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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 중국사 최초의 국가 상나라와 청동기 문명 [중국사] - 중국사 최초의 국가 상나라와 청동기 문명 상나라는 기원전 1600년 경 중국 역사상 최초의 왕조이다. 마지막 수도의 이름을 따서 은나라라고 불리기도 한다. 상나라 이전에 하나라가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아직 전설속의 국가로 다루어지기에 타임맵 중국사에서는 실제 존재했다고 확인되는 상나라부터 시작한다. 상나라가 존재했던 시기는 사실상의 상고시기로 그 존재가 신화적 존재이기에 실존을 의심받곤 했다. 그러나 다행히 여러 증거가 나타나면서 상나라가 존재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할 바가 없다. 19세기 말까지는 전설상의 왕조로 추측했으나 1899년 발견된 갑골문이 발견되며 상나라의 존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920년대 시작된 하남성 안양의 고고학 발굴을 통해 상의 마지막 수도인 은허의 궁전과 왕들.. 2024. 7. 3.
[중국사] -중국 민주화 요구의 물결과 천안문 모든 권력은 인민의 것이다.인민은 잊지 않는다.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1989년 6월 4일, 넓은 광장에 수많은 시민이 모여 자유를 외치고 있습니다.그리고 곧 수많은 전차가 밀려들어 이 학생과 시민들을 밀어버립니다.도대체 무슨일이 있었던 걸까요. 문화대혁명의 실패 이후 집권한 덩샤오핑은 개혁개방 정책을 주도하며 세계에 중국의 문호를 열고 경제 교류를 시행합니다. 이로인해 지식인과 대중을 중심으로 서구세계와의 접촉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으며, 자유와 민주화를 향한 이들의 열망 또한 커져갔습니다.  그러던 중 1989년 4월, 중국 공산당에서 민주화의 상징격인 인물인 후야오방이 사망하면서, 그를 추모하는 인원들이 베이징 천안문으로 몰려들기 시작했죠. 후야오방의 죽음에 수많은 중국 대학생들은 화환을 바치며 천안문.. 2024. 6. 23.
[러시아사] - 키예프 루시의 전성기를 이끈 블라디미르와 야로슬라프, Ярослав Владимирович Мудрый 키예프 루시의 전성기를 이끈 블라디미르와 야로슬라프 키예프의 4대 대공 스뱌토슬라프가 원정 도중 드네프르강 급류에서 페네체크족에 의해서 살해당하자 키예프에는 새로운 지도자가 필요했다. 스바토슬라프의 세 형제중 장자 야로폴크가 정권을 잡았으나 곧 막내인 블라디미르가 정권을 잡고 키예프를 통치했다. 980년경 부터 키예프를 통치하기 시작한 블라디미르는 전임자들과 같은 방향으로 키예프 루시를 이끌었다. 블라디미르는 1015년까지 키예프 루시를 통치하였는데 그 기간 동안 중요한 발전 몇 가지를 이루었다. 첫째로 블라디미르는 후계자 내전으로 혼란에 빠진 키예프 루시를 재정비하여 국내 질서를 바로잡았다. 이어서 키예프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동 슬라브족을 다시 굴복시켜 영향력 하에 넣었다. 또한 키예프 루시의 영토를.. 2023. 11. 27.
러시아사 연표 (2023.11.18. 제작) [러시아사] 서론 - 러시아 이전의 러시아에 대하여 [러시아사] - 러시아 이전의 러시아 - 선사시대와 이민족의 침입 [러시아사] - 하자르국 (하자르왕국) [러시아사]- 동슬라브족 (10세기 전후) [러시아사] - 키예프루시의 등장(10세기) [러시아사] - 키예프루시의 확립(10세기-스뱌토슬라프) [러시아사] - 키예프루시의 전성기와 블라디미르 [러시아사] - 키예프의 쇠퇴와 몰락 [러시아사] - 분령시기: 타타르의 멍에 [러시아사] - 분령시기 노브고로드공국 [러시아사] - 모스크바의 등장 [러시아사] - 이반 사후와 쿨리코보 전투 [러시아사] - 몽골의 반격과 러시아의 독립 [러시아사] - 이반 3세와 러시아의 통일 [러시아사] - 러시아 통합이후 대외정벌과 차르 [러시아사] - 이반 3세의 러시.. 2023. 11. 18.
[프랑스사] - 메테르니히와 구체제의 부활, 자유주의 프랑스 7월 혁명 [프랑스사] - 메테르니히와 구체제의 부활, 자유주의 프랑스 7월 혁명 메테르니히가 틀어 막으려했던 자유주의, 민족주의는 물과 같아서 개인의 노력으로 막아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가 독립을 달성하고 이듬해인 1830년 7월 파리에서는 자유주의 혁명이 발생하였다. 이를 7월 혁명이라고 한다. 프랑스에서 나폴레옹이 실각한 이후, 프랑스 왕실은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부르봉 왕실의 루이 18세는 입헌군주제를 규정한 1814년의 헌법을 선포했다. 이 헌법은 보수적이었으며, 유권자 수가 10만을 넘지 못하는 법이었다. 동시에 혁명이 끝나고 프랑스로 돌아온 귀족과 성직자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프랑스에는 구체제, 즉 앙시앵레즘이 부활하게 되었다. 이들은 혁명으로 잃은 특권과 재산을 되찾을하였고, 자신들의 정치.. 2023. 6. 3.
[유럽사] - 산업혁명에 대응한 사상의 발전: 유럽 각국의 노동운동 (영국, 프랑스, 독일) [유럽사] - 산업혁명에 대응한 사상의 발전: 유럽 각국의 노동운동 (영국, 프랑스, 독일) 산업혁명이 가장 먼저 일어난 영국은 아이러니하게도 1800년에 제정된 결사금지법에 의해 19세기 초까지 합법적 노동운동이 불가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계의 도입으로 노동자의 설 자리가 좁아지는 현실에 일부 노동자들은 1811년 부터 1816년까지 기계를 파괴하는 러다이트 운동을 벌였다. 여기에 추가적으로 악덕 고용주를 공격하는 방식으로 저항을 벌였다. 영국의 노동자들은 결사의 자유가 없었으므로 이들의 행동은 조직화되지 못하였고, 결국 영국 당국의 강한 탄압과 고용주들의 반격으로 결국 이 시기의 노동운동은 좌절되었다. 그러나 1824년 결사금지법이 폐지되면서 지하에 숨어있던 노동조합과 새롭게 결성되는 조합들의.. 2023. 5. 26.
[유럽사] - 산업혁명에 대응한 사상의 발전: 마르크스주의의 등장과 제 1, 2 인터내셔널 [유럽사] - 산업혁명에 대응한 사상의 발전: 마르크스주의의 등장과 제 1, 2 인터내셔널 1840년대 푸리에와 초기 사회주의자들은 공상적이고 평화로운 방법으로의 평등공동체 건설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의 칼 마르크스는 자신의 동료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함께 혁명 사회주의를 제시하면서 사회주의의 성격은 급변한다. 칼 마르크스는 유대인 출신으로 베를린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였다. 그는 파리에서 엥겔스와 만나 사회주의 혁명이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자본주의 체제가 비약적인 생산력을 가져왔다는 사실을 시인하면서도, 부르주아지가 노동자의 노동에 합당한 가치를 지불하지 않고 부를 착복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에 기술이 발달하면서 기계가 인간을 대체하고 실업률이 증대되면서, 노동자의 빈곤함은 결국 한계점을 넘.. 2023. 5. 25.
[유럽사] - 산업혁명이 촉발한 사상의 발전, 산업혁명과 경제사상 / 멜서스, 리카도, 푸리에, 마르크스, 루이 블랑, 오웬 [유럽사] - 산업혁명이 촉발한 사상의 발전, 산업혁명과 경제사상 영국에서 처음 촉발된 산업혁명은 곧 유럽전역으로 퍼져나가 유럽인들의 삶을 흔들어 놓았다. 이로인한 필연적인 사회변동은 삶의 변화와 더불어 사상가들의 이념을 바꾸어 놓았다. 산업혁명이 촉발한 사상가들의 이념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유럽의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주의에 입각한 자유경쟁과 자유방임을 기본적인 신념으로 삼았다. 이들은 상업활동이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나 개인의 자유로운 활동에 맡겨진다면 경제의 발전은 물론이거니와 사회전체의 복지와 부가 증가할 것이라는 낙관적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초 맬서스와 리카도는 그러한 의견에서 벗어나 있었다. 멜서스는 ‘인구론'을 제시하며, 자연적 상태에서의 인구는 기하.. 2023. 5. 24.
[유럽사] - 유럽에서의 산업혁명과 근대 유럽의 확립 [유럽사] - 유럽에서의 산업혁명과 근대 유럽의 확립 1851년 런던의 수정궁에서 열린 박람회는 영국이 진행한 산업혁명이 어떤 것인지를 유럽 전역에 알린 사건이었다. 영국이 가진 힘과 공업력을 과시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박람회장에 선보인 각종 기계는 물론이거니와 영국이 가진 석탄, 면직물, 철강의 시장 장악력은 세계에서 앞지를 나라가 없을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영국의 진보는 유럽 국가들에게 자극제가 되었다. 영국과 패권을 다투던 프랑스는 혁명과 전쟁으로 인해 공업의 기계화는 이루지 못한 상태였으며, 독일의 경우는 정치적 분열은 물론 사회경제적 후진성으로 인해 프랑스보다도 늦어진 상태였다. 프랑스는 1830년대 이후, 독일은 1850년대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산업혁명을 이뤄낸다. 미국도 1840년대가 되어야.. 2023. 5. 23.
[영국사] - 영국의 발전과 산업혁명, 기계와 교통통신의 발달이 부른 혁명 [영국사] - 영국의 발전과 산업혁명, 기계와 교통통신의 발달이 부른 혁명 산업혁명은 농경과 가축사육을 시작한 신석기혁명 이래 인류의 삶에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를 가장 처음 경험한 곳은 서유럽, 더 좁게는 영국이었다. 그 이유에 대한 대답은 쉬운게 아니지만 제레미 다이아몬드는 지형과 지리가 가져오는 필연석 결과물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18세기의 유럽은 지구 어느 곳보다 부유한 상태에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제국주의 국가들이 비인간적 식민지경영을 통해 이룩한 경제적 윤택함이기도 했다. 무슨 이유로든지 유럽은 어느곳보다 부유했고, 여러 민족국가로 나뉘어 자연적인 경쟁이 아루어졌다는 점, 사회경제적으로 근대적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상공업자와 금융업자가.. 2023. 5. 22.
[프랑스사] - 나폴레옹 체제의 유럽과 대륙봉쇄령, 나폴레옹의 몰락의 시작: 러시아 원정 [프랑스사] - 나폴레옹 체제의 유럽과 대륙봉쇄령, 나폴레옹의 몰락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고 국내외 전쟁을 종결시키면서 맺은 영국과의 아미앙 조약은 영국에게 불리한 조약이었다. 영국은 전비에 대한 부담으로 인해 불리한 조약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영국 내부의 문제가 해결되면서 1803년 영국과 프랑스는 다시 교전상태로 돌입했다. 동시에 1805년에는 다시 대불동맹을 결성하여 프랑스의 육군에 공격당한 유럽국가들을 포섭했다. 오스트리아, 러시아, 스웨덴이 3차 대불동맹에 참여했다. 나폴레옹도 육군으로 공격할 수 없는 영국을 희대의 숙적으로 여겼고, 해군이 강한 에스파냐와 동맹을 맺고 영국의 대불동맹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1805년 10월 프랑스와 에스파냐 연합함대는 트라팔가 해전에서 영국 넬슨제독에게 패배를 당.. 2023. 5. 20.
[프랑스사] - 프랑스 혁명의 종료와 나폴레옹의 등장, 제 1제정과 황제 나폴레옹 1세 [프랑스사] - 프랑스 혁명의 종료와 나폴레옹의 등장, 제 1제정과 황제 나폴레옹 1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프랑스의 군인이자 황제이다. 이탈리아계 프랑스인으로 코르시카 섬 출생이다. 그는 브리엔 군사학교를 통해 군인으로 출발한 나폴레옹은 파리의 육군사관학교까지 졸업했고, 1793년 12월 자코뱅 국민공회 당시 반란을 일으킨 툴롱 항 탈환에 공을 세우고, 1795년 10월 데르미도르파를 위해 왕당파 폭동을 진압하면서 젊은 장교로 인정 받았다. 나폴레옹이 군에 재직할 당시 1793년 프랑스에서 루이 16세를 처형한 사건을 계기로 유럽에서는 대프랑스동맹(대불동맹)이 형성되었다. 유럽 각국의 군주들은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명의 사상이 자국에 퍼지는 것을 경계했다. 영국을 위시한 프로이센, 네덜란드, 에스파냐 등.. 2023. 5. 18.
[프랑스사] - 혁명정부와 로베스피에르, 테르미도르 반동과 나폴레옹의 등장 [프랑스사] - 혁명정부와 로베스피에르, 테르미도르 반동과 나폴레옹의 등장 프랑스 군은 전선에서 패전에 패전을 거듭했다. 네르빈덴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군에 완전히 패배한 프랑스 뒤무리에 장군이 1792년 4월 프랑스 공화국에 반기를 들어 쿠테타를 시도하려다 실패하고 오스트리아 진영으로 도망친 사건이 일어나자, 국민공회의 지롱드파는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여기에 고물가와 식량부족에 허덕이던 파리의 민중이 국민공회를 습격하는 일까지 발생하자, 그해 6월 2일 국민공회는 지롱드파 지도자들을 숙청하였다. 지롱드파의 숙청 이후 주도권을 쥔 산악파는 모든 봉건적 공납을 무상으로 폐지하므로써 농민층의 완고한 지지를 받았다. 여기에 6월 24일 로베스피에르의 주장이 반영된 새로운 93헌법이 채택되었다. 93헌법.. 2023. 5. 16.
[프랑스사] - 국민의회의 개혁과 프랑스를 향한 위협, 루이16세의 처형과 혁명의 혼란 [프랑스사] - 국민의회의 개혁과 프랑스를 향한 위협, 루이16세의 처형과 혁명의 혼란 국민의회는 혁명의 토대 위에서 새로운 프랑스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재정이었다. 혁명의 혼란으로 말미암아 세금이 제대로 징수되지 않고 있었기에, 국민의회는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여 이를 담보로 아시냐라는 지폐를 발행하였다. 성직자와 교회는 재산을 몰수당했고 조직의 개혁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국민의회는 수도원을 해체하고 성직자를 선출제로 바꾸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직자민사기본법에 대해 로마 교황이 반발하고 성직자의 지지도 얻지 못하면서 이 법은 차후 반혁명과 내란이 일어나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또 국민의회가 해결해야할 문제는 제헌, 즉 헌법제정이었다. 헌법에 대한 논의는 혁명 직후인 1789.. 2023. 5. 14.
[프랑스사] - 국민의회의 인권선언과 봉건제 폐지, 루이 16세와 10월 폭동 [프랑스사] - 국민의회의 인권선언과 봉건제 폐지, 루이 16세와 10월 폭동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 이후 프랑스 전역은 혁명의 불꽃에 휩싸였다. 지방의 도시들은 파리의 상황을 모방하여 기존의 행정기구를 타파하고 시민계급을 중심으로 자치위원회와 민병대를 조직했다. 농촌 곳곳에서는 폭동이 발생하여 혼란이 진정되지 않았다. 농민들은 귀족들이 혁명을 저지하려한다는 소문, 외국 군대와 비적이 공격해 올 것이라는 소문을 믿기 시작했고, 이들 사이에서는 공포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농민들은 대공포를 이겨내기 위해서 호미와 갈퀴같은 무기로 쓸만한 자위책을 강구하였다. 이들은 극도의 공포에 휩싸여 귀족의 성과 영주의 저택을 습격해 불을 지르고, 봉건적 권리가 쓰인 문서를 불살라버렸다. 지방에서 올라오는 폭동 소식에 파리의.. 2023. 5. 9.
[프랑스사] - 프랑스 대혁명의 시작, 앙시앵레짐의 붕괴와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 [프랑스사] - 프랑스 대혁명의 시작, 앙시앵레짐의 붕괴와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 프랑스 대혁명의 깊은 원인은 구체제의 모순인 앙시앵 레짐이다. 그러나 혁명을 촉발시킨 트리거는 프랑스의 경제적 위기였다. 절대왕권을 자랑하던 루이 14세 말년 때부터 프랑스는 위그노 탄압등으로 국내외 산업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며 재정적 어려움에 허덕였으며, 루이 15세를 거쳐 루이 16세에는 결국 귀족의 면세특권을 없애려고까지 하였다. 결국 반대에 부딪혀 실패했지만 그만큼 프랑스의 재정상태는 엉망이었다.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참전했던 미국 독립전쟁은 결국 프랑스 국가재정을 위기로 몰아넣었다. 루이 16세의 재무장관 칼 론느는 근본적 해결책은 앙시앵레짐에 기반한 면세특권임을 간파하고 보조지세의 부과를 위한 개혁을 준비했다. .. 2023. 5. 8.
[프랑스사] - 프랑스 대혁명의 경제적, 구조적 배경 [프랑스사] - 프랑스 대혁명의 경제적, 구조적 배경 프랑스 대혁명은 1789년부터 1848년까지 일어난 일련의 혁명을 일컫는다. 1789년 일어난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을 시작으로 1830년 7월 혁명과 1848년 2월 혁명까지 모두 포괄한다. 프랑스 사회가 가진 모순을 시민과 농민이 주축이 되어 민중혁명으로 체제를 전복시킨 프랑스 혁명은 시민계급이 절대 왕정에 저항하여 봉건적 특권계급과 투쟁해서 승리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한 최초의 민중혁명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 혁명의 배경: 프랑스의 경제적 궁핍과 계급 구조적 모순 프랑스 혁명은 프랑스 사회가 가지고 있던 구조적 모순과 경제적 궁핍함에서 기인한다. 경제적 궁핍함으로는 당시 프랑스가 처했던 외교적인 상황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프랑스는 18.. 2023. 5. 7.
[독일사] - 프리드리히 대왕과 슐레지엔 정복,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 [독일사] - 프리드리히 대왕과 슐레지엔 정복,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 프리드리히 대왕은 28세의 어린나이로 즉위하자 마자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이라는 상황을 맞이한다. 그는 선대들이 전해 내려준 풍족한 재정, 능률적인 관료조직, 훌륭하게 훈련된 군대를 가지고 있었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전쟁이 일어나자 국운을 짊어지고 뛰어들었다. 오스트리아는 현재의 벨기에와 이탈리아 일부를 영토로 가지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남자상속을 기반으로 계승을 관리하였는데, 황제 카를 6세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외동딸 마리아 테레지아만이 유일한 계승자였다. 황제는 생전에 딸에게 황제 자리를 계승하게 하려 1713년 국사조칙을 반포하는 등의 노력을했으나, 황제가 죽자 이 조칙을 지킬 국가는 어디에도 없었다. 카를 6세가 죽자 프.. 2023. 5. 6.
[영국사] - 제임스 2세와 명예혁명, 하노버 왕조와 오렌지공 윌리엄 [영국사] - 제임스 2세와 명예혁명, 하노버 왕조와 오렌지공 윌리엄 아버지인 찰스 1세가 크롬웰에 의해 처형되고, 그의 아들 찰스 2세는 프랑스로 망명하여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660년 크롬웰 사후 왕정복고를 통해 다시 잉글랜드의 왕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찰스 2세는 많은 국민들이 가지고 있던 청교도식 금욕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거기에 신중한 성격으로 의회와 협의를 통한 정치를 하면서 자신의 자리를 잘 유지했다. 그러나 그가 후사없이 죽고, 동생인 제임스 2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다시 혁명이 시작된다. 제임스 2세는 유능한 행정가이자 군인이었지만 정치가로서의 재목은 아니었다. 의회와의 협치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거기에 국왕이 카톨릭 신자이다 보니, 잉글랜드에서 카톨릭의 재합법화를 원했다... 2023. 5. 5.
[영국사] - 청교도 혁명과 올리버 크롬웰, 영국의 왕정복고 [영국사] - 청교도 혁명과 올리버 크롬웰, 영국의 왕정복고 의회와 국왕 찰스가 각각 군대를 조직하면서 영국은 내전에 휩싸인다. 이를 청교도 혁명이라 한다. 내란이 시작되었을 무렵 전세는 왕당파인 기사당에 유리했다. 의회파의 군대는 지방유력인사들의 병력을 끌어모은 형식이었기에 약하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1644년 마스턴 무어전투에서 두각을 드러낸 원두당의 크롬웰이 전면에 등장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올리버 크롬웰은 철기군을 조직하여 내전 초반에 왕당파에 밀리던 상황을 역전시켰으며, 신형군(New model army)를 조직하여 네이즈비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가져온다. 크롬웰의 잇따른 승전보로 그는 의회에서 강한 영향력을 갖게되었다. 왕당파는 이후 전세를 뒤집지 못하고 1년 뒤에 의회파에 항복한다. .. 2023. 5. 4.
[영국사] - 찰스 1세와 영국 청교도 혁명의 시작 [영국사] - 찰스 1세와 영국 청교도 혁명의 시작 찰스 1세의 장기의회의 선거 결과는 의회파의 강세와 국왕파의 약세로 나타났다. 찰스1세의 폭정과 의회의 의원들을 체포하려 했던 행동으로 인해 그동안 이어져온 협조는 사라졌다. 이는 스튜어튜 왕조에 대한 의회의 협조는 더 이상 없을 것이란 의미였다. 의회는 찰스 국왕이 행해온 세금같은 지금까지의 폐산을 일소하고, 과세를 폐지했다. 이는 영국 국왕이 휘두르던 절대왕정에 대한 제한이자 개혁작업이었다. 의회의 작업은 성실청(Star Chamver)이라는 특별법정 같은 왕권의 특별법정을 해체하고 강압적인 국교회 정책을 철회하며, 3년마다 의회의 정기적인 소집을 결의했다. 장기의회의 개혁작업과 더불어서 억눌렸던 영국사회는 이때를 기점으로 언로가 트이기 시작한다. .. 2023. 5. 2.
[영국사] - 스튜어트 왕조와 영국 혁명의 전조, 권리청원과 의회 해산 [영국사] - 스튜어트 왕조와 영국 혁명의 전조, 권리청원과 의회 해산 엘리자베스 1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튜더왕조는 단절되었다. 이에 메리 스튜어트의 아들이자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6세가 영국왕 제임스 1세로 즉위하였다. 이는 절대왕권과 의회가 국민적 지지아래 활동하는 튜더왕조의 절대왕권적 통치와 이별하게 되는 사항이었다. 제임스는 영국의 현실을 자각하지 못한채 자신의 신념대로 왕권 신수설을 주장하면서 이를 실천하려하였다. 의회는 이에 반대의사를 표명하면서 절대왕권과 의회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동시에 그는 청교도를 박해하면서 종교적 갈등도 일으켰다. 일부 청교도들은 박해를 피해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갔다. 영국에서 왕과 의회의 대립은 계속 이어졌다. 의회는 왕이 필요로 하는 .. 2023. 5. 1.
[러시아사] - 민족주의와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공화국의 시대 [러시아사] - 민족주의와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공화국의 시대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에도 각지에서 일어나는 민족주의적 독립투쟁과 경제정책 파행으로 소비에트 내부의 상황은 파국을 향하고 있었다. 고르바초프 집권 초기의 낙관론과 희망적인 메세지는 모두 사라진 상태였고, 대중의 열광이 난국을 타개할 것이라는 고르바초프의 희망이 무색하게 상황은 악화되었다. 러시아의 경제상황은 악화일로를 걷고있었다. 소비에트 시민은 물질문명적 측면에서 매우 궁핍해졌다. 1990년 무렵에는 산업쇠퇴와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경제가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소비품 부족사태로 인해 상점에는 긴 줄이 생겼고, 기근에 대한 우려까지 불거졌다. 1990년 봄, 우랄과 시베리아, 우크라이나 광부들이 파업을 일으켰다. 그들은 물질적인 .. 2023. 4. 22.
[러시아사] - 고르바초프의 등장과 소비에트, 러시아의 개혁과 쿠테타 [러시아사] - 고르바초프의 등장과 소비에트, 러시아의 개혁과 쿠테타 1985년 소비에트의 지도자로 등장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소비에트가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당시 소비에트와 동유럽에서 전개되던 사건들은 소비에트 지도부는 물론이고 모든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를 실망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소비에트 경제의 낮은 경제성장률은 비판론과 결부되어 그에게 사회 개혁의 의무를 수행하게 만들었다. 고르바초프는 서기장에 임명되었을 때 우선 소비에트 내외에 산적한 문제들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면서 위기에 대응하고자 했다. 소비에트에 산적한 문제는 우선 낮은 경제성장률, 생활수준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 암울한 농업 상황, 제조업의 질 하략, 과학 기술분야에서 세계의 발전 수준에 뒤떨어지기 시작한 것, 국.. 2023. 4. 22.
[러시아사] - 프라하의 봄과 아프가니스탄 침공, 소비에트의 폭력적 대응 2 [러시아사] - 프라하의 봄과 아프가니스탄 침공, 소비에트의 폭력적 대응 2 동유럽의 문제는 끊임없이 불거져나왔다. 헝가리 혁명을 진압한 후 12년간 소비에트는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제도적 다양성과 이데올로기적 다양성을 가진 공산주의 다원주의를 용인하려했다. 그러나 이는 동유럽 여러 국가들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현상을 포괄하지는 못했다. 1968년 프라하에서는 “프라하의 봄"이라 불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체코,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은 경기침체에 시달리고 있었다. 프라하의 봄은 이러한 경제침체를 해결할 것을 요구하는 개혁요구, 민주화 요구 운동이었다. 프라하의 봄에 의해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권력독점을 포기한다고 말했고, 경제 수정주의와 민주주의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동.. 2023. 4. 21.
[러시아사] - 폴란드와 헝가리의 혁명, 소비에트의 폭력적 대응 [러시아사] - 폴란드와 헝가리의 혁명, 소비에트의 폭력적 대응 1956년은 소비에트에게 있어 놀란만한 해였다. 스탈린 치하에서는 허용되지 않았던 티토와 유고슬라비아의 노선은 오류를 낳았고, 스탈린의 후임자인 후르쇼프와 불가닌은 이 오류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위해 베오그라드를 방문했다. 이러한 부드러운 정책에 반대했던 외교장관 몰로토프는 셰필로프로 교체되었다. 흐루쇼프의 베오그라드 방문과 더불어 그가 했던 1956년의 2월 연설은 동유럽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모스크바가 스탈린의 오류와 범죄를 인정한 것은 체제 개혁을 위한 요구를 허락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동시에 폴란드와 헝가리에서 변혁을 요구하는 시위가 격렬하게 터져나왔다. 폴란드에선 1956년 6월 하순경에 노동자들이 포즈난 시의 거리로 쏟아져.. 2023. 4. 17.
[러시아사] - 스탈린 사후 소비에트의 대외관계와 냉전: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창설 [러시아사] - 스탈린 사후 소비에트의 대외관계와 냉전: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창설 스탈리의 사망 이후 그의 후계자들이 소비에트를 맡으면서 대외정책은 훨씬 더 미묘하고 복잡해졌다. 스탈린 당시의 관점인 세계가 노동자의 적으로 가득 찼다고 보는 관점은 점차 “차이점의 연속체(a continuum of difference)"이라는 개념으로 대체되었다. 각 국가간의 사이의 이해관계와 입장이 폭넓게 다르다는 점을 인정할 뿐 아니라, 일부의 차이점은 소비에트 이익에 반하지 않으면 이를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어느정도 인정의 한계를 지녔지만, 소비에트 블록내에서 견해의 차이를 관용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는 자본주의와 소비에트가 공존할 수 있고, 전쟁 없이 이 차이점을 해결할 수 있다는 미래를 제시했다. 물론 .. 2023. 4. 15.
[러시아사] - 흐루쇼프의 실각과 새로운 통치자 브레즈네프 [러시아사] - 흐루쇼프의 실각과 새로운 통치자 브레즈네프 여러모로 짧았던 흐루쇼프의 통치기간은 오랜 혁명 정치사의 정점이었다 흐루쇼프는 국내외적으로 자신의 통치 방향을 ‘사회주의 사회 건설'로 잡았고, 그의 후계자들은 그와는 다른 정치적 방향성을 보여주었다. 흐루쇼프가 개혁과 변덕스러운 캠페인을 보여주었다면 후계자들은 혁명이 아닌 질서를 바라며 통치했다. 1964년 새롭게 구성된 소비에트의 집단지도부는 브레즈네즈를 필두로 구성되었으며, 1917년 이후 성년이 된 최초의 세대였다. 이들은 혁명 당시에는 어린아이였고, 대부분 기술교육을 받았다. 모든 지도자들은 대숙청을 통해 당의 고위직으로 진입했고 빠르게 승진했다. 대체적으로 그들은 안정된 권력과 효율적인 경제 발전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실용적인 인물들이.. 2023. 4. 12.
[러시아사] - 스탈린 이후의 소련, 스탈린의 죽음과 흐루쇼프의 등장, 크렘린의 권력투쟁 [러시아사] - 스탈린 이후의 소련, 스탈린의 죽음과 흐루쇼프의 등장, 크렘린의 권력투쟁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은 1953년 3월 5일 사망하였다. 그의 공식적인 사망원인은 뇌졸중이었다. 스탈린의 죽음 이후에 크렘린은 3일간 침묵을 지켰으며, 결국 독재자의 서거를 발표하였을 때 새로운 지도부는 인민들의 통합과 단결을 강조하며 자신들이 국가를 통치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선언했다. 여기서 말렌코프가 등장하여 가장 중요한 직책인 당 서기장직과 수장자리를 겸임하였다. 말렌코프 다음으로는 베리야와 몰로토프가 그 다음 순서를 차지하여 독재자가 죽고 난뒤 소련의 삼두체제를 구성했다. 그러나 이러한 삼두체제는 오래가지 않았다. 3월 준순이 되자 말렌코프는 당의 최고위층이긴 하지만, 당 서기장식을 사임한다고 발표하였다. 당.. 2023. 4. 11.
[한국사 연표] - 한국사 연표 (삼국시대, 고려사, 조선사, 근현대사 - 23년 3월) [청동기-철기시대] BC 50: [한국사] - 한국의 청동기 시대와 고조선 BC 7C: [한국사] - 고조선의 등장과 발전 BC 108: [한국사] - 고조선의 발전과 한제국의 조선침략 BC 37: [한국사] -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BC 18: [한국사] - 백제의 성립과 마한 BC 57: [한국사] - 사로국의 등장과 신라의 건국, 발전 AD 42: [한국사] - 가야 제국(諸國)의 성립과 쇠락 [삼국시대] AD 4C: [한국사] - 고구려의 영토팽창과 전성기, 광개토대왕의 등장 AD 5C: [한국사] - 백제의 전성기 AD 475: [한국사] - 백제의 천도와 쇠락, 웅진시대와 사비시대 AD 6C: [한국사] - 신라의 발전과 부흥, 진흥왕의 영토확장 AD 607: [한국사] - 고구려와 수나라 .. 2023.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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