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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사] - 1930년대 소비에트 연방의 외교정책과 파시스트 - 제 2차 세계대전의 서막 [러시아사] - 1930년대 소비에트 연방의 외교정책과 파시스트 - 제 2차 세계대전의 서막 1920년대 소비에트 연방의 국제적인 승인과 외교관계의 안정을 위해 노력했던 치체린 덕분에 소비에트는 1930년대 국제 무대에서 활약할 수 있었다. 스탈린과 정치국은 이러한 안정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접근을 시도했다. 1930년부터 1939년까지 외무 인민위원으로 근무했던 리트비노프는 열강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맺는 것을 목표로 활동했다. 소비에트는 국제 연맹에 가입했고 군비축소와 집단 안보를 강조했다. 소비에트 연방은 국제적 인정 속에서 외교관계를 수립해 나아갔다. 폴란드, 루마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리투아니, 터키 등 비교적 가까운 지역의 국가들과 일찍이 1929년 리트비노프 의정서를 만들면서 국제적 인정.. 2023. 1. 7.
[한국사] - 통일신라의 전성기와 쇠락, 호족과 후삼국시대의 시작 [한국사] - 통일신라의 전성기와 쇠락, 호족과 후삼국시대의 시작 진흥왕 이후 국력을 키워 29대 무열왕 대에 삼한일통을 이뤄낸 신라는 8세기 중엽 경덕왕 대까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평화와 번영, 안정을 누렸다. 그러나 8세기가 지나면서 천천히 국가의 기강이 무너지고 이른바 "신라 하대"로 부르는 시기로 진입했다. 경주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에서는 귀족간의 권력 쟁탈이 일어나 분열하기 시작했으며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성장하여 새로운 형태로 영지화 하여 주민에 대한 직접 지배를 시작했다. 신라 하대의 사회는 통일을 이룩한 태종 무열왕의 직계 자손들이 왕권을 강력하게 휘두르던 절대왕권이 무너지고 난 상태였으므로 이후 신라의 37대 왕인 선덕왕이 죽으면서 왕위 계승을 두고 다시 분쟁이 일었다. 36대 왕인 혜.. 2023. 1. 6.
[중앙아시아사] - 유목민족사 역사 연표 (*23년 1월) BC 3500, 유목민의 등장과 말 BC 7C, 역사상 첫 유목민: 스키타이 BC 4C, 호(胡)와 흉노의 등장, 만리장성의 축조 BC 129, 흉노 제국과 한 제국의 전쟁 BC 126, 중앙아시아와 한나라, 타림분지의 국가들 BC 52, 흉노와 한의 관계변화, 호한야 선우와 왕소군 AD 48, 흉노의 2차 분열과 일축왕, 남흉노의 등장 AD 89, 북흉노의 서천, 그리고 흉노제국의 멸망 AD 1C, 유목민족 오환의 등장 AD 4C, 한인 왕조의 혼란과 몰락, 유목민족의 중원 이주 AD 4C, 중앙아시아의 새로운 패자, 유연의 등장 AD 6C, 돌궐 제국의 성장과 분열 AD 6C, 당나라와 돌궐제국, 돌궐의 서방정책 AD 657, 돌궐의 멸망과 새로운 돌궐 제국, 돌궐 2제국의 부흥(679 - 744) .. 2023. 1. 5.
[러시아사] - 소비에트 연방의 스탈린체제와 공포정치, 피의 대숙청 [러시아사] - 소비에트 연방의 스탈린체제와 공포정치, 피의 대숙청 스탈린이 정권을 장악한 1928년 이후 그는 정권 유지를 위한 대숙청을 단행했다. 이 대숙청은 당과 정부 그리고 국가에 대한 스탈린의 영향력과 권력을 보장해주는 도구였다. 스탈린의 사람이 아닌 1917년 이전의 볼셰비키파는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 몰로토프 같은 스탈린의 직속 부하 몇명을 제외하면 이름이 알려진 볼셰비키 지도자는 몇명 남지도 못했다. 이 대숙청에서 살아남은 사람이라고는 권력을 잃고 결국에는 피살당한 트로츠키 외에는 스탈린 자신뿐이었다. 소비에트 연방에는 스탈린의 절대적 개인독재가 시작되었다. 숙청의 기간은 길게보면 스탈린 집권 전체 시기에 해당하지만, 좁은 범위로 한정한다면 대숙청은 1937년부터 1년간 시행된 숙청.. 2023. 1. 4.
[러시아사] - 소비에트 연방의 1920년대 외교정책과 치체린 [러시아사] - 소비에트 연방의 1920년대 외교정책과 치체린 볼셰비키는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실현시킬 현실을 원했지만 그들이 차르정부로부터 물려받은 국제적 지위와 러시아의 국가적 이해관계는 그 이상과는 거리가 있었다. 소비에트는 제정 러시아가 맺은 조약과 채무를 거부하고 비밀 외교문서를 출판하는 등 과거 차르정부와의 단절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완전한 단절은 이루지 못하고 소련의 외교정택은 전통적, 민족주의적, 제국적 팽창이라는 방향성을 띄었다. 1920년대 소비에트의 외교정책은 치체린이 사실상 담당했다. 그는 1918년 트로츠키가 전쟁인민위원이 되었을 때, 그의 보좌관으로 근무했으며 곧 외무 인민위원이 되었다. 치체린은 그 직책에서 1930년까지 근무했다. 그는 볼셰비키가 아닌 맨세비키에다가 귀족출.. 2023. 1. 3.
[한국사] - 발해의 건국과 남북국시대의 시작 [한국사] - 발해의 건국과 남북국시대의 시작 나당동맹을 맺은 당과 신라의 공격으로 668년 고구려는 멸망의 길을 걷는다. 이후 나라를 잃은 유민들은 각지로 흩어졌다. 자신의 부족에 속해있던 이들은 각자도생의 길로 들어섰고, 676년 이후 고구려의 옛 지역은 몇 부분으로 나뉘면서 고구려의 옛 영토는 이리저리 찢겨졌다. 대동강 이남 지역은 나당 전쟁 이후 신라가 확보하였다. 당과 인접한 북쪽 요동지역은 당에 귀속되었다. 그 밖에 만주 중부와 동부와 한반도 북부 지역은 영역상 당에 속하긴 했지만 거리가 멀고 관리가 어려운 탓에 상대적으로 당나라의 간섭이 덜했다. 이 만주 지역에서 말갈족이 당의 억압적인 통치에 반발하여 봉기하였다. 이들이 봉기하면서 요서지역에서 당의 권위는 크게 위협받기 시작했고, 그때를 틈.. 2023. 1. 1.
[러시아사] - 스탈린의 경제정책 - 제 2차, 제 3차 5개년 계획과 역사의 평가 [러시아사] - 스탈린의 경제정책 - 제 2차, 제 3차 5개년 계획과 역사의 평가 제 1차 5개년 경제계획의 성공이라는 자평에 말미암아 다음 계획들도 진행되었다. 1933년부터 1937년 까지 지속된 제 2차 5개년 계획과 독일의 공격으로 1941년 중단된 제 3차 5개년 계획은 1차때의 목표와 방법을 반복하는 계획이었다. 농업집단화를 이뤘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국가의 인력과 자원을 최대로 동원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소비에트 연방의 국민들은 경제계획이 진행되는 8년동안 전시상황과 같은 삶을 살아야했다. 그 대가로 그들은 2차, 3차 성공이라는 연방정부의 발표를 들을 수 있었다. 제 2차 5개년 계획은 1차 계획보다 전문적으로 계획되어 생산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복잡한 공작기계나 정.. 2022. 12. 31.
[러시아사] - 소비에트 러시아와 스탈린의 시대, 1932년 우크라이나 기근(홀로도모르) 사태 [러시아사] - 소비에트 러시아와 스탈린의 시대, 1932년 우크라이나 기근 사태 스탈린의 소비에트 통치는 1927년 제 15차 당대회부터 시작하여 약 25년간 지속되었다. 스탈린 시대는 엄청난 변화와 고통의 시기이기도 했으며, 대규모 강제적인 산업화가 있었고, 농업의 급작스러운 산업화가 있었다. 많은 인민은 스탈린 시대를 공포의 시대로 기억하며 스탈린의 적들은 숙청되고 처형당했다. 러시아사에 한 획을 그은 스탈린은 사실 출신성분이 훌륭하지 않았다. 1879년 그루지야의 신발 제조공의 아들로 태어난 이오시프 주가시빌리는 신학교를 다니다가 퇴학당한 뒤 사회민주당에 가입했다. 1903년에는 볼셰비키가 되었고, 몇차례의 체포와 유배형을 당했다. 그루지야의 볼셰비크가 레닌의 관심을 끈것은 그가 당의 자금 마련을.. 2022. 12. 30.
[한국사] - 삼국 통일전쟁과 신라, 나당전쟁의 승리와 통일신라 [한국사] - 삼국 통일전쟁과 신라, 나당전쟁의 승리와 삼국통일 6세기에 들어오면서 고구려, 신라, 백제 3국간의 전쟁은 계속되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7세기에 접어들면서 전쟁상황이 급박하게 전개되었다. 642년에 새로이 즉위한 백제의 의자왕은 신라를 공격하여 국경의 성 40여 곳과 대성인 대야성까지 함락시켰다. 또한 주변의 작은 성들을 함락하여 고구려와 신라의 지속적인 압박에 쇠퇴해가던 백제의 전성기를 찾는듯 했다. 이에 신라의 김춘추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고구려의 평양성에 방문하여 대막리지 연개소문을 알현하였다. 신라는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서 고구려와 일시적인 동맹을 맺고자 하였는데, 고구려가 동맹의 대가로 한강유역을 요구하자 협상은 결렬되었다. 고구려와의 동맹 실패로 고구려 남부전선에서 신.. 2022. 12. 29.
[러시아사] - 레닌 사후 소비에트 러시아의 권력투쟁, 스탈린의 등장과 경제 5개년 계획 [러시아사] - 레닌 사후 소비에트 러시아의 권력투쟁, 스탈린의 등장과 경제 5개년 계획 소비에트가 설립된 1920년대에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는 두가지 관점이 있었다. 첫번째 관점은 트로츠키를 중심으로 하는 좌파적 입장이다. 이들은 당과 국가의 적극적인 리더쉽을 통해 타 유럽국가에 비해서 후진적인 러시아를 빠른시일내에 선진화 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좌파는 사회주의 권력이 농민대중에게 압도당하지 않으려면 급속한 산업화를 달성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적극적인 경제입안과 투자를 위해서 자본축적을 요구했는데, 이를 통해 임금과 가격인상을 국가에서 조절 할 수 있고, 이로써 농민과 민간부분을 통제할 수 있다고 했다. 그들은 중앙집권적인 권력을 원했고, 지방에서 당 비서를 임명하는 관행을 비판했다. 그리고 최대.. 2022. 12. 27.
[러시아사] - 적백내전의 승리와 신생 소비에트 러시아의 위기, 크론슈타트 반란과 신경제정책(NEP)의 시작 [러시아사] - 적백내전의 승리와 신생 소비에트 러시아의 위기, 크론슈타트 반란과 신경제정책(NEP)의 시작 볼셰비키가 적군으로 적백내전을 승리로 이끌어 전쟁을 종식했을때 소비에트 러시아는 폐허에 가까운 상태였다. 1920년과 1921년의 가뭄과 기근으로 국내외적 경제, 식량상황은 절망적이었다. 10월 혁명 이후 수년동안 전쟁, 처형, 기아, 경제의 붕괴로 인해서 2,000만명에 달하는 국민이 희생되었다. 거기에다 200만에 달하는 인원이 볼셰비키의 통치에 반대해서 러시아를 떠났는데, 여기에는 지식인과 기술자의 비율이 높았다. 볼셰비키가 실시했던 전시 공산주의는 러시아의 경제를 파탄내는데 한몫하기도 했다. 급박했던 정치상황속에서 정권을 연장하는 역할을 했지만, 동시에 근시안적 시각에 펼친 제도였기에 결국.. 2022. 12. 26.
[러시아사] - 1차 세계대전 이후 민족운동과 소비에트 연방의 성립, 우크라이나의 독립과 타 지역들 [러시아사] - 1차 세계대전 이후 민족운동과 소비에트 연방의 성립, 우크라이나의 독립과 타 지역들 제 1차 세계대전 동안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의 정치 형태는 크게 분열되었다. 전쟁을 통해 피폐해진 경제는 국민들의 정치성향을 급진적으로 만들었고, 연합국은 국민국가를 형성하라는 압박을 취했다. 결국 이 지역에서의 민족주의 운동은 자치권을 요구하는 것에서 독립을 하는 것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전제정이 종식된 이후 러시아 제국에 속했던 수많은 민족이 독립을 요구하고 나섰다. 1917년 핀란드,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벨라루스가 독립을 선언했다. 1918년에는 에스토니아, 우크라이나, 폴란드가 독립을 선언했다. 같은해 자캅카스 연방도 독립했다. 이들은 나중에 조지아, 아르메.. 2022. 12. 25.
[독립민수] - 안중근의 삶과 독립운동, 하얼빈 의거와 대한의군 참모중장이라 주장한 이유. 안중근은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로, 대한의 독립을 위하여 일생을 바친 독립운동가다. 1. 독립운동 투신 이전 안중근(安重根) 선생은 어릴적부터 골격이 튼튼하고, 사격에 능하여 무골로 불렸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황해도에 이주하여 거주하였는데, 안중근도 황해도에서 출생하여 활동하였다. 안태훈과 동학농민운동 당시의 일로 친분이 있던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안중근에 대해 총을 잘 쏘는 청년으로 묘사하였다. 당시 김구는 안중근보다 3살이 많았으며, 동학의 접주로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하였고, 안중근은 동학군에 반하는 자경단을 이끌어 박석골 전투 등에서 활약하였다. 일찍이 천주교에 영향으로 진남포에서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하는 등 교육사업에 투신하였으나, 1907년 8월 서울에서 대.. 2022. 12. 21.
[러시아사] - 소비에트 러시아 - 폴란드 전쟁과 리가 조약 [러시아사] - 소비에트 러시아와 폴란드 전쟁 1919년 2월부터 1921년 3월까지 1년여간 벌어진 소비에트 러시아와 폴란드의 전쟁은 서로간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며 벌어진 참극이었다. 폴란드의 지도자 피우수트스키는 발트지역에서부터 벨라루스를 거쳐 우크라이나에 이르는 독립국가를 폴란드와 연합시켜서 연방국가를 창설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는 폴란드 - 리투아니아 연방과 같은 국가를 다시 만들려는 시도로 보인다. 이에 소비에트 러시아는 이 전쟁을 통해서 공산주의 혁명이 서쪽에서 일어나게 되길 원했다. 러시아가 그러했던 것처럼 전쟁을 틈 타 적들의 내부에서, 특히 독일에서 혁명이 일어나길 원했던 것이다. 1920년 무렵 러시아 적백내전에서 적군이 승기를 잡자 공산당 지도부는 폴란드가 서쪽이 공산화되는 시작점으로.. 2022. 12. 19.
[독립민수] - 건국훈장과 독립운동가들 HTML 삽입 미리보기할 수 없는 소스 [독립민수] - 건국훈장과 독립운동가들 훈격 설명 3.1절이나 광복절에 독립유공자들에게 표창을 주는 장면 한번쯤 보셨을 겁니다. 여기서 언급되는 애국장? 애족장?이 무엇인지 알고 계신가요? 오늘은 독립유공자들께서 서훈받는 건국훈장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서훈을 주는 이유 3.1절과 광복절에 시상되는 훈장을 건국훈장이라고 합니다. 사실 건국훈장은 독립운동가만 받는 것은 아닌데요. 건국훈장은 대한민국의 건국에 공로가 뚜렷하거나, 국가의 기초를 공고히 하는 데에 이바지한 공적이 뚜렷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훈장입니다. 등급에 따라 5가지 훈격을 나누고 공로에 따라 1949년부터 시상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장, 대통령장, 독립장, 애국장, 애족장으로 나누어지는데 .. 2022. 12. 18.
[독립민수] - 독립군들이 대한의 독립을 위해 사용한 무기:소총 HTML 삽입 미리보기할 수 없는 소스 오늘은 독립군 이야기로 돌아왔습니다. 독립군들은 대한의 독립을 꿈꾸면서 만주와 간도에서 무기를 들고 젊음을 불태우셨죠. 독립군들은 다양한 종류의 소총을 사용했습니다. 국가와 같은 중앙 군수물자 공급체계가 없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겠죠. 그래서 독립군은 각 단체마다 다른 다양한 루트를 통해서 소총을 입수했고 사용했습니다. 독립군들이 사용한 소총을 알아보겠습니다. 러시아제 모신-나강 소총 독립운동가들이 사용한 소총들 중 상당수의 소총은 모신나강 소총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모신나강은 러시아의 총기제작자 모신과 벨기에 총기제작자 나강의 이름을 딴 소총입니다. 러시아 제국이 1891년 육군 제식 총기로 채택한 볼트액션 소총입니다. 러시아 제국은 1905년 러일전쟁과 세계 .. 2022. 12. 17.
[러시아사] - 소비에트 러시아의 적백내전 승리 [러시아사] - 소비에트 러시아의 적백내전 승리 1918년 여름에 처음 발발한 러시아의 적백내전은 처음에는 백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6월 말 무렵 사마라 정부의 백군은 심비르스크, 카잔, 우파를 장악했다. 적군은 반격하려했으나 체코의 지원을 받는 콜차크의 백군, 데니킨의 백군과 먼저 싸워야만 했다. 시베리아에서 진격하던 콜차크 부대는 우랄의 페름을 차지하고 볼가 강 목전에 도달했다. 이 무렵 예카테린부르크의 볼세비키는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7월 16일 니콜라스 2세와 황후, 그들의 자식들을 살해한다. 레닌의 비밀명령이라고 추정되는 이 사건으로 백군은 일련의 목표를 잃었다. 하지만 백군은 계속해서 공격해들어왔다. 1919년 봄에 데니킨의 부대는 우크라이나 전역을 점령했고, 모스크바로 진격해왔다. .. 2022. 12. 16.
[러시아사] - 소비에트 러시아의 통치와 적백내전의 시작 [러시아사] - 소비에트 러시아의 통치와 적백내전의 시작 볼셰비키들이 무력을 사용해 정권을 찬탈한데에 대해 러시아 내에서 수많은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동시에 경제는 대혼란 상태에 접어들게 된다. 1918년 여름 무렵 볼셰비키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이른바 ‘전시공산주의’(戰時共産主義, 러시아어: Военный коммунизм, Voennyi kommunizm)라고 부르는 급진적 동원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한다. 러시아는 1918년 여름부터 전면적인 내전에 돌입한다. 소위 백군이라고 불리우는 군인들은 초기에는 러시아에 굴복한 소비에트 정부에 대항하여 일어났고, 적군의 러시아 통치에 도전했다. 동시에 수많은 소수민족들은 러시아로부터 자신들의 독립을 주장하며 궐기했다. 러시아의 수많은 적들은 그들의 봉.. 2022. 12. 15.
[한국사] - 고구려 당나라 전쟁과 안시성 / 고당전쟁 / 수당전쟁 [한국사] - 고구려 당나라 전쟁과 안시성 / 고당전쟁 / 수당전쟁 고구려 정벌에 나라의 국운을 걸었던 수나라가 멸망하고 그 뒤를 이어서 당나라가 중원의 패자 등장했다. 당은 고조 이연이 618년 건국하였고, 그 이후 잠시동안 혼란해진 정국을 다스리고 내치에 신경을 쓰느라 동아시아에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고구려 역시 수와의 전쟁으로 소모한 막대한 국력을 회복하기 위해 당과의 친선관계에 돌입했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하다가 망한 걸 직접 목도한 당 역시 고구려를 무조건 적대시 한다는 것은 망국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당 태종이 즉위하면서 상황은 급변하였다. 당 내부에서 일어난 군사적인 움직임을 모두 평정한 당태종은 북에서 호시탐탐 중국을 노리는 동돌궐까지 복속시켰다. 또한 서.. 2022. 12. 14.
[러시아사] - 10월혁명과 소비에트 러시아의 등장 그리고 레닌과 ‘전시 공산주의' [러시아사] - 10월혁명과 소비에트 러시아의 등장 그리고 레닌과 ‘전시 공산주의' 볼셰비키는 2월 혁명으로 세워진 임시정부의 무능을 딛고 1917년 11월 러시아의 권력을 손쉽게 획득한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수년에 걸친 내전과 투쟁을 딛고서야 그 권력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이들은 황폐화된 국가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이들은 ‘전시 공산주의'라는 극단적인 제도를 탄생시켰고 1917년부터 1921년까지 유지했다. 전시공산주의를 이끈 인물은 볼셰비키의 지도자 레닌이었다. 레닌은 10월 혁명 이후 당뿐아니라 정부도 이끌게 되었고, 소비에트 러시아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부상했다. 그는 1870년생으로 장학사 아버지를 둔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카잔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한 레닌은 일찍이 급진주의자가 되었고, .. 2022. 12. 10.
[러시아사] - 혁명의 나라 러시아, 두개의 혁명과 1917년 - 소비에트의 등장과 10월 볼셰비키 혁명, 레닌의 등장 혁명의 나라 러시아, 두개의 혁명과 1917년 - 소비에트의 등장과 10월 볼셰비키 혁명, 레닌의 등장 1917년 2월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사회주의자들은 착실하게 자신의 지지기반을 넓혀나갔다. 사회주의자들은 소비에트를 조직했고, 3월 1일에 사병의 권한과 권리에 관한 헌장을 발표하여 사병들에 대한 지지를 넓혔다. 이 헌장에 따르면 병사들은 대표를 선출해 구성되는 병사위원회를 설치하여 결국 소비에트는 군사 행동을 통제하는 최종권한도 가질 수 있었다. 또한 군대의 무기, 차량, 물자들은 장교의 통제에서 벗어나 병사 위원회의 권한에 들어오게 되었고, 사병들은 근무중이 아니면 장교에게 경례할 의무가 사라지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가 상트페테르부르크(페트로그라드)에서 일어나자 러시아 전역에서 이러한 소비에트가.. 2022. 12. 9.
[한국사] - 고구려와 수나라 전쟁, 수의 멸망 / 고수전쟁 / 수당전쟁 [한국사] - 고구려와 수나라 전쟁, 수의 멸망 / 고수전쟁 / 수당전쟁 신라가 백제를 배신하고 한강유역을 차지하면서 한반도 남쪽에서는 고구려, 신라, 백제의 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그 사이 중국에서는 불열되어 있던 5호 16국의 시대가 끝나고 유목민의 후손인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였다. 수나라는 589년에 전국을 통일하고 군사력을 이용하여 대외적으로 팽창하기 시작하였다. 수나라는 고비사막 이북에서 중원을 향해 압박하던 돌궐을 여러차례 정벌하고 이간책까지 사용하여 돌궐을 동돌궐과 서돌궐로 분리시켜 약화시켰다. 강성하던 돌궐의 세력이 분열되며 약해지자 수나라는 이번에는 기수를 돌려 북쪽이 아닌 동쪽의 국가 고구려를 약화시키려 하였다. 중원을 차지한 패자가 중원 근처 거대세력을 정복하는 일은 매우 당연한.. 2022. 12. 8.
[러시아사] - 혁명의 나라 러시아, 두개의 혁명과 1917년 - 2월혁명과 로마노프 가문의 통치 종식 [러시아사] - 혁명의 나라 러시아, 두개의 혁명과 1917년 - 2월혁명과 로마노프 가문의 통치 종식 갑작스러운 대중 혁명으로 인해 제국정부는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소멸되었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혁명으로 인해 수도인 상트페테부르크(페트로그라드)는 폭동과 시위로 인해서 혼란에 휩싸였다. 수도는 식량 부족사태에 항의하는 노동자들과 늘어가는 파업자수로 인해서 인산인해였고, 파업과 시위현장에서 노동자를 탄압하기 위해 파견된 군병력은 오히려 대중들에게 동조하면서 사태는 심각해졌다. 수도에는 더 이상 예비병력이 없었다. 당시 니콜라이 2세는 전선에 가있었기에 다른 지역에서 군대를 동원하여 수도로 진격시키지 못했고, 결국 수도에서 제국정부의 권위는 쉽게 무너졌다. 많은 제국의 관리들은 몸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1.. 2022. 12. 5.
[러시아사] - 제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라스푸틴과 1917 러시아 혁명 [러시아사] - 제 1차세계대전과 러시아, 라스푸틴과 1917 러시아 혁명 제1차 세계대전은 장기적으로 벌어진 최초의 군사충돌로, 유럽의 사회 경제뿐 아니라 그간 축적된 기술과 기계화 된 군사력, 인력이 맞붙어 충돌한 전례없는 전쟁이었다. 전화의 소용돌이는 유럽대륙 곳곳으로 퍼져나갔고, 러시아는 물론 어느 국가도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폭력이 그들을 감싸나갔다. 전쟁이 발발한 직후 러시아 내부의 항의는 크게 나타나지 않았다. 대중의 적대감은 그들의 적인 외부를 향했다. 그러나 이러한 애국주의적, 민족적 단결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독일에 대한 적개심이 차르정부에대한 충성심으로 환원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이 전에 있었던 국민을 정부의 소모품으로 여기는 차르정부의 태도와 더 이상 이를 좌시하지 않는.. 2022. 12. 1.
[러시아사] - 니콜라이 2세 치하 러시아의 외교 (1905 -1914) [러시아사] - 니콜라이 2세 치하 러시아의 외교 (1905 -1914) 제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다른 유럽열강과 마찬가지로 러시아도 세계대전에 얽혀들어갔다. 차르정부는 1914년 여름 세르비아를 지원하기로 결정하면서 세계대전의 한 축이 되었다. 사실 러일전쟁에 러시아가 패배한 이후 독일과 러시아는 그다지 친밀한 관계가 아니었다. 게다가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는 사실상 단교에 가까운 상태였다. 그와 동시에 러시아와 프랑스의 관계는 매우 돈독해진 상태였다. 여기에 영국과 러시아의 협상이 성립되었다. 1907년 8월 31일에 조인된 영국과 러시아의 합의는 러시아 외교정책에 있어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양국은 전통적으로 극단으로 치달았던 전력을 갖고있었으나 이 합의를 통해 상호 우호적인 상태를 유지시킬 .. 2022. 11. 30.
[러시아사] - 니콜라이 2세 치하 1905년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 입헌체제 [러시아사] - 니콜라이 2세 치하 1905년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 입헌체제 1905년 러시아에 있었던 혁명은 어쩌면 예견되어 있었던 사건일지도 모른다. 19세기를 마치고 20세기로 넘어가는 세기의 전환기에서부터 1차대전 직전까지 러시아는 위기이자 기회였던 시기이다. 러시아 사회는 입헌군주주의자, 공화주의자, 개혁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이 다양하게 혼재했고, 노동자들은 삶을 지속하기위해 시위와 파업을 진행했다. 러시아 내부는 통일되지 못했고 혼란스러웠으며 대외적으로는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배함에 따라 시국은 어지럽게 돌아갔다. 결국 러시아 정부는 이런 내부의 갈등과 외부의 위협을 보듬지 못하고 1905년 혁명을 맞이한다. 러시아 정부는 내부의 갈등을 억압적인 폭력으로 억누르려했고 이는 결국 혁명의 시발점이 되.. 2022. 11. 29.
[조선사] - 광해군의 즉위와 인조반정, 폐모살제의 뜻 [조선사] - 광해군의 즉위와 인조반정, 폐모살제의 뜻 광해군은 1575년 선조와 후궁 공빈 김씨의 사이에서 둘째 서자로 탄생하였다. 선비의 정비인 의인왕후가 슬하에 자녀가 없었고, 장남이자 동복형인 임해군이 있었지만 그는 포악한 성정으로 인해서 왕이 될 재목이 되지 못했다. 또한 인빈 김씨의 소생인 의안군, 신성군 모두 일찍 요절하여 광해군의 왕위 계승서열을 능가하는 사람은 없었다. 선조의 적자 영창대군이 있었으나 그는 나이가 어렸고, 당시 임진왜란이라는 특수상황에서 분조 활동까지 거치며 산전수전을 다 겪은 광해의 왕위계승을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임진왜란 발발 이후 선조는 파천과 동시에 평양에서 광해를 세자에 책봉하였다. 그리고 선조와 함께 의주로 피난하다가 영변에서 갈라졌다. 광해는 평안도, 강원도.. 2022. 11. 28.
[한국사] - 신라의 발전과 부흥, 진흥왕의 영토확장 [한국사] - 신라의 발전과 부흥, 진흥왕의 영토확장 신라는 삼국시대를 이루는 고구려, 백제보다 전성기가 늦었다. 한반도 남쪽에 위치한 탓에 중국과의 교류가 적었고, 삼국 중 가장 발전이 뒤떨어졌던 신라는 6세기에 접어들면서 발전의 기반을 다져나갔다. 6세기 초 무렵 지증왕 때에는 우경을 실시하며 농업생산이 크게 늘어났다. 농기구가 개량되고, 소를 농사에 사용하는 우경이 본격화 되면서 생산량이 증대되었고, 또한 귀족들의 무분별한 순장을 금지하면서 노동력의 무의미한 손실이 적어졌다. 또한 지증왕대에 국호 신라를 정식으로 사용하였으며 대군주를 뜻하던 마립간이라는 칭호 역시 중국식 칭호를 받아들여 왕(王)으로 바꾸었다. 지증왕이 고대국가 신라의 기틀을 세웠다면 그 다음 왕인 법흥왕은 국가 내적인 체제를 완비하.. 2022. 11. 26.
[한국사] - 사로국의 등장과 신라의 건국, 발전 [한국사] - 사로국의 등장과 신라의 건국, 발전 사로국은 훗날 삼국중 하나로 발전하는 신라의 옛 이름으로 한반도 동남부에 위치한 경주 평야를 중심으로 발전한 진한의 소국 12국중 하나이다. 신라는 석, 박, 김 3성의 시조설화에서 나타나듯이 여러 세력 집단이 연합해 건국한 국가이다. 신라의 건국 설화에 따르면 사로국에 살던 6촌의 우두머리들이 하늘에서 내려 온 박혁거세를 왕으로 받들어 건국한 나라라고 한다. 여기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마와 난생설화가 추가된다. 이 사항은 신라는 박혁거세라는 외부의 세력이 기존 토착세력인 사로국 6촌과 함께 연합하여 건국한 나라라는 사실을 알게해준다. 신라에 이주한 외부세력인 이주민들은 철제 도구를 다를 줄 알았고, 이들이 가진 문화는 토착세력에 큰 영향을 주었고 지배 .. 2022. 11. 26.
[한국사] - 백제의 천도와 쇠락, 웅진시대와 사비시대 백제는 국가의 정비가 대략적으로 마무리되는 4세기에 백제는 관등제를 확충하고, 왕위계승도 부자상속으로 바꾸어 위계를 공고히 했다. 그러나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4세기 후반, 5세기 초반에 확충된 군사력으로 남방정책을 추진하자 백제는 급속히 쇠락하였다. 그러다가 475년 지금의 위례성을 빼앗기고 웅진으로 도읍을 천도할 수 밖에 없었다. 백제의 웅진천도는 고구려의 한성점령에 의해 단시간에 이루어진 급작스러운 천도였다. 이러한 웅진천도의 배경에는 당시 개로왕대 백제에서는 무모한 권력행사로 백제 지도층 분열이 원인였다. 게다가 백제가 고구려와 북위를 둘러싸고 펼친 외교전에서 실패한 것이 주효했다. 백제의 개로왕은 472년 북위에 고구려를 공격할 원군을 요청하였는데 이러한 백제의 외교는 고구려를 자극하는 결과를 낳.. 2022.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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