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분류 전체보기293

[일본사] - 쇼토쿠 태자와 다이카 개신, 聖徳太子 쇼토쿠 태자와 일본의 개혁쇼토쿠 태자(聖徳太子, 574–622)는 일본 아스카 시대(飛鳥時代)의 대표적인 정치가이자 사상가로, 일본 고대 국가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일본 내 불교와 유교의 발전을 촉진했으며, 일본 정치 체제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됩니다.쇼토쿠 태자의 생애와 업적쇼토쿠 태자는 일본 천황가의 일원으로, 제33대 스이코 천황(推古天皇)의 섭정을 맡으며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했습니다. 그는 중국의 선진 문화를 적극적으로 도입해 일본을 중앙집권적 체제로 개혁하고자 했습니다.불교의 장려와 종교적 개혁:쇼토쿠 태자는 불교를 국가 차원의 종교로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사찰 건설을 장려하고, 스스로 불교 신앙을 실천하며 불교의 가르침을 정치와 연결하려 했습니다... 2025. 1. 16.
[일본사] - 야마토 정권과 고훈시대 야마토 정권과 고훈시대 3세기 말부터 일본 열도 곳곳에는 거대한 무덤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고분'(古墳, こふん)이 세워지기 시작한 이 시대를 고훈시대라고 부른다.고분은 많은 노동력을 요하기에 민중을 동원해야했다. 이는 민중에 대한 지배층의 절대적인 권력을 보여준다. 이러한 고분은 시신을 안치하기 위한 석실이 존재했으며, 해자를 두르기도 했다.고분시대는 4세기와 5세기까지 이어졌으며 일본의 고대국가가 형성되는 시기와 일치한다. 이때 현재의 나라, 교토, 오사카 지방에서 확립된 정권이 현대 일본인들이 정신적 시조로 여기는 야마토 정권이다. 일본의 4-5세기는 명확한 기록이 남지 않아 다양한 학설이 존재하지만, 거대 고분이 다수 건설된 야마토 정권을 중심으로 일본의 고대 통일 정권이 확립되었으리라 추측한다... 2025. 1. 15.
[일본사] - 고대 일본 소국의 형성과 통합: 히미코 여왕의 야마타이국 고대 일본 소국의 형성과 통합: 히미코 여왕의 야마타이국야요이 시대에 접어들면서 일본열도에는 벼농사가 보급되었다. 농업의 강력한 부양력을 바탕으로 집단이 대형화되고, 금속기의 사용으로 무력집단이 탄생하면서 집단 내부에서, 집단과 집단에서 투쟁과 병합이 반복되었다. 결국 이러한 과정을 통해 집단은 소국을 칭하게 되었고 그 정점에서 정치적 지배자 왕이 탄생하였다. 다만 이 당시의 지도자는 현재의 군 단위의 영토만을 영위하는 촌락 공동체의 지도자 수준이었다. 그렇기에 이러한 국가를 고대국가와 구분하여 ‘소국’이라고 칭한다. 이 시대에 소국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많이 없으나, 사서에 남은 소국이 있다. 2세기 말 존속했던 야마타이국이다. 야마타이국은 히미코라는 여왕이 다스린 것으로 전해진다. 중국사서 에 그 .. 2025. 1. 14.
[일본사] - 도래인과 야요이 시대의 서막 대륙에서 건너온 사람과 문명도래인과 야요이 시대 기원전 300년 경, 한반도를 통해 일본 열도로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농사를 짓고, 금속제 도구를 사용하는 무리로 규슈 북부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내 일본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이들로 인해 농사와 금속도구 사용을 특징으로 하는 야요이 시대가 시작되었다.  야요이인은 빠르게 일본 전역으로 퍼져 약 400년만에 혼슈까지 나아갔다. 이 시대를 이들이 사용한 토기가 발견된 곳의 이름을 따 야요이 시대라고 부른다. 야요이 시대는 기원전 300년부터 기원후 3세기까지 약 600년의 시간을 가르키며, 이때를 기점으로 일본은 본격적인 농경사회로 발전하게된다. 농경 사회가 나타난 야요이 시대의 큰 특징은 벼농사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벼농사는 고도의 농사.. 2025. 1. 13.
[일본사] - 조몬 시대: 일본 신석기 시대의 시작과 문화 일본 열도의 신석기 시대, 조몬시대 기원전 1만년 경 빙하기가 끝나면서 인류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기후가 따뜻해지며 자연환경이 좀더 살기 좋게 바뀌었다. 온난한 기후와 우거진 숲은 인간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빙하가 녹았기 때문에 바닷물이 차오르면서 육지와 연결되었던 일본은 어느새 섬이 되어 대륙과 연결이 끊어졌다. 혼슈, 시코쿠, 큐슈, 홋카이도로 나뉘어졌다. 이때부터 현대 일본인과 연관성 있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토기를 사용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고, 약 1만년 전부터 기원전 3세기까지 긴 시간대에서 활동했다. 이들이 사용한 토기 표면에 새끼줄처럼 보이는 문양을 넣었는데, 그래서 이를 조몬토기라고 불렀다. 토기의 이름을 따서 시대 또한 조몬 시대라 이름 붙였.. 2025. 1. 12.
[일본사] - 일본 구석기 시대와 후지무라 사건 일본열도에 등장한 인류, 열도의 구석기 시대 일본사에서의 구석기 시대는 인류가 일본 열도로 들어선 순간부터 신석기 조몬 문화가 나타나는 순간까지를 지칭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1만 6500년 전 정도로 여겨진다. 구석기의 일본지역은 대륙과 연결되어 있었다. 해수면의 높이가 지금과는 달랐기에 지금의 경상도에 해당하는 부분과 규슈가 맞닿아 있었다.  지금의 동해는 바다와 분리된 호수 형태를 띄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오랫동안 구석기 유적이 발견되지 않아 구석기 시대에 인류가 살지 않았다고 생각해왔으나, 1949년 이와주쿠에서 구석기 유적이 발견되면서, 일본에도 구석기부터 사람이 살았음이 입증되었다.  그러나 구석기 시대 일본에 살았던 인류가 현재 일본인의 조상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우선 구석기를 살았던 인류.. 2025. 1. 11.
[중국사] -중국 민주화 요구의 물결과 천안문 [중국사] -중국 민주화 요구의 물결과 천안문 모든 권력은 인민의 것이다. 인민은 잊지 않는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1989년 6월 4일, 넓은 광장에 수많은 시민이 모여 자유를 외치고 있습니다.그리고 곧 수많은 전차가 밀려들어 이 학생과 시민들을 밀어버립니다.도대체 무슨일이 있었던 걸까요. 문화대혁명의 실패 이후 집권한 덩샤오핑은 개혁개방 정책을 주도하며 세계에 중국의 문호를 열고 경제 교류를 시행합니다. 이로인해 지식인과 대중을 중심으로 서구세계와의 접촉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으며, 자유와 민주화를 향한 이들의 열망 또한 커져갔습니다.  그러던 중 1989년 4월, 중국 공산당에서 민주화의 상징격인 인물인 후야오방이 사망하면서, 그를 추모하는 인원들이 베이징 천안문으로 몰려들기 시작했죠. 후야오방의 .. 2024. 10. 20.
[중국사] - 중국 현대사의 상처, 마오의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 [중국사] - 중국 현대사의 상처, 마오의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 중국은 1958년부터 국가경제건설 2차 5개년 계획을 실시했다. 공업부분에서는 철강을 중심으로 발전계획을 구상하고, 농업에서는 곡물의 생산량을 늘리는 쪽으로 목표를 잡았다. 당시 우방국 소련은 인공위성을 발사하는 등의 국제적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이에 자극받은 모택동은 15년 이내로 철강생산량에서 영국을 따라잡겠다는 캐치프레이를 내걸고 생산부분의 대약진운동을 펼쳤다. 대약진운동은 마오쩌둥의 주도로 진행된 농공업 증산 정책이었다. 중국은 당시 농업국으로 국가 발전의 유일한 수단은 오직 농업뿐이었다. 농업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한정된 농지에서 곡물을 빽빽히 심고 땅을 깊게 파는 밀식과 심경을 이용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오히려 생산량을 감.. 2024. 10. 18.
[중국사] - 대륙통일과 독재의 시작,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중국사] - 대륙통일과 독재의 시작,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1949년 10월 1일,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되었다. 중국은 인민공화국 설립에 앞서 새로운 중국의 정치제도를 준비하였다. 이들이 구상한 새로운 중국은 노동자와 중국공산당의 지도 아래, 국민당에 대한 독재를 취하는 인민민주주의독재국가 였다. 건국 이후 공산당의 급선무는 외교관계를 통해 소련과 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1949년 12월 중국을 출발한 모택동이 3개월간이나 소련에 머물면서, 우호조약을 체결한 사실은 중국의 다급함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당시 오직 소련만이 중국공산당의 중국을 인정한 상황이었고, 별다른 우방이 없던 중국으로서는 소련의 인정과 관계설정이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당시 냉전이 본격화 되던 시기였기에, 소련 역시.. 2024. 10. 17.
[중국사] - 대륙을 건 전쟁, 국공내전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설립 [중국사] - 대륙을 건 전쟁, 국공내전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설립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면서 중국에서의 전쟁도 종료되었다. 중국은 일본을 상대로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그러나 그 승리는 중국인 2000만명이 죽고, 5000억 달러 이상의 손해를 입은 상처뿐인 승리였다. 국민들은 경제회복과 새로운 국가건설이 염원이었지만, 국민당과 공산당의 패권다툼이 남아있었다.  진격하는 일본군을 피해서 중경으로 천도했던 국민당 정부는 부패로 인해 악명을 떨쳤다. 게다가 일본군이 점령했다가 국민당 정부로 복귀한 도시들에서는 일대 혼란이 연일 이어졌다. 국민당군은 놀랍게도 수복한 도시들을 약탈하고 자원을 압수를 했다. 이로 인해 도시의 경제는 붕괴되어갔다. 마치 점령군같이 행동하는 국민당군에 대해서 중국의 도시민에게서 .. 2024. 10. 16.
[중국사] - 일제의 침략, 만주사변과 2차 국공합작 [중국사] - 일제의 침략, 만주사변과 2차 국공합작  일본은 러일전쟁 승리 이후로 남만주와 동북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1928년 남경국민정부가 성립하고 세계대공황이 닥쳐오자 일본은 만주와 몽골에서의 이권확보를 국가의 생존에 관련된 사항으로 인식하고, 중국 동북지역을 무력으로 점령하려 하였다. 1931년 9월 만철노선 폭파사건을 빌미로 관동군은 동북지역을 침략하기 시작했고, 5개월만에 점령하였다. 일본의 만주침략은 관동군의 독단적 행동과 그에 대한 일본 정부의 묵인으로 시작되었다. 결국 그렇게 15년에  걸쳐 일본의 대륙침략전쟁이 시작되었다.남경정부는 일본의 불법척 침략을 규탄해줄 국제연맹의 외교적 해결을 기다렸다. 그러나 국제연맹은 실질적 구속력이 없었고, 남경정부 역시 일본군에 완강히 .. 2024. 10. 15.
[중국사] - 중국의 붉은물결 공산당과 홍군, 공산당 대장정 [중국사] - 중국의 붉은물결 공산당과 홍군, 공산당 대장정1917년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인 러시아 혁명 이후 중국에서도 꾸준히 공산당이 성장하였다. 이들은 도시의 중산계급을 통해 혁명을 이루려 했지만 계속해서 실패했으며, 러시아와 같은 혁명의 성공을 위하여 계속 투쟁하였다. 그러던 중 항일을 목적으로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첫번째 합작인 1차 국공합작이 성립하였다. 일본에 대항하기 위한 국공합작이 성립하면서, 공산당원이 국민당에 개인자격으로 입당하였다. 국민당은 당의 체질개선, 공산당은 공산주의 저변확대를 노렸으나 1927년 장제스의 지시로 이루어진 상하이 쿠테타에 의해 국공합작은 붕괴했다. 상하이 쿠테타로 중국공산당은 타격을 입고 국민당과 결별하여 결국 국공내전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국공합작의.. 2024. 10. 14.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