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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사] - 프랑스 대혁명의 경제적, 구조적 배경 [프랑스사] - 프랑스 대혁명의 경제적, 구조적 배경 프랑스 대혁명은 1789년부터 1848년까지 일어난 일련의 혁명을 일컫는다. 1789년 일어난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을 시작으로 1830년 7월 혁명과 1848년 2월 혁명까지 모두 포괄한다. 프랑스 사회가 가진 모순을 시민과 농민이 주축이 되어 민중혁명으로 체제를 전복시킨 프랑스 혁명은 시민계급이 절대 왕정에 저항하여 봉건적 특권계급과 투쟁해서 승리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한 최초의 민중혁명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 혁명의 배경: 프랑스의 경제적 궁핍과 계급 구조적 모순 프랑스 혁명은 프랑스 사회가 가지고 있던 구조적 모순과 경제적 궁핍함에서 기인한다. 경제적 궁핍함으로는 당시 프랑스가 처했던 외교적인 상황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프랑스는 18.. 2023. 5. 7.
[독일사] - 프리드리히 대왕과 슐레지엔 정복,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 [독일사] - 프리드리히 대왕과 슐레지엔 정복,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 프리드리히 대왕은 28세의 어린나이로 즉위하자 마자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이라는 상황을 맞이한다. 그는 선대들이 전해 내려준 풍족한 재정, 능률적인 관료조직, 훌륭하게 훈련된 군대를 가지고 있었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전쟁이 일어나자 국운을 짊어지고 뛰어들었다. 오스트리아는 현재의 벨기에와 이탈리아 일부를 영토로 가지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남자상속을 기반으로 계승을 관리하였는데, 황제 카를 6세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외동딸 마리아 테레지아만이 유일한 계승자였다. 황제는 생전에 딸에게 황제 자리를 계승하게 하려 1713년 국사조칙을 반포하는 등의 노력을했으나, 황제가 죽자 이 조칙을 지킬 국가는 어디에도 없었다. 카를 6세가 죽자 프.. 2023. 5. 6.
[영국사] - 제임스 2세와 명예혁명, 하노버 왕조와 오렌지공 윌리엄 [영국사] - 제임스 2세와 명예혁명, 하노버 왕조와 오렌지공 윌리엄 아버지인 찰스 1세가 크롬웰에 의해 처형되고, 그의 아들 찰스 2세는 프랑스로 망명하여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660년 크롬웰 사후 왕정복고를 통해 다시 잉글랜드의 왕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찰스 2세는 많은 국민들이 가지고 있던 청교도식 금욕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거기에 신중한 성격으로 의회와 협의를 통한 정치를 하면서 자신의 자리를 잘 유지했다. 그러나 그가 후사없이 죽고, 동생인 제임스 2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다시 혁명이 시작된다. 제임스 2세는 유능한 행정가이자 군인이었지만 정치가로서의 재목은 아니었다. 의회와의 협치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거기에 국왕이 카톨릭 신자이다 보니, 잉글랜드에서 카톨릭의 재합법화를 원했다... 2023. 5. 5.
[영국사] - 청교도 혁명과 올리버 크롬웰, 영국의 왕정복고 [영국사] - 청교도 혁명과 올리버 크롬웰, 영국의 왕정복고 의회와 국왕 찰스가 각각 군대를 조직하면서 영국은 내전에 휩싸인다. 이를 청교도 혁명이라 한다. 내란이 시작되었을 무렵 전세는 왕당파인 기사당에 유리했다. 의회파의 군대는 지방유력인사들의 병력을 끌어모은 형식이었기에 약하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1644년 마스턴 무어전투에서 두각을 드러낸 원두당의 크롬웰이 전면에 등장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올리버 크롬웰은 철기군을 조직하여 내전 초반에 왕당파에 밀리던 상황을 역전시켰으며, 신형군(New model army)를 조직하여 네이즈비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가져온다. 크롬웰의 잇따른 승전보로 그는 의회에서 강한 영향력을 갖게되었다. 왕당파는 이후 전세를 뒤집지 못하고 1년 뒤에 의회파에 항복한다. .. 2023. 5. 4.
[영국사] - 찰스 1세와 영국 청교도 혁명의 시작 [영국사] - 찰스 1세와 영국 청교도 혁명의 시작 찰스 1세의 장기의회의 선거 결과는 의회파의 강세와 국왕파의 약세로 나타났다. 찰스1세의 폭정과 의회의 의원들을 체포하려 했던 행동으로 인해 그동안 이어져온 협조는 사라졌다. 이는 스튜어튜 왕조에 대한 의회의 협조는 더 이상 없을 것이란 의미였다. 의회는 찰스 국왕이 행해온 세금같은 지금까지의 폐산을 일소하고, 과세를 폐지했다. 이는 영국 국왕이 휘두르던 절대왕정에 대한 제한이자 개혁작업이었다. 의회의 작업은 성실청(Star Chamver)이라는 특별법정 같은 왕권의 특별법정을 해체하고 강압적인 국교회 정책을 철회하며, 3년마다 의회의 정기적인 소집을 결의했다. 장기의회의 개혁작업과 더불어서 억눌렸던 영국사회는 이때를 기점으로 언로가 트이기 시작한다. .. 2023. 5. 2.
[영국사] - 스튜어트 왕조와 영국 혁명의 전조, 권리청원과 의회 해산 [영국사] - 스튜어트 왕조와 영국 혁명의 전조, 권리청원과 의회 해산 엘리자베스 1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튜더왕조는 단절되었다. 이에 메리 스튜어트의 아들이자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6세가 영국왕 제임스 1세로 즉위하였다. 이는 절대왕권과 의회가 국민적 지지아래 활동하는 튜더왕조의 절대왕권적 통치와 이별하게 되는 사항이었다. 제임스는 영국의 현실을 자각하지 못한채 자신의 신념대로 왕권 신수설을 주장하면서 이를 실천하려하였다. 의회는 이에 반대의사를 표명하면서 절대왕권과 의회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동시에 그는 청교도를 박해하면서 종교적 갈등도 일으켰다. 일부 청교도들은 박해를 피해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갔다. 영국에서 왕과 의회의 대립은 계속 이어졌다. 의회는 왕이 필요로 하는 .. 2023. 5. 1.
[러시아사] - 민족주의와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공화국의 시대 [러시아사] - 민족주의와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공화국의 시대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에도 각지에서 일어나는 민족주의적 독립투쟁과 경제정책 파행으로 소비에트 내부의 상황은 파국을 향하고 있었다. 고르바초프 집권 초기의 낙관론과 희망적인 메세지는 모두 사라진 상태였고, 대중의 열광이 난국을 타개할 것이라는 고르바초프의 희망이 무색하게 상황은 악화되었다. 러시아의 경제상황은 악화일로를 걷고있었다. 소비에트 시민은 물질문명적 측면에서 매우 궁핍해졌다. 1990년 무렵에는 산업쇠퇴와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경제가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소비품 부족사태로 인해 상점에는 긴 줄이 생겼고, 기근에 대한 우려까지 불거졌다. 1990년 봄, 우랄과 시베리아, 우크라이나 광부들이 파업을 일으켰다. 그들은 물질적인 .. 2023. 4. 22.
[러시아사] - 고르바초프의 등장과 소비에트, 러시아의 개혁과 쿠테타 [러시아사] - 고르바초프의 등장과 소비에트, 러시아의 개혁과 쿠테타 1985년 소비에트의 지도자로 등장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소비에트가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당시 소비에트와 동유럽에서 전개되던 사건들은 소비에트 지도부는 물론이고 모든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를 실망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소비에트 경제의 낮은 경제성장률은 비판론과 결부되어 그에게 사회 개혁의 의무를 수행하게 만들었다. 고르바초프는 서기장에 임명되었을 때 우선 소비에트 내외에 산적한 문제들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면서 위기에 대응하고자 했다. 소비에트에 산적한 문제는 우선 낮은 경제성장률, 생활수준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 암울한 농업 상황, 제조업의 질 하략, 과학 기술분야에서 세계의 발전 수준에 뒤떨어지기 시작한 것, 국.. 2023. 4. 22.
[러시아사] - 프라하의 봄과 아프가니스탄 침공, 소비에트의 폭력적 대응 2 [러시아사] - 프라하의 봄과 아프가니스탄 침공, 소비에트의 폭력적 대응 2 동유럽의 문제는 끊임없이 불거져나왔다. 헝가리 혁명을 진압한 후 12년간 소비에트는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제도적 다양성과 이데올로기적 다양성을 가진 공산주의 다원주의를 용인하려했다. 그러나 이는 동유럽 여러 국가들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현상을 포괄하지는 못했다. 1968년 프라하에서는 “프라하의 봄"이라 불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체코,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은 경기침체에 시달리고 있었다. 프라하의 봄은 이러한 경제침체를 해결할 것을 요구하는 개혁요구, 민주화 요구 운동이었다. 프라하의 봄에 의해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권력독점을 포기한다고 말했고, 경제 수정주의와 민주주의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동.. 2023. 4. 21.
[러시아사] - 폴란드와 헝가리의 혁명, 소비에트의 폭력적 대응 [러시아사] - 폴란드와 헝가리의 혁명, 소비에트의 폭력적 대응 1956년은 소비에트에게 있어 놀란만한 해였다. 스탈린 치하에서는 허용되지 않았던 티토와 유고슬라비아의 노선은 오류를 낳았고, 스탈린의 후임자인 후르쇼프와 불가닌은 이 오류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위해 베오그라드를 방문했다. 이러한 부드러운 정책에 반대했던 외교장관 몰로토프는 셰필로프로 교체되었다. 흐루쇼프의 베오그라드 방문과 더불어 그가 했던 1956년의 2월 연설은 동유럽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모스크바가 스탈린의 오류와 범죄를 인정한 것은 체제 개혁을 위한 요구를 허락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동시에 폴란드와 헝가리에서 변혁을 요구하는 시위가 격렬하게 터져나왔다. 폴란드에선 1956년 6월 하순경에 노동자들이 포즈난 시의 거리로 쏟아져.. 2023. 4. 17.
[러시아사] - 스탈린 사후 소비에트의 대외관계와 냉전: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창설 [러시아사] - 스탈린 사후 소비에트의 대외관계와 냉전: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창설 스탈리의 사망 이후 그의 후계자들이 소비에트를 맡으면서 대외정책은 훨씬 더 미묘하고 복잡해졌다. 스탈린 당시의 관점인 세계가 노동자의 적으로 가득 찼다고 보는 관점은 점차 “차이점의 연속체(a continuum of difference)"이라는 개념으로 대체되었다. 각 국가간의 사이의 이해관계와 입장이 폭넓게 다르다는 점을 인정할 뿐 아니라, 일부의 차이점은 소비에트 이익에 반하지 않으면 이를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어느정도 인정의 한계를 지녔지만, 소비에트 블록내에서 견해의 차이를 관용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는 자본주의와 소비에트가 공존할 수 있고, 전쟁 없이 이 차이점을 해결할 수 있다는 미래를 제시했다. 물론 .. 2023. 4. 15.
[러시아사] - 흐루쇼프의 실각과 새로운 통치자 브레즈네프 [러시아사] - 흐루쇼프의 실각과 새로운 통치자 브레즈네프 여러모로 짧았던 흐루쇼프의 통치기간은 오랜 혁명 정치사의 정점이었다 흐루쇼프는 국내외적으로 자신의 통치 방향을 ‘사회주의 사회 건설'로 잡았고, 그의 후계자들은 그와는 다른 정치적 방향성을 보여주었다. 흐루쇼프가 개혁과 변덕스러운 캠페인을 보여주었다면 후계자들은 혁명이 아닌 질서를 바라며 통치했다. 1964년 새롭게 구성된 소비에트의 집단지도부는 브레즈네즈를 필두로 구성되었으며, 1917년 이후 성년이 된 최초의 세대였다. 이들은 혁명 당시에는 어린아이였고, 대부분 기술교육을 받았다. 모든 지도자들은 대숙청을 통해 당의 고위직으로 진입했고 빠르게 승진했다. 대체적으로 그들은 안정된 권력과 효율적인 경제 발전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실용적인 인물들이.. 2023.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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