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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41

[일본사] - 무로마치 막부의 몰락과 일본 전국시대의 시작 무로마치 막부의 몰락과 일본 전국시대의 시작앞서 언급하였듯이 무로마치막부의 시작은 남북조의 대립이 치열하였던 1338년의 일이었다. 고다이고천황을 교토에서 몰아냄으로써 건무친정을 종결시킨 아시카가 타카우지는, 1336년 스스로가 옹립한 코우묘 천황으로부터 정이대장군직을 임명받고, 교토에서 새로운 막부를 개창한다. 가마쿠라에 이은 두번째 막부, 무로마치 막부 시대의 개막이다. 원래 토우코쿠 지역을 기반으로 둔 가신이었던 아시카가가 교토에 막부를 세우게 된 이유는 당시 교토가 산업과 유통의 중심이었다는 경제적 이유와 요시노 의 남조를 비롯한 교토 주변의 적대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군사적 이유가 함께 있었다. 그리고 무로마치 막부라는 명칭은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교토의 무로마치에 ‘꽃의 궁전’짓고 나라.. 2025. 1. 28.
[일본사] - 고다이고 천황과 남북조시대 고다이고 천황과 남북조시대 아시카가 타카우지와 닛타 요시사다 등의 활약으로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킨 고다이고천황은 코우곤천황을 퇴위시키고, 코우곤천황이 서명한 칙서는 물론 전대에 행해진 모든 관직의 무효를 선언한다. 그리고 천황의 친정체제 아래 공가(公家)와 무가(武家)를 합한 새로운 정치체제를 시행한다. 종래의 토지소유권을 무효로 하고, 새롭게 토지소유권을 신청 받는 등 천황친정체제 기틀 마련에 힘쓴다.그러나 공가만을 중시하고,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는 등으로 인해 무사들과 농민들의 불만이 커져간다.이러한 불만들을 감지한 아시카가 타카우지는 1335년 가마쿠라 막부의 잔당을 토벌하기 위해 가마쿠라로 출병하게 된 것을 기회로 조정에 반기를 든다. 1336년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교토를 수중에 넣고, 고다이고.. 2025. 1. 27.
[일본사] - 원의 침략과 가마쿠라 막부의 멸망 원의 침략과 가마쿠라 막부의 멸망1192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 의해 가마쿠라를 본거지로 시작된 가마쿠라 막부는 약 140여 년간 지속되었다. 일본사에서 중세에 해당하는 가마쿠라 시대는 이른바‘어은(御恩)’과‘봉공(奉公)’에 의한 지배구조로 유지되었다. 천황으로부터 통치를 위한 모든 권력을 이양 받은 쇼군이 가신들에게 영지를 주거나 지역의 수호, 지령 등의 관직을 하사하여 해당 지역을 다스리게 하였고, 이에 대해 가신들은 교토나 가마쿠라의 경비를 담당하거나 유사시에 병력을 동원하여 참전하는 봉공이 의무시되었다. 이와 같이 쇼군과 어가인이 토지를 매개로‘어은과 봉공’의 주종관계를 맺는 봉건제도가 가마쿠라 막부체제를 지탱하는 기본 골격이었다. 그런데 1274년과 1281년의 두 차례에 걸친 원나라의 침입으로.. 2025. 1. 26.
[일본사] - 조큐의 난과 가마쿠라 막부 조큐의 난(1221년)가마쿠라 막부의 설립과 정치적 상황1185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일본 역사상 최초의 무사 정권인 가마쿠라 막부를 설립했습니다. 요리토모는 귀족과 천황 중심의 기존 정치 체제를 무너뜨리고, 무사들에게 실질적 권력을 부여했습니다. 이를 위해 지방에 슈고(守護)와 지토(地頭)를 임명하여 군사와 행정 권한을 분담했으며, 이 체제는 막부의 지방 통치를 뒷받침했습니다. 그러나 교토에 기반을 둔 조정(천황과 귀족들)은 여전히 명목상 국가의 최고 통치자로 남아 있었고, 정치적 형식미를 유지하며 자신들의 권위를 지키려 했습니다.미나모토 가문의 몰락과 호조 가문의 부상막부 설립 후, 미나모토 가문은 가마쿠라의 쇼군직을 계승했지만, 1219년 3대 쇼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가 암살당하면서 가문이 단절.. 2025. 1. 25.
[일본사] - 가마쿠라 막부의 성립 가마쿠라 막부의 성립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다이라 군을 물리치고 새롭게 권력을 잡았다.그러나 그들은 다이라 가문의 전철을 밟지 않기위해 어줍잖은 귀족흉내를 내지 않았다.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무사가문다운 통치체재를 위해 새로운 조직을 거점인 가마쿠라에 설치했다.1185년 가마쿠라 막부의 시작이다. 가마쿠라는 수도였던 쿄토에서 서쪽으로 500km 떨어진 곳으로 꽤나 거리가 있었다. 가마쿠라 막부는 자신의 휘하에 모인 무사들과 주종 관계를 맺어서 이들을 고케닌, 즉 가신으로 삼았다.고케닌은 주군으로부터 영지를 하사받고, 그 대가로 전투에 참여하는 의무를 가졌다.이러한 토지를 매개로 한 주종관계는 일본 중세 700년을 지탱하는 기본 원리였다. 겐페이 전쟁의 마지막 전투인 1185년 단노우라 전투에서 다이라 일족을.. 2025. 1. 24.
[일본사] - 호겐의 난과 가마쿠라 막부의 등장 호겐의 난과 가마쿠라 막부의 등장1156년 교토에서 황위 계승문제로 천황과 상황 세력이 격돌한다.스도쿠 상황과 고시라카와 천황파로 분열되에 교토에서 두세력이 펼친 이 전쟁은 연호인 호겐에 있었던 전쟁이라 하여 호겐의 난으로 불리운다. 내전의 결과 패배한 스도쿠 상황은 폐서인 되어 유배되었다.천황과 상황의 격돌이었지만 오직 무사만이 전쟁에 참여하여 벌인 내전이었다. 교토의 상황, 천황, 귀족이 세력을 나누어 내전을 벌임에도 불구하고 오직 무사의 무력에 의해서만 승패가 결정되었다.이 전쟁으로 인해 무사들은 자신의 힘을 깨닫게 되었으며, 전쟁의 승패는 자신들에게 달려있음을 알게되었다. 호겐의 난을 기점으로 천황권의 고대사회가 저물고, 일본의 무사계급이 지배하는 중세가 도래하게 된다.호겐의 난 이후 무사들은 전.. 2025. 1. 23.
[일본사] - 사무라이, 무사의 등장 무사의 등장  헤이안 시대에 후지와라씨는 중앙귀족으로 섭관정치를 통해서 150년간 권세를 누렸다.그러나 후지와라 가문의 천황비가 계속 왕자를 생산하지 못하는 일이 거듭 일어나면서결국 후지와라와 혈통적으로 관계가 없는 고산죠 천황이 1068년 즉위한다.  고산죠는 섭관정치의 그늘에서 벗어나 천황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기조는 다음 천황인 시라카와 천황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들이 후지와라 가문과 결혼하게 되면다시 섭관정치가 나타날 것을 우려해 자신은 아들에게 천황 자리를 양위하고 상황이 되어 정치를 펼쳤다. 이러한 정치 형태를 원정이라고 한다. 원정이 후지와라의 세력을 누르고 천황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한 조치였다고는 하지만천황의 권위로 중앙집권을 회복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상황이 하.. 2025. 1. 22.
[일본사] - 헤이안 시대: 중앙집권의 종말과 봉건 사회의 시작 일본 헤이안 시대: 중앙집권의 종말과 봉건 사회의 시작1. 헤이안 시대의 서막: 천년의 수도 헤이안쿄794년, 간무 천황은 일본의 수도를 나라의 헤이죠쿄에서 현재의 교토 지역인 헤이안쿄(平安京)로 옮기며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헤이안쿄는 당나라의 수도 장안성을 본떠 설계된 대규모 도시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서 자리 잡았습니다. 북쪽에는 천황의 거처와 조정 건물이 위치했고, 도심에는 귀족 저택과 불교 사원이 세워졌습니다.헤이안쿄로의 천도는 당시 천황이 직면한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고, 중앙집권 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선택한 전략적 결단이었습니다. 헤이안 시대 초기, 간무 천황은 율령제를 유지하고 국가의 공지 공민제를 강화하기 위해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지방 호족과 귀족들의 세력.. 2025. 1. 21.
[일본사] - 일본 나라 시대: 중앙집권 체제의 도전과 새로운 전환점 일본 나라 시대: 중앙집권 체제의 도전과 새로운 전환점1. 나라 시대의 시작과 헤이죠쿄의 탄생710년, 일본은 새로운 정치적 도약을 선언하며 나라 시대를 열었습니다. 당시 수도인 헤이죠쿄(平城京)는 국가의 중심이자 천황의 권위를 상징하는 도시로서 건설되었습니다. 이 도시는 중국 당나라의 수도 장안성을 본떠 설계된 거대한 도시로, 북쪽에는 천황의 거처와 조정 건물이, 도심에는 귀족 저택과 대규모 불교 사원이 자리 잡았습니다. 이는 천황이 신성한 통치자로서 국가의 정점에 있음을 강조하는 상징적 배치였습니다. 또한, 헤이죠쿄는 일본의 정치적 안정과 문명화를 대내외에 과시하는 역할도 수행했습니다.2. 율령제와 조용조 제도의 모순나라 시대의 통치 체제는 중국의 율령제를 기반으로 삼아 정비되었습니다. 국가가 모든 .. 2025. 1. 20.
[일본사] - 일본의 중앙집권화와 천황제 국가의 탄생 일본의 중앙집권화와 천황제 국가의 탄생1장: 백촌강 전투와 일본의 위기660년, 동아시아의 정세는 격변의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한반도에서는 신라와 당나라가 동맹을 맺고 백제를 공격하였고, 그 결과 백제는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며 멸망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백제는 일본과 오랜 시간 외교적, 문화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고, 일본은 백제의 기술, 예술, 불교를 받아들이며 자신의 문화를 크게 발전시켜왔습니다. 이러한 백제의 몰락은 일본에게 단순한 외교적 손실을 넘어 문화와 기술의 기반을 위협하는 큰 사건으로 다가왔습니다.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본은 백제 부흥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662년, 일본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백제의 부흥군과 합류하였고, 이듬해 663년에는 한반도 남.. 2025. 1. 19.
[일본사] - 아스카 문화와 고대 일본 아스카 시대는 일본 고대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이룬 시기로, 일본의 고대 국가 형성과 불교 문화가 꽃핀 시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6세기 후반에서 8세기 초반에 걸쳐 약 150여 년 동안 이어진 이 시대는 일본의 역사적, 문화적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 글에서는 아스카 시대의 개요와 한반도와의 교류, 불교 전래, 불교 예술의 발전, 정치적 변화, 그리고 국제 관계의 변화를 상세히 다루어 보겠습니다.1. 아스카 시대란 무엇인가?아스카 시대(飛鳥時代)는 일본 고대사의 중요한 장으로, 나라현 아스카 지역을 중심으로 왕실이 새로운 궁전과 도시를 세운 시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시기는 일본 고훈 시대의 종말과 맞물려 등장했으며,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가 형성되기 시작한 시기였습니다. 아스카라는 명칭은 "편.. 2025. 1. 18.
[일본사] - 쇼토쿠 태자와 다이카 개신, 聖徳太子 쇼토쿠 태자와 일본의 개혁쇼토쿠 태자(聖徳太子, 574–622)는 일본 아스카 시대(飛鳥時代)의 대표적인 정치가이자 사상가로, 일본 고대 국가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일본 내 불교와 유교의 발전을 촉진했으며, 일본 정치 체제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됩니다.쇼토쿠 태자의 생애와 업적쇼토쿠 태자는 일본 천황가의 일원으로, 제33대 스이코 천황(推古天皇)의 섭정을 맡으며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했습니다. 그는 중국의 선진 문화를 적극적으로 도입해 일본을 중앙집권적 체제로 개혁하고자 했습니다.불교의 장려와 종교적 개혁:쇼토쿠 태자는 불교를 국가 차원의 종교로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사찰 건설을 장려하고, 스스로 불교 신앙을 실천하며 불교의 가르침을 정치와 연결하려 했습니다... 2025.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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