 위한 국공합작이 성립하면서, 공산당원이 국민당에 개인자격으로 입당하였다. 국민당은 당의 체질개선, 공산당은 공산주의 저변확대를 노렸으나 1927년 장제스의 지시로 이루어진 상하이 쿠테타에 의해 국공합작은 붕괴했다. 상하이 쿠테타로 중국공산당은 타격을 입고 국민당과 결별하여 결국 국공내전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국공합작의.. 2024. 10. 14.
[중국사]- 장제스의 남경 국민정부와 국민당 치세 황금의 10년 [중국사]- 장제스의 남경 국민정부와 국민당 치세 황금의 10년쑨원의 오른팔로 혁명군을 이끌었던 장제스는 1925년 쑨원이 죽은 뒤 국민당의 권력을 잡았다. 그리고 1925년부터 중국 각지에 난립한 군벌을 정벌해 중국을 통일하고자 한다. 이를 북벌이라 한다. 그리고 국민당 내 좌파들이 우한에서 정부를 세우고 대립하자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남경국민정부는 4월부터 2차 북벌을 시작하여 완수하였다. 이 북벌은 대중 복이 없이 군벌들의 합류에 따른 혼성군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표면적으로는 국민당의 지배아래 중국은 다시 통일을 되찾는 것 같이 보였다. 그러나 군벌들이 별다른 혁명정신 없이 남경정부에 참여하였으므로 부정부패가 심하였고, 혁명정신은 찾아 볼 수 없었다. 국민정부는 1928년 베이징을 탈환했고, 중국을.. 2024. 10. 13.
[중국사]- 중국 최초의 공화혁명, 신해혁명과 중화민국의 성립 [중국사]- 중국 최초의 공화혁명, 신해혁명과 중화민국의 성립 청조는 만주족을 중심으로 효율적인 한족분리정책을 시행했다. 그리고 압도적 다수의 한족에게서 충성을 얻어냈다. 이를 통해 200여년간 중국을 통치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 들어서 서구 열강의 아시아 진출로 인해서, 국방의 실패와 개혁의 실패, 그리고 민정의 실패로 청왕조에 대한 한족의 충성심은 천천히 사라져갔다.  청조의 무능과 부패에 실망한 한족은 반만주족 혁명을 주창했다. 이를 가장 먼저 혁명에 나선 사람은 손문이었다. 그는 청일전쟁 무렵 하와이와 홍콩에서 흥중회를 세워 무장 봉기를 통한 청조 타도와 공화제 국가의 건설을 꿈꿨다. 그리고  1903년 거아운동을 통해 반 제국주의 운동을 탄압하는 청조의 모습을 목도한 학생들은 혁명.. 2024. 10. 6.
[중국사] - 청의 마지막 선택, 광서신정과 입헌 준비 계획 [중국사] - 청의 마지막 선택, 광서신정과 입헌 준비 계획 서태후는 반외세를 외쳤던 반란인 의화단 운동을 이용하여 열강을 몰아내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강력한 열강의 군대에 의해 의화단이 전멸상태에 빠지자, 어쩔수 없이 다시 개혁을 다시 추진할 수 밖에 없었다. 열강들이 군대를 이끌고 북경으로 들어와 점령하자, 열강과 강화협상을 추진하면서 개혁을 추진해야했다. 그리하여 서태후는 1901년 1월에 이른바 ‘변법상유'를 발표하여 광서신정을 지시했다.신정은 ‘새로운 정치’라는 뜻으로, 정부 차원에서 전반적으로 서구화와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중국 사회의 본격적 근대화는 이 광서신장에서 찾을 수 있다. 열강에게 위협받는 현실을 탈치하기 위해 청조는 광서신정에서 신식군대의 창설과 훈련을 가장 중시하였다. 그리.. 2024. 10. 4.
[중국사] - 청을 일으키려했던 무술개혁과 새로운 시련, 의화단운동 [중국사] -  청을 일으키려했던 무술개혁과 새로운 시련, 의화단운동 중국이 자강운동을 일으키며 혁신을 꾀할때, 일본 역시 메이지 유신을 통해서 국력을 키우기 시작하면서 청과 일본은 점차 긴장을 더해가고 있었다. 긴장 속의 중일 관계는 마침내 청일전쟁으로 폭발하였다. 청일전쟁은 사실 청나라 전체의 국력이 투사된 전쟁은 아니었다. 당시 북양대신 이홍장 소속 북양군대와 일본의 총동원령에 의해 모인 군대가 맞붙은 군대였다. 이 전쟁에서 참패를 당한 청조는 일본과의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배상금을 물어내야 했다. 은 2억냥과 조선에서의 영향력, 대만을 일본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당시 청 군대의 패배는 청의 관료와 사대부들은 믿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아시아의 호랑이가 위성국인 일본에게 패하고, 동시에 유럽열강이 중.. 2024. 10. 3.
[중국사] - 새로운 희망, 청의 변법자강운동 [중국사] - 새로운 희망, 청의 변법자강운동 영국과 프랑스 등 서구 열강은 두번의 아편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청조에게서 난징조약과 베이징조약을 얻어내는데 성공한다. 당시 태평천국운동으로 전국 각지에서벌어지는 반란을 진압하는데 전전긍긍했던 청조는 영토가 아닌 겨우 통상조약만으로 침략을 멈춘다는 서구열강의 조건에 바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침략의 시작이라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이제 청조와 서구는 대립이 아닌 협조관계로 전환되었고, 이를 위해 청에는 총리아문이라는 관청이 설치되어 서양과의 모든 사무를 총괄하게 되었다. 대신 열강은 청조에게 군사력 원조와 근대적 기술, 차관같은 자본 협력을 약속했다. 이를 활용해 청조를 지원하고, 청나라 내부에서 열강의 이익을 완고히 하였다. 이 무렵 청의 권력은.. 2024. 10. 2.
[중국사] - 청 몰락의 신호탄, 태평천국의 시작 [중국사] - 청 몰락의 신호탄, 태평천국의 시작 아편전쟁의 패배로 중국은 거액의 배상금을 영국에게 배상해야 했다. 또한 거액의 전쟁비용까지 부담하면서 청조의 재정은 적자로 치달았다. 여기에 남경조약으로 인해 광주에서 상해로 경제의 중심지가 옮겨 가버리자, 광주를 비롯한 남부에서는 경기 침체와 대규모 실업사태가 발생하였다. 사회적 불만이 쌓이고 있었고 거기에 경제적 어려움이 겹치자, 청조에 대한 불만이 분출되기 시작하였다. 결국 1850년 민중의 불만이 터져나와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난다. 태평천국운동이 일어나기 10년 전부터 광서성에서는 100회에 이르는 반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중 태평천국운동만이 유일하게 전국적 규모의 동란으로 발전하였다. 이는 서구에서 유입된 기독교 신앙을 기반으로 성립된 이념을 .. 2024. 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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